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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Aug 08. 2019

5-2. Brooklyn Brewery

21APR19

Brooklyn Brewery


 내가 처음으로 맥주를 맛보게 된 건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한 여름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방 식탁에 앉으셔서 마른안주와 병맥주를 드셨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이미 한 병을 비우신 아버지가 두 번째 병을 따시다 나를 보셨다. 마치 갑자기 내가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신 듯한 눈빛이었다. 본인의 잔을 다 채우신 다음 선반에서 유리잔을 꺼내 내 앞에 두시고는 맥주를 따르기 시작하셨다. 잔의 밑바닥에서 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황금빛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한쪽 눈꼬리가 올리시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한 모금 마셔보라고 권하셨다. 물론 어머니가 외출 중이시기에 그러실 수 있었다. 나는 두려움 반 호기심반으로 두 손으로 잔을 쥐고는 입술에 갖다 대었다.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린 채 잔을 내려놓았다. 톡 쏘는 오줌이 있다면 분명 이런 맛일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내 모습을 보시면서 웃음을 참으시다 다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셨다. 그 이후로 맥주를 다시 마시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두 모금 정도 마셨는데 여전히 어른들은 왜 이런 걸 좋다고 마시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도 넘게 흐른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 둘 중 하나가 맥주다. 공복(!!!)에 마시면 더욱 맛있다는 것까지 알아버렸다.


 맥주를 즐기는 게 일상이다 보니 큰 주류회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맥주를 양조하는 소규모 브루어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브루어리가 이태원에 몇 군데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 곳곳에 새로운 브루어리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았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수제 맥주 문화와 시장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소규모 브루어리의 가장 큰 매력은 그곳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그들이 제공하려는 최상의 맛과 분위기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브루어리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곳이다. 몇몇 브루어리들은 더 이상 소규모라고 부르기엔 그 몸집이 무척 커져 대량생산시설과 많은 판매지점들을 거느리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국내에도 직영매장을 운영하는 곳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현지에서 맥주를 공수하고 내부도 비슷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본점이 주는 아우라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뉴욕에 있는 브루어리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브루클린에 본점이 있는 Brooklyn Brewery이다. 아주 정직한(!) 이름을 가진 이곳을 자칭 맥주 마니아가 놓칠 수가 있으리?


 사실 며칠 전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왔었다. 나의 여행 스타일대로 갑작스럽게 찾아갔는데 아뿔싸(!) 영업시간이 아니었다. 아쉬움에 브루어리의 굳게 닫힌 문 앞을 서성이다가 근처 카페(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인턴'에 등장한 카페였다!)에서 콜드 브루를 한잔 마시고 돌아왔다. 심기일전하고 영업시간을 파악한 뒤 2차 시도를 하였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브루어리까지 가는 길이 낯익게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오래된 벽돌 장식의 입면을 가진 건물들이 가득한 동네인데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상점, 음식점, 카페들이 상당히 세련되게 녹아들어 간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맨해튼과는 달리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가 흘렀다. 길 중간에 다채로운 색깔의 벽화가 보였다. 윌리엄스버그의 소울과 에너지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그림인 것 같았다.



 드디어 활짝 문이 열린 브루어리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가는데 가드가 "Tour?"라고 물으며 핑크색 티켓을 한 장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았는데 티켓에는 '4:00 PM'이라는 검은색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말 오후 시간에 30분 간격으로 무료투어를 진행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입구 오른편 너머 문을 통해 맥주를 생산하는 시설 같은 것이 슬쩍 보였다. 아마 그쪽에서 투어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왼편으로 기념품샵이 있었고 그 옆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기념품샵을 지나 그쪽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이 가득한 넓은 공간과 한편에 맥주 탭들이 가득한 바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곳이야 말로 나의 마른 목을 촉촉이 적셔줄 곳이로구나!'


 바 앞에는 맥주를 주문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테이블과 스탠드에서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다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며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얼른 주문 줄에 합류했다. 바 벽면에는 지금 바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맥주가 적혀 있었다. 한눈에 봐도 10가지 이상 되어 보였다. 종류가 많아서인지 기다리는 내내 쉽게 무얼 마실지 정하지 못하였다. 내가 주문할 차례가 되었고 직원에게 맥주 추천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메뉴 제일 앞에 있는 '라거'를 권하였다. 대표 맥주이기도 하고 가장 많이 팔리며 권위 있는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처음 가는 식당에서 그곳의 대표 메뉴를 주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듯 그녀의 추천에 따라 라거를 한잔 주문하였다. 건네받은 잔에는 맥주가 거품이 거의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일반적인 금색의 라거와는 달리 갈색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잔과 나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마셨던 라거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흡사 IPA의 탈을 쓴 라거라고나 할까? 라거보다 쓰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목 넘김은 없었다. 이것은 IPA인가? 라거인가?'


 단숨에 한잔을 비우고 나니 어느새 투어시간이 다가왔다. 입구 쪽으로 돌아가 보니 나와 같은 타임에 투어를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줄의 맨 앞에서 '윌리를 찾아라'의 윌리와 같은 분위기의(심지어 옷도 윌리의 그것과 색깔만 다른 비슷한) 키가 크고 마른 백인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우리의 투어가이드인 것 같았다. 사람들을 검은색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윌리를 따라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가이드의 키는 190cm에 가까워 보였는데 그보다 배이상 높은 탱크들이 양쪽으로 위용을 뽐내었다. 가이드는 탱크 사이에 있는 계단에 올라서 투어를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가이드는 여기서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동네가 제일 멀다고 자랑하였다. 아무리 봐도 내가 제일 멀리서 온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굳이 뽐내지는 않았다. 가이드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자 이 공간의 탱크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탱크 안에서는 맥아즙에 효모를 첨가하여 알코올 발효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였다. 발효과정을 통해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는데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이산화탄소 방울이 맥아즙을 뚫고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졌다. 모두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숨죽인 것이다. 아무리 집중하여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가이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갸우뚱거리기 시작할 때 그는 시간이 없다며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윌리에게 한방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탱크뿐만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더 큰 공간이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가이드는 어디선가 마이크를 가져와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맥주 제조의 후반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캔이나 병의 형태로 제품을 만드는 곳이라고 하였다. 가이드는 그렇게 맥주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이제부터 진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바로 Brooklyn Brewery가 탄생 신화를 말이다.


 저널리스트인 스티브 힌디는 중동에서 특파원 생활했는데 당시 친하게 지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외교관을 통해 홈브루잉을 접하였다. 나중에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그는 특파원 시절을 떠올리며 집에서 손수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힌디는 자신이 사는 건물의 이웃주민들에게 직접 만든 맥주를 무료로 선물하였는데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다 아래층에 사는 은행원인 톰 포터를 만나게 된다.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포터가 맥주에 관심을 표현하자 힌디는 포터에게 함께 브루어리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갑작스러운 힌디의 프러포즈에 당황한 포터는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한다. 하지만 힌디는 포터에게서 자신과 같은 맥주에 대한 열정을 보았기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힌디가 포터를 찾아가 봉투를 하나 건넨다. 포터가 이게 뭐냐고 묻자 힌디는 봉투 안에 비행기와 맥주 양조 박람회 표가 들어 있으니 휴가를 내고 다녀오라고 한다. 포터가 괜찮다고 거절하자 힌디가 브루어리를 만드는 일과는 상관없다며 그냥 한번 다녀오라고 단호하게 밀어붙인다. 포터는 힌디의 박력과 사비까지 털어 표를 구해준 것에 감동하여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박람회가 끝이 나고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포터는 곧바로 힌디를 찾아가 함께 브루어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힌디는 포터가 박람회에 다녀오면 분명 브루어리를 만들고 싶다는 결심을 할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그렇게 둘은 허름한 이곳에서 자신들의 꿈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를 이룩하였다.


 '윌리' 가이드의 마지막 감사인사와 함께 짧은 투어가 끝났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다시 바로 돌아갔다. 꼭 마셔야 할 맥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힌디가 직접 만들어 이웃과 포터에게 선물했다는 '브라운 에일'을 마시기 위해서다. 홈브루잉을 통해 만들기 쉬운 맥주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주문한 맥주가 나왔는데 흑맥주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입안에 거칠고 쌉싸름한 느낌이 가득 찼다. 포터도 나와 비슷한 맛을 느꼈을까? 힌디는 포터가 자신의 브라운 에일을 마시는 순간 무엇을 보고 그와 함께 브루어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을까? 결국 중요한 사실은 한잔의 맥주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이곳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첫 맥주를 만들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성공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가득하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제대로 된 브루어리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새롭게 무언가 시작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이미 자신의 커리어를 충분히 쌓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힌디와 포터는 모험을 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마 그들은 분명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이상 자신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부모님께서 인생은 억지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각자에게는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란 게 있다는 뜻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맞기도 하지만 아닌 것도 같다. 힌디의 집념이 포터의 마음을 바꾸듯 억지로라도 자신이 믿는 운명에 인생을 걸어 볼 때도 필요하다. 그들이 믿었던 운명이 빚어낸 브라운 에일을 마저 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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