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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Sep 23. 2019

10. 케임브리지

26APR19

케임브리지


 창밖은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은 이미 꺼진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서 기지개를 켜고 방안을 돌아보니 대부분이 아직도 자고 있었다. 어제 분명 비어있던 침대에도 누군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어제 늦게 그것도 기름지게 저녁을 먹었지만 일어나니 또 배가 고팠다. 숙박에 포함된 조식을 먹으러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곧 마감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식당 입구로 들어가니 조리대에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시리얼, 빵, 잼, 과일, 우유, 커피 정도의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시지나 계란 같은 단백질 메뉴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막 구운 빵에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발라서 베어 물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어제저녁식사를 함께 한 브라질에서 온 해리(해리포터의 해리와 닮아서 붙여준 호칭)가 식기를 치우고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호그와트에서도 이런 식사를 할지 궁금하였다. 빵을 한 조각을 더 구워서 크림치즈를 발라먹고 시리얼 한 그릇과 커피 두 잔을 해치우고 작은 사과 하나를 껍질채 먹었다. 점심 약속만 없었다면 더 앉아서 새로운 음식을 개발했겠지만 참고 나갈 준비를 하러 방으로 올라갔다.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 친구는 MIT의 한 건물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에서 그곳까지 걸어가도 괜찮을 만한 거리인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와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니 온통 짙은 초록빛을 머금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보스턴 코먼'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원이었다. 비에 젖어 축축한 잔디와 나무들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이 좋지 않았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공원은 아니었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공원을 빠져나와 마주한 교차로에서 다시 북쪽 길거리에 접어들었다. 거리 양옆으로는 각종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름 이곳에서 꽤 번화한 거리인 것 같았다. 한번 들어가고 싶은 상점들도 있었지만 약속한 시간에 가까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거리의 끝에 다다르니 다리가 나타났다. '롱펠로'라는 불리는 다리로 그 아래로는 '찰스'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보스턴에서 케임브리지로 넘어가게 된다. 다리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 멀리 보이는 강 한가운데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작은 유람선이겠거니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형태가 버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사이드미러와 여닫이 창문이 달린 것이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유람선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수륙양용버스였다. 실제로 그것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뭔가 계속해서 빠질 듯 빠질 듯하면서도 나아가는 모습이 긴장감을 자아냈다. 결국 버스는 강 건너편에 목적지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나는 다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빠져나와 수백 미터 걸어가니 알려준 주소의 건물이 나타났다. 캠퍼스 건물이라기보다 기업의 연구소같이 생긴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밖과 달리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방금 수업이 막 끝나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만나기로 한 친구는 MIT에서 MBA 과정을 밝고 있다고 하였다. 건물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7년 전과 하나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나를 보며 더 어려진 것 같다는 그의 인사가 빈말 같지는 않은 것 같아 우쭐해졌다. 브라이언은 내가 학부시절에 외국인 교환학생의 한국생활 적응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 시절에 비해 그의 한국어가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식당을 예약해 놓았는데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나에게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커피는 마시고 있을 때도 마시고 싶다?!) 카페에 가보고 싶다고 하자 근처에 괜찮은 베이커리 카페가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를 따라 MBA 건물을 나와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연구결과와 실적 같은 것을 정리해놓은 포스터가 벽을 따라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듯 어디선가 나와서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대부분 방금 막 수업을 듣고 나온 건지 자다가 나온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확실히 인종과 문화가 다르지만 공대 건물과 공대생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분명 공대생이었던 내가 익숙한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갔다. 'Flour'라는 순백의 이름을 가진 카페가 보였다.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테이블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주문하는 줄은 빵과 디저트 및 관련 상품을 올려둔 테이블을 중심으로 구불구불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진열장과 메뉴판에 적힌 것들을 보았을 때 카페보다는 베이커리 메뉴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브런치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샐러드와 수프 그리고 샌드위치 등을 판매하여 거의 브런치 레스토랑이라고 보는 게 더 맞았다.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이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브라이언은 이곳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라테와 (파운드 케이크에 가까워 보이는) 바나나빵과 갈색설탕, 시나몬, 피칸이 섞인 토핑이 올라간 사워크림 커피 케이크를 주문하였다. 점심을 먹기 전이라 괜찮을까 싶었는데 한 조각씩 먹어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꾸덕꾸덕한 바나나빵 사이에 박힌 견과류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완전히 나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샤워 커피 케이크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갈색설탕의 깊고 진한 단맛이 느껴졌다. 마치 '이게 미국의 빵맛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가 없어 거의 서있는 채로 허겁지겁 빵과 케이크를 커피와 함께 해치웠다. 정신없는 카페를 뒤로하고 우리는 하버드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매사추세츠 애비뉴를 따라서 걸었다. 양옆으로는 다양한 식당과 상점들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이곳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케임브리지는 뉴욕의 맨해튼과는 달리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동네임이 분명해 보였다. 브라이언은 가을부터 하버드에서도 석사학위를 시작한다고 하였다. 내가 예전에 기억하던 것보다 공부를 참 좋아하는 친구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몰랐었는데 그는 완전한 보스턴 토박이였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대학교 학부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하지만 보스턴을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 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게 신기하였다. 그런데 이전까지 보스턴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내가 레드삭스 팬인 게 더 특이한 것 같기도 하였다. 브라이언은 식당에 가기 전에 잠깐 하버드 캠퍼스를 구경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이제 조금씩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캠퍼스 안은 학생들 이외에도 (당연하게도) 관광객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바로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이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사진을 찍어줄 테니 동상의 발끝에 손을 올리라고 하였다. 동상 왼쪽 신발 끝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는데 한눈에도 그곳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사진을 찍고 나자 그는 발끝에 손을 대면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학교는 다닐 만큼 다녔기에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 하버드라면 한 번은 제고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 내리는 캠퍼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아까 먹은 빵들이 배안의 블랙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버린 것같이 다 소화되었다. 브라이언의 짧지만 굵은 하버드 투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였다.


 마치 우체국같이 생긴 건물로 브라이언이 들어갔다. 'Alden & Harlow'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편에는 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블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으로 짐작해 보건대 학생보다는 이곳에 거주하는 중장년층 주민들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음식 맛이 괜찮은 곳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담당 서버가 1층에 안내해준 자리가 약간 불편하여 여유 있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뉴판을 살펴보는데 이름만으로는 도대체 어떤 음식이 나올지 가늠이 안 가는 것들이 반이상 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일반적인 대중 레스토랑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메뉴 선정은 나의 영역 밖의 문제인 것 같아 브라이언에게 맡겼다. 하지만 마실 것은 직접 내가 고르고 싶었다. 이쪽도 반은 감이 오지만 나머지 반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신기한 것을 시켜보자는 마음으로 'Duchesse De Bourgogne'라는 이름의 맥주를 시켰다. 곧이어 나온 맥주병에는 중세시대 여인의 초상화 같은 그림이 붙어 있었다. 맛과 향은 맥주라기보다는 와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브라이언은 'Cone Head'라는 다소 순박한 이름의 IPA를 주문하였는데 색깔이 정말 옥수수 같았다. 맥주 시음을 마치고 나니 음식이 나왔다. 서버는 사우전드 소스가 한쪽에 깔린 와플 모양의 포테이토 프라이와 서양식 군만두 같은 느낌의 튀김을 테이블에 놓고 갔다. '튀긴 음식치고 맛없는 것은 없다'는 격언처럼 두음식 모두 맛이 좋았다. 식사를 하면서 브라이언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갑자기 식욕이 떨어진듯한 표정을 짓더니 최근 몇 년 간 계속해서 솔로라고 답하였다. 괜찮은 사람들은 모두 남자 친구가 있거나 자신한테 관심이 없다는 그의 말이 남일 같지 않았다. 그렇다. 세상에 매력적인 여자는 정말 많다. 하지만 나와 데이트를 하고 좀 더 깊은 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펜웨이파크에서 양키즈 팬을 찾을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나도 1년 넘게 아무도 사귀지 못한 상황이라 더 이상 연애사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음식을 먹을 때만 입을 열었다.)



 고요하고 즐거웠던(?!) 점심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바로 앞 쉼터 벤치에 앉았다. 날은 여전히 흐렸는데 케임브리지의 하늘은 일 년 중 대부분이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 벤치에는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학생 세명이 열띤 토론 중이었다. 점심에 마신 맥주로 인해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는 흐린 늦은 오후만큼 벤치에 앉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졸음과 함께 찾아오는 나른함을 만끽하기 좋은 순간이 언제 또 있을까?


 슬슬 다음 약속을 위해 이동을 해야 했다. 바로 코앞이긴 했지만 브라이언이 시간이 남는다며 함께 가주겠다고 하였다. 반나절 가까이 케임브리지 근방을 돌아다니니 이곳의 캠퍼스는 확실히 한국의 대학 캠퍼스와는 달리 하나의 마을 같았다. 저녁 약속을 한 친구가 알려준 하버드 건축대학원 건물에 도착하였다. 안으로 들어가 바로 보이는 공용 테이블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브라이언은 이곳에서 공부하는 내 친구가 부럽다고 하였다. 그가 곧 하버드에서 공부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말을 하니 신기하였다. 건축공부를 해서 부럽다는 것 같기도 하였다. 막상 해보면 환상이 다 깨지겠지만 언제나 남의 떡이 크고 예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십여분이 지나자 내 친구와 그녀의 남편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그대로인 커플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따뜻해지면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초면인 사람들을 서로 인사시키고 브라인언이 떠났다. 그리고 친구와 그녀의 남편을 따라가는데 마치 내가 방과 후 부모님에게 돌아온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 이제 가족이 다 모였으니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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