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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Aug 21. 2019

7. 구겐하임 미술관

23APR19

구겐하임 미술관


 학부 신입생 시절 건축설계를 전공하는 동기들의 스튜디오에 자주 놀러 갔었다. 친구들은 밤이고 낮이고 스케치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캐드 도면을 그리거나 이상하게(?!) 생긴 모델을 만들거나 엄청 두꺼운 건물 사진이 가득한 책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자신만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눈에서 반짝거렸다. 그에 비해 아직 전공이 정해지지 않아 공학기초 과목만 듣고 있는데도 항상 흐리멍덩한 눈빛을 갖고 있던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동년배에게 느끼기 어려운 존경심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존경하는 친구들을 보러 스튜디오에 갔다 한 책상에 펼쳐진 책에 눈길이 갔다. 띠를 두른 화분같이 생긴 건물의 사진이 두 페이지에 걸쳐 인쇄되어 있었다. 때마침 그 자리로 돌아온 친구에게 무슨 건물인지 물으니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거장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당시 새롭게 제시한 전시공간 구성이 적용된 미술관이라고 시작된 그의 설명은 막힘없이 현대 미술관 건축사까지 진도가 나아갔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내가 본 사진의 미술관의 형태와 그 이름은 인상 깊게 남았다. 한데 뉴욕에 와서 바로 그 미술관이 맨해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친구의 친절한 설명이 고마워서 직접 가서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미술관은 센트럴 파크 맞은편 88번가와 89번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보면 왼편이었다. 미술관 옆 공원이라... 뭔가 로맨틱 영화의 소재로 괜찮을 것 같은 조합이라고 느껴졌다. 미술관 정문에 도착하니 입구 양쪽으로 사람들이 서있는 두 개의 줄이 보였다. 오른편 줄이 더 길었는데 자세히 보니 티켓이 없는 사람들이 서있었고 왼편 줄의 사람들은 이미 티켓이나 초대권을 가지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둔 티켓이 있었기에 왼쪽 줄에 섰다. 앞의 관광객들이 표 검사를 받으며 자신들의 가방 열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곧이어 내 입장 차례가 되었고 직원이 요구하기 전에 가방을 열어 안을 보여주었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회전문을 통과해 미술관 내부로 들어갔다. 안내데스크에서 초대권을 티켓으로 바꾸고 검표를 마치니 직원이 가방을 코트룸에 맡기고라고 안내해 주었다. 가방을 덜어내니 확실히 몸이 가벼워졌다.


 중앙홀은 1층 바닥부터 천장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어 그 가운데 서 있으니 내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창은 방사형 격자 프레임과 불투명한 재질의 투광판으로 만들어져 바깥의 자연광이 은은하게 내부를 비추었다. 나선형 난간은 맨 위층에서부터 쉴 새 없이 돌고 돌아 1층 바닥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바로 이 난간과 연결되어 이어지는 회랑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공간이다. 미술관 설계를 의뢰한 솔로몬 구겐하임은 당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부탁했다. 건축주의 도발적인 요구에 라이트는 그동안 어떤 건축가도 시도하지 못한 경사진 나선형 전시공간을 구현해 낸다. 초반에 세탁기(?!)를 닮았다는 악평뿐만 아니라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보다 미술관 자체가 관람객을 사로잡는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맛있기로 소문난 레스토랑에 온 손님이 그릇에 반한다면 셰프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앙의 나선형 회랑에서 메인 전시가 열렸는데 'Hilma af Klint'라는 스웨덴 여류화가의 작품들이 벽면을 따라 걸려 있었다. 처음 듣는 작가였던 것도 있었지만 확실히 건물에 관심을 갖고 와서 인지 예전에 이곳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작가들의 우려처럼 그녀의 작품보다는 전시공간에 더 눈길이 갔다. 회랑의 바닥과 난간은 완공된 지 6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올해 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지속적인 관리의 힘이 한몫한 것이 분명할 것 같았다.) 미술관에는 중앙 회랑 이외에도 다른 전시공간들이 존재하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 부속건물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첫 번째 층은 있는지도 모르게 그냥 지나쳤다. 한데 두 번째 층에서는 전시공간 입구에 붙은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멈춰 서고 말았다. 담배를 물고 있는 잔뜩 멋을 부린 듯 웨이브가 들어간 장발을 가진 남자가 무심하지만 또렷하게 나를 바로 보고 있어다. 그의 눈빛을 지나칠 수 없었다.



 'Implicit Tensions'라는 제목의 사진전시회였다. 작가는 '로버트 메이플소프'라는 백인 남자로 내가 그냥 지나치지 못한 그 눈빛의 주인공이었다. 다양한 피사체를 찍은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흑인 남성 누드 작품이었다. 모델의 아름다운 몸과 자세의 명암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숨겨진 주제가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작가는 일반적인 누드 이외에 상당히 논란이 될만한 성적 암시를 담은 사진들도 많이 찍었는데 그의 삶의 여정이 에이즈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예술과 외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사진들 속에서 있으니 무엇이 예술이고 외설인지 모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전시장을 빠져나올 때쯤 나를 이곳으로 이끈 실제 그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다.


 어느새 꼭대기 층에 다다랐다. 몇몇 사람들이 중앙홀 아래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이 건물을 보고 싶어 온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찾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환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이 미술관도 초기에는 기존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조롱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의 스타일을 개척한 미술관으로서 계속해서 추앙받고 있다. 새로운 시도들에는 언제나 결단과 믿음 그리고 고집이 필요하다. 남들이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선례도 없으므로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고독한 길을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아마 메이플소프도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갑자기 예전에 이 건물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해준 친구가 생각났다. 얼굴도 이름도 이제는 흐릿해져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건축설계를 하고 있을까? 만약 계속해서 그 길을 걷고 있다면 그 시절 그들의 눈빛을 계속해서 간직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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