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APR19
Circa Brewing Co.
전날의 알딸딸한 흐름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오늘도 브루어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유명하고 전통 있는 대형 브루어리가 아니라 정말 동네 양조장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다녀온 Brookyn Brewery가 위치한 윌리엄스버그는 맨해튼의 동쪽에 인접한 브루클린이고 오늘 가려는 Circa Brewing Co. 는 맨해튼의 남쪽에 가까운 브루클린에 위치하고 있다. 숙소를 나와서 허드슨 강 너머 WTC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맥주 마시기 딱 좋았다. 사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맥주는 항상 맛있다. 아무래도 나는 알코올 의존증이 확실한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동네는 윌리엄스버그와는 또 다른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70, 80년대 뉴욕 배경의 영화에 나올법한 분위기를 풍긴다고나 할까? 만약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네가 오래되지 않았냐고 묻는 다면 "불편한 것이 없는데 굳이 새롭게 바꿔야 할 필요가 있나요?"라는 반문을 들을 것만 같았다. 보슬비가 내리긴 했지만 심하지 않아 우산을 펴지는 않았다. 분명 역 근처에 브루어리가 있었는데 주위에서 헤매다 겨우 찾았다. 나름 길을 잘 찾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바로 근처에 있는 곳도 잘 찾지 못하는 것 같아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브루어리 입구는 간판도 작게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정문이 인도에서 상당히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왔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이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 모르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변명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높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이라 층고가 높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내부 공간이 엄청 넓고 깊다는 것이었다. 왼쪽 벽 상단에는 맥주 이름과 알코올 도수가 오와 열을 맞춰서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네모의 색깔이 저마다 달랐다. 뭔진 모르겠지만 인테리어 요소라고 생각되었다. 바 건너편에는 새것같이 반짝거리는 은빛을 자랑하는 탱크가 줄지어서 이곳에서 맥주를 직접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바에 앉는 게 어색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혼자서 다인석의 테이블에 앉는 것보다는 훨씬 부담도 덜하고 그곳에 녹아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메뉴판을 보고 뭘 주문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키가 크고 마른 흑인 남자 서버가 시음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속으로 '이게 웬 횡재인가?' 생각하고는 몇 종류를 맛을 보았다. 역시 IPA 말고는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은 없었다. 'ROTATOR IPA'라는 다소 어지러운(?!) 이름을 가진 맥주를 첫 잔으로 선택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먹을 것도 하나 골랐다. 메뉴에서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버거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버거를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끈 것이 'Chicken Salad Sandwich'였다. 역시 샌드위치 마니아다운 본능이었다. 망설임 없이 주문을 마치고 탭에서 갓 뽑혀 나온 IPA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공복에 맥주는 언제나 옳다!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한국에서 여행 짐을 꾸릴 때 가져온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책을 한 권 가져가는데 이번엔 도통 뭘 가져가야 할지 쉽게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여행 일주일 전 부모님께 안부인사를 드리러 고향집에 내려갔다. 보통 내가 집에 내려가면 자는 방 한쪽 벽에는 책장이 있다. 온 식구의 책이 섞여 있어서 예전에 봤던 나의 책들도 있지만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책들도 많았다. 익숙한 컬렉션을 한번 훑어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앵무새 죽이기'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만한 제목 일 것이다. 내가 그 제목을 처음 접한 건 어렸을 적 자주 보던 EBS 영화 프로그램인 시네마 천국에서였다. 그 시절에는 책보다는 영화를 좋아해서 원작이 소설인 영화를 먼저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로마의 휴일의 기자역을 맡은 그 유명한 그레고리 펙이 주연으로 나온다. 사실 그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대략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작가가 쓴 자국 배경의 책을 가져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터라 망설임 없이 그 책을 집었다. 비행기 안에서 두 챕터 정도 읽은 뒤로는 정신이 없어 읽지 못하였다가 오늘 다시 책을 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스카웃'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반가웠다. 막 다시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 샌드위치가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맥이 끊어진 건 결코 나의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게 내가 의도한 것 일수도 있지만.
반으로 잘린 포카치아 빵 사이로 잘(!) 버무려진 치킨 샐러드가 들어있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비주얼의 샌드위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한입 베어 물었는데 정말 놀라웠다. 선호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이건 분명 본능적으로 맛있었다. 샐러드 안에는 치킨뿐만 아니라 포도와 또 다른 과일 들어있었는데 살아있는 과육이 치킨과 함께 씹히는 식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맥주를 마시러 왔다 샌드위치에 감동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자 서버가 접시를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정말 맛있는 샌드위치라고 찬사를 보냈다. 두 번째 잔으로는 'BEGIAN DUBBEL'이라는 에일 맥주를 시켰다. 짙은 갈색빛이 어제 마신 브라운 에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음이 스쳐갔다. 바로 메뉴의 맥주 이름 앞에 있는 네모의 색이 맥주의 빛깔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동행이 있었다면 호들갑을 떨며 내가 알아낸 사실을 말했겠지만 그냥 조용히 맥주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나 자신을 대견스러워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던 백인 중년 남자는 이미 자리를 비웠고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왼편 바 끝에 앉아 있던 형광조끼를 입은 남자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긴 것도 그렇지만 맥주를 마신다는 게 신기하였다. 생각해보니 회사 다니던 시절 가끔 점심에 반주하던 것이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신기한(!) 사람 중 하나였다. 다시 책을 폈다. 스카웃은 여전히 쉬지 않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다 모디 아줌마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다가 그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줌마의 말투는 메이콤 군의 주민 치고는 화끈했습니다. 아줌마는 우리를 부를 때 성과 이름 모두 부르셨고, 웃을 때는 위쪽 송곳니에 박힌 작음 금 조각이 보였습니다. 내가 감탄하며 나도 그런 이를 갖고 싶다고 하자 아줌마는 <자, 여기를 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우리의 우정을 굳게 다지는 애정의 몸짓으로 혀를 한 번 차더니 의치를 꺼내셨습니다.
아무래도 스카웃은 능청스러운 아이가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스카웃의 탈을 쓴 작가 본인이 그런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