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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진 Nov 30. 2021

당신을 건너 여기, 인디아 0

그야말로 화양연화!

 

 


단기 4347년 갑오해 정월 초닷새 오시 경 태국 북부,



칠흑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 촘촘한 빗살로 다스려 단단히 쪽지고 허리춤이 움푹하여 곡선이 아찔한데다 앙가슴 가득 열려 야릇한 기운 물씬한 화문 색색의 상의, 삼베에 날염을 가미해 꽃무늬 새긴 기다란 치마에 불그스름한 때깔로 물들인 가죽꽃신 신고서 청명한 햇살 난분분한 가운데 서풋서풋 시가를 나들이하다 어느 목 좋은 술집 차양 아래 유유히 자리 앉아 광야의 독생자인 양 일면 도도하게 한편 고고하게 낮술을 받잡고 있노라면?



예의 그렇듯 여기저기서 틀림없는 입질이 온다.


“헤이, 진! 서스피셔스 진!”



명은 진(Jin)이요 성은 서스피셔스(Suspicious 수상한), 하여 ‘수상한 진’이라 일러지는 동양의 여행자. 신개념인지 무개념인지 개체별로 호칭이 주어지기 시작한 이후 수세기에 지속해온 작명법을 과감히 버린 그는 이름만큼이나 행색 또한 심히 기기묘묘하고 가히 알쏭달쏭하며 실로 막무가내하니 대체 저, 저건? 마주치는 자의 동공을 강타하는 비주얼에 누렁이 바둑이 수준의 지능지수만 동반된다면 차마 못 잊혀 절로 기억되고 즐겨 불러지는 별종인간, 그는 남자고 더불어 서른을 훌쩍 넘긴 아저씨다. 거기에 알코올에 환장하는 날건달이며 여성에겐 시종 로맨티스트요 열린지갑이지만 동성에겐 대게 무심하고 곧잘 까칠하며 간혹 난폭하기도 한 그런 일반적인 XY염색체이다. 다만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극히 분방하여 물음표를 난발할 뿐.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이자 아시아 여행의 베이스캠프 타이(Thailand). 북방의 장미라, 남부 방콕에 이은 제2의 도시 북부 치앙마이에서 762커브라는 황당한 구절양장 고갯길을 따라 세 시간 거리에 자리한 산골소읍 빠이(Pai). 태생배경과 성장과정과 현재실황이 유일무이 독자성을 구가하고 있어 혹자는 예술가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여행자의 마을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히피들의 마을이라고도 하는 상주인구 삼천의 소읍에 똬리를 틀어 세계만방에서 몰려든 새하얀 피부, 짙푸른 눈동자, 샛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청초하고 청순한가 하면 사뭇 요염하고 자못 도발적인 생명체들과 늴리리야 늴리리 노래하며 몹시 낭만적으로, 때로 퇴폐적으로 놀고 자빠져있자니 말없이 뺨을 쑥 파고드는 보조개. 제 가진 모두를 걸고 떠나온 노마드, 그 달라진 존재와 존재의 방식에서 물리칠 수 없는 행복이 왔다. 이제 정녕 길바닥 인생인 것이다! 










“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곳에서 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예쁜이들과 술을 마시는 것, 나는 그것보다 우선하는 생의 재미를 알지 못해. 그것이 내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이고 전부를 팔아치우고 떠나와야 했던 까닭이야. 그래서 난 지금 네게 감사해.


마시자! 아름다운 아가씨 줄리아.”



아름다움이 위대할 수 있음은 상대의 아이덴티티에 충돌을 가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변화를 도출하기 때문, 사고와 인식의 해체와 재조립, 이른바 존재전이. 마른날의 벼락처럼 예상과 상상 너머에서 들이쳐 불가항력으로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단숨에 사로잡아버린 매혹의 카타르시스 유랑! 초면에 사람 잡은 그 터질 듯한 희열은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도록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으니 그동안 난 뭐했지? 이 나이 먹도록? 집도 절도 꿈도 싸가지도 없이? 각성은 일순간에 찔러들었다.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되어 심장을 꿰뚫었다. 아윽!



언감생심 마님을 품은 돌쇠에게 언제까지 쌀밥이 주어지랴, 결국 촘촘한 멍석말이로 귀결되기 십상이듯 처지를 망각한 욕망이란 곧 비극의 이음동의어일 터, 연필로 치면 몽당연필이요 담배로 치면 꽁초담배요 식빵으로 치면 짜투리식빵 같은 아이고, 동네 창피한 청춘. 어디 기댈 데, 뻗을 데 없나? 사방팔방 암만 둘러보아도 전후좌우 전방위적으로다가 꽉 막힌 에라이, 변두리 쌈마이 인생. 어쩌다 곰을 잡아도 그럼 그렇지, 꼭 쓸개 없는 곰만 골라잡는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 도락인줄 알고 들어간 문은 나락으로 안내하고 뭣도 모르면 국으로 가마니나 쓰고 있을 노릇이지 뾰족한 수랍시고 노렸다가 무리수를 거쳐 자충수로 결착되는 악화일로의 나날들. 그래, 한 번이라도 원도 한도 없이 살아보자 싶어도 이건 뭐 가진 게 있어야지, 설상가상이라더니 가진 게 없으면 빚진 거라도 없어야지. 이래서 사채업이 횡횡하는구나, 씁쓸히 고개 끄덕일밖에.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밀려든 외부와 발화된 내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



서럽고 억울해 맨바닥 치고 생가슴 쥐어짠다고 카드할부만 남겨놓은 채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며 훌쩍 떠나버린 옛사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요, 비록 하지 말란 짓 착실히 해가며 손가락질로 여문 대가리라 할지라도 굵어질 만큼 굵어졌으며, 사람이 날 수 없듯 애쓰고 용써서 될 일이 있고 일백 번 고쳐 죽었다 깨나도 안 될 일이 있기 마련이라는 현실감각 또한 없지 않으니 이제는 선택의 순간, 일반과 통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체념과 합의를 끌어안을 것인가, 나날이 삐딱해지는 심신에 오기와 배짱을 장착할 것인가? 양자택일, 그 갈등의 기로에서 먼저 떠오른 것은 남들 손자손녀 재롱에 함박웃음 짓고 있을 때 저런 저 웬수 같은 큰자식 놈 한심 근심에 게보린 끊일 날 없는 시골의 노모가 아니라 쥐뿔 없는 주제에 뭘 믿고 까부는지 당최 수그러들 줄 모르는 사나이 가오, 갈 데까지 가보자 이거야.



욕망이란 비극의 배다른 형제인 동시에 생을 추동하는 막강한 엔진이었으니 참 나, 세상 별 일이 다 있다고 내가 이럴 줄 나도 몰랐네. 비가 온다고 알기를 해, 눈이 온다고 동하길 해, 바람이 분다고 자니? 잔다고? 그래 잘 자, 찔러보길 해? 빠삐용 선배를 전례 삼아 이게 다 죄받는 것이다 간주하고 그저 묵묵히 손발을 고생시키며 날과 달과 해를 보내고 맞이하길 연이었으니 아침에 도토리 하나 더 준다고 좋다던 원숭이들처럼 뒷일은 곧 남 일이다 여기던 칠푼이 팔푼이에서 과연 저 자식이 내가 알던 그 자식인가? 노모마저 고개를 갸우뚱하리만치 뜬금없었던 지구력과 인내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모르면 몰랐지 알고도 당할 만큼 반푼이는 아니었을 터, 바라면 바랄수록 치고 달리는 힘은 부풀고 또 영글었다. 한 조각 추억도 눈물도 치즈케이크도 없이 매장돼버린 주검의 날들을 비집고 나와 오늘에 되살아난 비애 울분 떼먹힌 월급 165만원 뭐 그런 것들과 어깨동무하며.











 



옛말에 시엄씨 죽는 날도 있다고 했다. 시간이란 순간의 방심도 한줌의 연민도 일절의 지체도 없이 순전히 흐르는 법, 뱃속의 아이에게도 출생월일이 있고 이등병 군바리에게도 제대날짜가 있으며 감방의 죄수들에게도 출소일자가 있듯이 내게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당도한 종착역이 있었으니 이제 비행기로 갈아타야할 타이밍, 세상으로 향하는 티켓을 거머쥐고서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각오로 가진 전부를 처분해버렸다. 브라보, 멋지다! 다만 집도 절도 싸가지도 없는 내게 팔아 돈이 될 유일한 물건인 자동차가 그만 서른두 건의 압류에 묶여 스스로의 몸값을 능히 상회하는 벌금을 토해내게 했던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마무리에 여유를 두었더라면 음지에서 활동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동생들 불러다가 어떻게 좀 수를 썼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 쩝.



허리춤을 넘나드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꽃으로 도배한 광년이 스타일, 더불어 고전감성 폭발하는 핸드메이드 캐리어에 한 자루 대금을 꽂아 넣고 미끈한 슈트와 화끈한 코트로 무장한 채 주색잡기의 달인이자 퇴폐와 낭만의 화신으로 거듭나고자 전 존재를 담보로 예정할 수 없는 길에 오른 어느 수상한 남자로 하여금 나머지 생을 투신하고 싶게 만들었던 매력적인 소읍 빠이. Daytime drinking이야말로 Daytime dreaming이라며 잘 한다 잘 한다 부추기는 낮술에 흔쾌히 건배하는 스페인계 혼혈 아가씨 줄리아는 아기자기 예쁘게도 생긴 입술로 사탕을 건네주듯 살포시 물었다. 이따 산에서 하는 파티에 갈 거냐고. 



다소곳이 내려앉은 저물녘을 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레터링과 볼륨 좋은 인어 한 마리가 자수로 새겨진 화이트셔츠에 글렌체크 니트보타이 동여매고 바짓단의 너비가 살벌하게 넓어 무려 반세기 전 러브 이즈 터치요 터치 이즈 러브라 설파하셨던 존 레논 형님께서 입고 다녔을 법한 클래식팬츠와 함께 어깨에 직각을 부여하고 허리에 여백을 제거하며 찰싹 달라붙는 레오파드재킷, 천연가죽에다 무명조각을 가미해 풍취를 높인 윙팁구두로 준비완료.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시나 봐요?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차림으로 입구에 닿은 산중의 히피축제. 어서 납시라는 듯 초입으로 마중 나온 경쾌한 음악소리에 피식, 담배 한 개비 거세게 빨아올리며 자아, 선수 입장!











 


너른 공터를 둘러 수공예품들이 전시되고 곳곳에 모닥불이 타올라 불 밝히고 중앙무대에선 기타속주 흘러내리는 가운데 헤이, 진! 서스피셔스 진! 수상한 이름 기꺼이 불러주시는 각색의 꽃처녀들과 별스레 친한 척해대는 일단의 놈팡이들. 마치 일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하이 허니, 자연스레 볼을 부비며 거푸 술잔을 들이켜고 있자 기타의 퇴장과 함께 불을 매단 포이가 현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신비스런 음색을 지닌 디지가 울려 퍼지고, 솥단지를 닮은 행 드럼이 조화를 이루고, 시각을 담당하는 히피언니들은 흡사 우주와 교신하듯 주술적이고 나사 풀린 춤을 춰대고…… 새하얀 피부, 짙푸른 눈동자, 샛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청순하고 청초한가 하면 사뭇 요염하고 자못 도발적인 생명체들께선 이 수상한 남자를 얼싸안고 어화둥둥에 여념 없으시고…… 아아, 이토록 생이 뚜렷한 순간,



그야말로 화양연화!



쫒고 쫒기는 속도전, 치고받는 공방전, 속고 속이는 복마전. 알코올만 없다 뿐이지 술맛은 똑같다던 맥주처럼, 사진만 안 찍힌다 뿐이지 다른 건 멀쩡하다던 카메라처럼 결정적 무언가가 빠져있던 헛헛한 삶은 이제 없다. 머다란 세월이 노동으로 축났으나 규약에 기재된 바 없으니 실업에 대한 후사가 있을 리 없고 곰팡이 연회를 벌이는 옹색한 월세방도, 기름을 토하며 곧 쓰러질 것처럼 쿨럭거리던 위독한 자동차도 이제는 없지만 그런 시시한 보호막으론 햇볕 한 줌 바람 한 줄기 대체될 수 없는 삶이 여기 있다. 생애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한 시절, 짧기에 한층 강렬하고 끝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청춘의 나날들이.



몽환인 듯 흔들리는 불빛에 기대에 슬며시 눈을 감고 뜻 모를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유유히 너풀거리자면 의식의 흐름은 가파른 상승기류를 타고 멀리 날았다가 허공을 되짚어 이내 쏟아져 내리기를 연잇는다. 사유의 손길은 지나간 회한을 어루만지고 지나온 시간의 자취는 기억과 추억 사이 어느 골짜기를 부유하다 정해진 약속인 양 그리움 짙은 그곳으로 휩쓸린다.



그곳, 십대소년의 꽃다운 순정을 다 바쳐 사랑했던 그녀처럼, 어린 내게서 흔쾌히 동정을 앗아간 그 연상의 여인처럼 변할 수 없는 낙인으로 새겨진 최초의 이름 인디아(India). 꿈은 개꿈만 있는 것이 아니요 침대전용도 아니라는 인식변환을 심어준 파종의 대지이자 이해와 통념의 지평을 뒤집어 상상이 곧 행위가 되는 심신호환을 일으킨 지진의 진앙이자 벼락같은 문제재기와 함께 생의 화끈한 방향전환을 유도해버린 반전의 대서사시 인크레더블 인디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난감한 동네, 여비를 버리던지 성질을 버리던지, 그것도 아니면 제정신을 버리던지 뭐 하나는 버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나라, 친구 하자는 건지 한판 붙자는 건지 가늠하기 애매한 세계, 그 역동적인 카오스를 떠올린다.



황홀하게 추락하는 핏빛 석양들, 분주한 사람들의 왁자한 소음들, 무공해 아이들의 순도 높은 웃음들, 뭐라 형언하기 힘든 특유의 냄새들, 다채롭고 강력한 원색들, 기존의 관념을 과감하게 버린 음식들, 그놈의 속 터지는 No Problem과 This is India, 한 가지 물음이 도출하는 열 가지 대답들. 도대체 기약이 없는 각종 시간표들…… 그리고 그녀들. 그 처음 만난 자유, 그 환희의 순간들을.



어떠한 세월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거슬러 올라야할 생의 분명한 지점으로 남은 인도, 다시 그곳으로 간다.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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