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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Sep 10. 2019

9. 메가버스 / Democracy Brewing

25APR19

메가버스


 보스턴으로 떠나야 할 아침이 밝았다. 이제는 익숙한 침대에서 몸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씻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짐을 두 번 싸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공용 선반에 세면도구의 물기를 말리기 위해 놓아두고 옷가지부터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생각보다 짐을 싸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면 나의 짐 싸는 속도가 빠른 것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짐을 싸는 일이 많았다. 나름 나만의 방식과 체계도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방심하면 빠트리는 것이 있기에 뭔가 느낌이 이상하면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나중에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 정말 출발해야 할 시간이 왔다. 게스트하우스 매니저 형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다시 뉴욕에 돌아와 이곳에 묵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놀러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여행 중 이동할 때 가장 번거로운 건 모든 짐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행에 가져온 캐리어는 보통 내가 들고 다니던 것보다 사이즈가 더 커서 처음부터 애를 먹었다. 특히 계단이나 도로의 턱을 만나면 힘을 쓸 일이 많아진다. 처음에는 캐리어에 스크래치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뤘지만 나중에는 귀찮아서 부딪혀도 막 끌고 다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한테만 그렇게 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신경 쓰인다. 마치 탱크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괜스레 남들에게 소음공해가 될까 봐 눈치가 보인다. 남들은 별 신경 안 쓰는데 오히려 내가 제 발 저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캐리어가 아무리 불편해도 점심은 먹어야 하기에 전에 들렀던 베이글 가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훈제 연어 샌드위치 말고 다른 걸 먹어보고 싶어 고민하다 기본 메뉴 중 하나인 햄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훈제 연어 샌드위치가 너무 맛있었던지 햄 샌드위치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곳의 음식은 언제나 가격만큼의 양으로 제공하기에 배부른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을 해결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걸어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로 허드슨 야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목적지 주위에 다다랐는데 전에 다녀간 허드슨 야드의 명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공사 중인 건물들이 많아서 어수선하고 각종 차량과 장비들이 오가느라 번잡하였다.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언제나 그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멀리 길가에 2층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생각하던 터미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터미널이 아니라 정류장이었다. 콘크리트 밑동에 쇠파이프가 꽂힌 표지판에는 각각의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뒤로 가이드라인을 따라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지에 맞게 서있었다. 내가 탈 버스의 출발시간은 오후 1시 40분 버스인데 아직 1시도 되지 않아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잠시 화장실도 다녀올 겸 허드슨 야드의 한 쇼핑몰로 들어갔다. 내부는 넓고 층고도 높았다. 1층부터 3층까지 건물 중앙부가 뚫려있어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2층 화장실을 쓰고 나오다 한편에 있는 블루보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커피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다 얼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고소한 커피 향이 자꾸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간 버스 정류소(!)에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Boston'이라고 써진 표지판에 뒤로 열댓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아직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오지 않았다. 출발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차가 오지 않자 앞에 있던 젊은 백인 남자가 나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도 이번이 버스를 타고 보스턴으로 가는 것이 처음이라(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이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다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의 고향인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남자 친구? 아! 카투사 복무 시절 들었던 한 캐치프라이즈가 떠올랐다. 'Don't ask don't tell' 다시금 이 나라가 얼마큼 다채로운 나라인지 눈앞에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에게 뉴욕이 어떻냐고 물으며 자신은 이곳이 싫다고 하였다. 당장 빨리 보스턴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사랑을 잃고 도시생활에도 지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의 넋두리를 듣다 보니 우리의 버스가 출발 예정시간을 몇 분 넘긴 채 도착하였다. 버스회사 직원의 인솔에 따라 차례로 사람들이 짐을 싣고 올라타는데 실랑이가 벌어졌다. 기다리는 줄에 서있지 않던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성이 아이를 데리고 먼저 버스에 오르겠다고 떼를 썼다. 남자는 버스회사 직원이 제지해도 아이를 핑계로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 결국 다른 직원들이 합세하자 작은 소란이 정리되었다. 내 앞에 서있던 보스턴 출신의 실연당한 남자가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마음에 동의를 표했다. 드디어 트렁크에 짐을 싣고 예약해둔 2층 맨 앞좌석으로 향했다. 일반 좌석보다 조금 비쌌지만 전창으로 시야가 완전히 트여있어 버스 밖 풍경을 보기 좋았다. 인도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희망찬 삶을 찾아서 낯선 도시로 떠나는 것일까? 조금씩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할렘 지역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조용한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곳 근처에 컬럼비아 대학교가 있는데 학부 동기가 그곳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학기말이라 시간도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뉴욕에 돌아와서 만나기로 하였다. 혹시나 지나가다 그녀를 우연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버스가 그녀의 학교 근처에 다다랐을 때 주의 깊게 창밖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럴 일은 없었다. 가방을 뒤져 맥주를 꺼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곳은 맥주가 무제한 공짜였다. 마지막 전리품으로 캔 두 개를 챙겨 왔다. 역시 여행 중에 맥주만 한 청량한 음료(?!)가 없다. 통로 건너편 자리에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 두 명이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뭔가를 먹고 있었다. 다시 가방을 뒤져 <앵무새 죽이기>를 꺼냈다.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펼쳐봐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가 검지 손가락 두께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상당히 노후된 것 같았다. 곳곳에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는 곳들이 많았다.



 중간 도착지인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도착한 시간으로 하니 예상 도착시간이 한 시간이 훌쩍 넘는 7시 반은 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딱히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 시간에 얽매이지 않기로 하였다. 조급해하는 것보단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린 지 5시간 이상이 훌쩍 넘었지만 그렇게 피곤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드디어 보스턴 외곽지역에 접어들었다. 지도를 보다가 곧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근처의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의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투광기가 달린 수십 개의 조명등이 철탑 위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펜웨이파크 옆을 지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스턴에 왔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Democracy Brewing



 터미널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는데 차이나타운을 지나야 했다. 터미널과 거의 바로 맞닿아있는 차이나타운 정문에는 성조기와 대만 국기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보스턴 차이나타운은 대만계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라고 하였다. 확실히 차이나타운에는 당연하게도 중국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명소라기보다는 먹거리 골목 느낌이 강했다. 거리를 접하는 대부분의 점포가 식당이었는데 대부분 손님들이 어느 정도 차있었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차이나타운 위쪽 지역을 살짝 벗어난 곳에 있었다. 호스텔이 있을법한 건물의 한쪽 끝에 조그마한 간판 등이 입구를 알려주었다. 로비에 들어가서 보니 밖에서 보았던 건물을 전부 다 사용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호스텔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잘 정돈된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대학교 기숙사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데스크 직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호스텔 내부로 들어갔다.


 배정받은 방을 찾아 4층에 올라와 보니 여러 개의 방이 외부 화장실을 공유하는 시스템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방에 이층 침대 4개가 락커와 함께 줄지어 긴 벽에 붙어 있었다. 누군가 한 명이 짐을 푼 듯한 침대와 캐리어가 보였다. 내 자리는 방 출입구 반대편 창가 옆 아랫 침상이었다. 짐을 풀고 정리하는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아주 착해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사실 남자라고 하기보다는 청소년 같았다. 흡사 해리포터와 같은 외모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다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함께 나가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숙소 주변을 검색하다 근처에 괜찮은 브루어리가 하나 있길래 가려던 참이었다. 그는 브라질에서 온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라고 하였다. 이번에 하버드에 합격하였는데 학교 방문 및 설명회 행사가 있어 보스턴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Democracy Brewing'이라는 이름을 가진 브루어리에 도착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른편 벽면에 보이는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도시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그리스 여신이 오른손엔 맥주를 위로 들고 왼손에 칼을 아래로 쥐고 있었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시끌벅적했다. 바 위에 달린 여러 대의 텔레비전에서는 스포츠 경기가 중계중이었는데 역시나 레드삭스 경기도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큰 테이블의 맨 끝 좌석으로 안내받았다. 수십 명이 한 번에 단체로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 탁자였다 해리포터 친구(이하 해리)는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기름진 것을 피해야 된다며 샐러드와 과일음료를 주문했다. 그에 반해 나는 건강검진을 받은 지 오래되어 햄버거 세트와 이곳의 대표 맥주인 ‘Worker’s Pint’를 시켰다. 바로 나온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니 왠지 하루 종일 고동 노동을 하고 온 뒤의 맥주 한잔의 행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컵은 일반적인 알루미늄 캔음료 형태의 유리컵이었는데 두 손이 서로 맞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브루어리의 철학과 잘 어울리는 엠블럼인 것 같았다.



 해리는 하버드에서 경제학과 행정학을 전공한 다음에 고국에 돌아가서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하였다. 그는 브라질에서 외교관이 되기 위기 위해 필요한 요건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가 공부하고자 하는 두 학문을 전공하는 것과 4개 국어를 능숙히 구사하는 것 마지막으로 해박한 브라질 역사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미 자신은 4개 국어로 자유롭게 원어민과 대화할 수 있어 하버드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적으로 역사공부만 하면 기본 요건을 갖출 수 있다고 정말 쉽게 얘기하였다. 뭔가 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을까 해서 스포츠 이야기를 꺼냈다. 보스턴이 도시 규모에 비해 미국 4대 스포츠마다 명문구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얘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자신은 구기종목에는 관심이 없지만 즐기는 운동은 승마라고 하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본인 소유의 말이 있냐고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그렇다고 답하였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류층인 것 같았다. 확실히 같은 나라의 일반적인 동년배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Cellar Door'라는 다소 스산한(?) 지하 저장고의 기운이 느껴지는 맥주를 한잔 더 시켜 마셨다. 피곤해서 그런지 이미 '노동자의 한잔'에서 취기가 많이 올라와 '지하 저장고의 문'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해리와 함께 호스텔로 돌아왔다. 우리 방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어느 정도 북적해져 있었다.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씻으러 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창밖으로 건너편 건물이 보였다. 가로등 빛을 받아 붉은빛을 은은하게 띠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밤은 묘한 만남, 피곤, 외로움이 취기와 함께 뒤섞여 나를 무의식으로 빠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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