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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Sep 01. 2019

8. 덤보 / 오페라의 유령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4APR19

덤보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으로 향했다. 사실 이틀 전 나를 뉴욕으로 이끈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 그 포스터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덤보에 갔었다. 근처 유명 카페인 'Brooklyn Roasting Company'에서 드립 커피를 한잔 마셨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아서 그 뷰가 보일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한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 장소를 찾지 못하였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나는 쫄딱 젖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그 포스터에 보이는 다리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 다리는 브루클린 브리지가 아니라 맨해튼 브리지였다. 브루클린에서 보이는 다리라 브루클린 브리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포스터 속 다리인 맨해튼 브리지는 강철이 그대로 보이는 다리였고 브루클린 브리지는 강철로 되어있지만 외장이 석조로 되어 두 다리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나는 비를 맞으며 맨해튼 브리지가 아닌 브루클린 브리지 주변에서 방황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내가 그렇게 비를 맞고 돌아다닐 때 나와 같이 방을 쓰는 다른 남자들도 그곳에서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상남자들은 무계획적이고 거친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여행을 한다. 농담이다.



 지하철 밖으로 나오니 밝은 날씨가 나의 재방문을 반겨주었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햇살 속으로 들어갔다. 먼저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전에 갔던 그 카페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전보다 카페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콜드 브루를 한잔 주문하고는 오래된 가죽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마치 큰 솜사탕 속에 빠진 것처럼 소파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카페가 있다면 매일 출근할 것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가려던 그곳은 카페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날 목적지가 지척인데 비를 맞으며 허우적댄 것이다. 골목에 접한 몇몇 건물 1층에는 미술작품을 전시 중인 갤러리들이 있었다. 무심코 지나가다 보면 그곳이 갤러리인지 그냥 창고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알아서 잘 찾아오는지 안에서 작품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멀리 교차로에 아이스크림 트럭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관광지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드디어 눈앞에 고대하던 장면이 펼쳐졌다.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대단한 감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파란 하늘 바탕에 양옆으로 붉은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그 사이로 맨해튼 브리지가 보이며 다리 주탑 하부 속 숨어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까지 이 구도는 브루클린, 맨해튼 그리고 뉴욕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사진 한 장으로 도시를 담을 수 있는 곳인 만큼 많은 사람들은 뷰가 재일 좋은 도로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기한 건 중간중간 차들이 그 도로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비켜섰다가 다시 도로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모습이었다. 사람과 차가 한데 어울려 공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진을 몇 장 남기긴 했지만 아무리 찍어도 눈으로 보는 느낌을 담아낼 수 없었다. 결국 가만히 서서 충분히 마음속에 담을 만큼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향해갔다. 다리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너가면서 보이는 이스트강과 맨해튼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다리의 전체 폭에 비해 사람이 다니는 길의 너비가 좁았다. 거의 양방향 2차선 도로처럼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닥은 나무 널판이 깔려있어 빈틈 사이로 아래에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모습이 보였다. 미국인들의 옛것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습성이 아찔한 스릴을 선사해주었다. 다리의 구조는 주탑 상단에서 뻗어 나온 4개의 굵은 케이블에 등간격으로 얇은 케이블이 수직 연결되어 다리의 상판을 잡아주는 현수교 형식과 주탑과 상판이 케이블로 직접 연결되는 사장교 형식이 혼합된 방식이었다. 오른편으로 맨해튼 교가 보였고 왼편으로 한때 군사기지로 사용되다가 관광지가 된 거버넌스 섬과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조그마하게 보였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빛을 받은 강물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고 그 사이를 화물선과 페리들이 하얀 물자국을 남기며 어딘가를 향해 바삐 나아갔다. 그 속에서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에 와서 돌아다니다 보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신기하게 그럴 때마다 '그래도 여기에 와서 이런 경치를 구경하게 되니 정말 잘 왔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다. 덤보와 다리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바로 그런 힐링 파트였다. 어디선가 다급한 종소리가 감상에 젖은 나를 깨웠다. 고개를 돌려 보니 뒤편에서 자전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부딪히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순식간에 다시 현실 여행으로 돌아왔다.




오페라의 유령


 4년 전 겨울 나는 유럽 여행 중이었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는 런던이었고 가장 놀라운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관람한 것이었다. 일행들에게 등 떠밀려 보러 갔지만 공연이 끝나고 가장 감동받은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비록 저렴한 뒷자리 좌석이긴 했지만 뮤지컬은 전용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로 언젠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면 좋겠다고 꿈꿨던 것 같다. 브로드웨이 뮤티컬 공연들에는 추첨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티켓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있다. 일명 로터리(Lottery)라고 불리는데 비싼 티켓 가격이 부담이 되는 저소득층의 문화생활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뉴욕에 도착하고 이런 훌륭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접하고 매일 보고 싶은 뮤지컬들 웹사이트에서 로터리를 신청했지만 단 한 번도 당첨되지 않았다. 괜히 로터리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결국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 공연 티켓을 구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략 찾아봤는데도 열댓 개 이상의 대형 뮤지컬들이 공연 중이었다. 나같이 뮤지컬을 잘 모르는 문외한도 몇 번 들어본 작품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이거다!'라는 생각이 든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제목이 가장 낯익기도 했지만 십여 년 전 영화로 개봉한 버전을 보았을 때 오프닝 씬이 인상 깊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장면을 뮤지컬 공연에서는 어떻게 표현할지 자못 궁금하였다. 뮤지컬 극장의 대부분이 타임스퀘어 인근에 밀집되어 있었다. 다시 찾은 그곳은 여전히 전광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차도 옆에 자유의 여신상의 코스튬과 키다리 장비를 찬 거리의 예술가가 성조기를 접고 있었는데 생각만큼 장사가 잘 안되어 하루를 마감하는 것 같았는데 시무룩한 그의 표정이 안타까워 보였다. 공연은 시작시간 30분 전부터 입장이 가능하여 그 시간에 맞춰 극장 앞으로 갔다. <오페라의 유령>이 상시 공연되는 극장인 Majestic Theatre앞 인도는 이미 긴 줄로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겨우 공연을 예매한 중계업체 직원을 찾아 티켓을 받고 계속해서 길어지는 줄의 맨 끝으로 갔다. 함께 서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나와 같이 처음 공연을 보는 사람들인 것 같이 표정들이 상기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격식 있게 슈트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들도 보였는데 미국에서는 공연을 보러 갈 때 그렇게 갖춰 입기도 한다고 하였다. 공연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극장 안 지하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맨 위층에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 무대에서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에서 뮤지컬 공연을 본적이 딱 한번 있었다.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를 관람하였는데 그 당시와 비교하면 무대와 가깝고 가격도 더 저렴하였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곳이 <오페라의 유령> 전용극장이라는 것이었다. 무대에는 장막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고 한가운데 천에 덮인 뭔가 보였는데 Chandelier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했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사람들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무대 위에 배우와 장비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오페라 전용 극장에서 경매가 진행되는 신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 초라하게 빛이 바래버린 소품들이 몇 개 등장하고 낙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경매 중개인이 샹들리에를 소개하였다. 그는 이 물건에 얽힌 미스터리 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관객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번쩍이는 섬광이 터져 나오며 샹들리에가 공중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 유명한 오르간 테마곡이 공연장의 모든 사람들을 전율케 만들었다. 그 뒤로 중간의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나는 한순간도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주인공인 크리스틴 다이에와 팬텀의 노래뿐만 아니라 지루할 틈이 없는 이야기의 전개 그리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무대장치는 한데 어우러져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하였다. 단역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팬텀 역 남자 배우까지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소리가 더 커져갔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손을 잡고 무대 뒤편으로 빠졌다가 앞으로 뛰어나오며 허리 숙여 인사하였다. 그리고는 붉은 융단 같은 막이 무대와 배우 위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지만 무대인사 때부터 흘러나오던 테마곡은 계속해서 연주되었다. 아래층에 사람들이 무대 쪽에 빙 둘러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연주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자 이제는 정말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극장 앞에는 아직도 공연의 여운에 젖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쉽사리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위에서 서성였다. 공연 관람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이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한번 더 그리고 무대 가까운 곳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봐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타임스퀘어 쪽으로 걷다가 뒤를 돌아 극장 쪽을 바라보았다. 입구 위에 있는 팬텀의 하얀 가면이 그려진 광고 등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밝게 켜져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내일이면 보스턴으로 떠난다. 그전에 뉴욕의 야경을 눈에 담고 싶어 시간이 늦었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했다. 밤 11시가 넘었지만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다. 전망대는 새벽 2시까지 운영되었다. 안내를 따라 구불구불 이곳저곳을 지나고 공항처럼 소지품 검사를 한 뒤에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 조명이 어두워지며 안내방송과 함께 엘리베이터 천정에서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공 당시 빌딩의 공사 모습을 재현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이었는데 마치 실제로 올라가면서 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재밌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영상을 집중해서 보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고 마지막으로 지붕이 덮이는 장면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도착한 곳은 전망대가 아니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역사를 전시한 층이었다. 전망대를 가기 위해서는 한번 더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으로 향해갔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야경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피곤하지만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전망대가 있는 층에 올라왔다. 내부는 움직이는데 필요한 정도의 조명만 켜져 있었다. 만약 내부가 밝으면 그 빛이 야경을 보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밖으로 나와보니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날씨였다. 난간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찾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점들이 고요한 바람에 따라 흔들거렸다. 그 빛들의 물결은 지평선 끝까지 계속되었다. 그 모습이 화려하기보다는 고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인들이 넘어오기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수많은 불빛 아래 있는 사람들 중에 대대로 이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불을 켜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도 이곳에서 숨겨둔 꿈을 펼쳐 볼 수 있을까? 흔들리는 불빛에 정신이 팔려 이상한 바람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잠들지 않는 뉴욕의 밤을 뒤로한 채 게스트하우스의 침대를 향해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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