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APR19
첼시마켓
보통 어디론가 여행을 가게 되면 근처 유명 관광지들을 묶어 코스로 다니게 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돌이켜 보자면 그만둔 회사 입사 전에 급히 다녀온 유럽여행 때부터 같다) 나는 코스로 여러 곳을 다니는 것보다 한 장소에서 반나절 이상 보내는 게으른(!) 관광을 즐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패키지여행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결국 내가 여행을 즐기는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뒤로는 여행지의 낯선 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사색에 젖은 적도 있다. 그런데 요 며칠간 나의 즉흥적인 스타일대로 돌아다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적이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였다. 민박집 사람들과 관광정보를 공유하다 맨해튼 첼시 지역의 주요 관광지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코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남들처럼 검증된(!) 관광코스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첫 번째 목적지인 '첼시마켓'과 가장 가까운 Chirstopher Street 역에 도착했다. 지상으로 나오니 나뭇잎들 사이로 밝은 햇살이 눈을 간지럽혔다. 역에서 마켓까지는 직선도로가 뻗어 있어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걷는 길을 따라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브런치와 커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야외테이블이 가득 찼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온 가족,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 미뤄둔 독서를 하기 위한 중년 여성 등 모두들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렴풋이 상상하던 맨해튼의 주말 아침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목적지 부근에 가까워지자 확실히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근방에 휘트니 미술관, 놀이동산 급의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각종 고급 의류 브랜드 상점 등이 들어와 있으니 사람들이 이곳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다. 물론 내가 가려는 첼시마켓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이곳의 이름을 들었을 때 길 위에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원래 오레오 과자를 생산하던 공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실내 공간이라고 하였다. 근처에 도착했는데 입구가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아 마켓 건물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문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곳은 내 스타일이다'
유럽도 그렇고 미국도 예전에 지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것은 지양하는 것 같다. 대신 본래 뼈대 구조시스템을 유지하고 외부 파사드(입면)를 원형에 가깝게 보수하면서 내부 공간을 새로운 목적에 맞게 다시 재창조하는 것을 선호한다. 한데 이곳은 내부마저도 최대한 과자공장 시절의 모습을 남겨두려고 노력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전 공간과 그것을 만들고 사용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한 마음이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마켓에는 정말 다양한 상점들이 가득했다. 입구에서 길게 뻗은 홀 같은 공간의 오른쪽에는 각종 음식점들이 왼쪽에는 기념품이나 각종 생활용품 같은걸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홀 끝에 다다르자 벽돌로 만들어진 칸막이 벽들이 차례대로 아치형으로 뚫려 그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과자공장 시절 사용되던 벽돌벽의 일부를 남겨두어 인테리어와 기능적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좋은 사례였다. 그곳을 지나면 지하 상점들로 내려가는 계단과 잠깐 쉬어갈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자리 잡은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내부 동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직선이라고 보는 게 맞지만 중간에 한번 꺾이거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서 그리 단조롭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또한 구역마다 상점의 종류와 인테리어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마켓 곳곳에 설치된 레트로 스타일 장식이나 표지판들은 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루 할 틈 없이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었다.
마켓의 반대편 끝에 다다랐을 때 일반적인 상점과 달리 쇼윈도가 가려진 상점을 발견하였다. 신기하게도 문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의 가드로 보이는 덩치 큰 흑인 중년 남자가 소지품 검사를 하고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도대체 안에서 무엇을 팔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겨 나도 모르게 줄의 끝에 섰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옷가지들이 빽빽하게 걸린 이동식 옷걸이들이 내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로 의류 재고정리 행사장이었다. 대부분의 옷들이 여성용인 것 같았다.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거의 다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류 섹션은 반의 반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재고정리라 그런지 괜찮아 보이는 옷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철이 지난듯한 때깔이 바랜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얼마 안 되는 옷들을 거의 다 둘러볼 때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 나타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금까지 입어보지 않은 의류 아이템을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패션에 대해 문외한인 나에게 약간의 객기가 필요한 그런 종류의 것(1년에 한 번은 이러한 시도를 한다) 그래서 고민하다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데님 재킷이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맘에 쏙 드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곳에서 우연히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게 되었다. 심지어 딱 한벌 남아 있었다. 태그를 확인해 보았는데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어딘지 모르게 이름에서 프렌치 브랜드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누군가 남자의 쇼핑은 네 단계라고 하였다.
간다 - 본다 - 입는다 - 산다
사실 나도 이 알고리즘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처음 사는 옷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본다'와 '입는다' 과정을 반복하였다. 팔소매가 손등을 반쯤 덮을 정도로 다소 긴 감이 있긴 했지만 한번 접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결국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세 번 고민한 끝에 (나의 타당성이 검증된 소비 합리화 프로세스!) 재킷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였다. 할인돼 저렴한(?) 금액을 보고 기분 좋게 카드를 긁었다. 원래 매장을 나갈 때도 가방검사를 하는데 가드가 내가 든 비닐봉지를 보고 웃으며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손짓하였다. 역시 상점에서는 물건을 사야 대접받는다.
마켓을 한 바퀴 둘러보고 쇼핑도 했으니 즐거운 점심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이곳에서 추천받은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랍스터 요리였다. 국내 포털에서 첼시마켓을 검색하면 방문기의 대부분에서 이 음식을 먹은 후기를 올릴 정도로 인기 있는 음식이다. 점포는 해산물 위주의 음식점들이 모인 카페테리아 스타일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는데 랍스터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반이상 되어 보였다. 그들은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열심히 껍질을 벗겨서 속살을 발라먹었다. 하지만 나는 이 광경을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이긴 했지만 그 순간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다시 점심거리를 찾아 마켓 안을 돌아다녔다.
마켓 곳곳에는 정말로 다양한 음식점들이 가득하였다. 여기는 랍스터 전문점만 있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음식들이 서로 자신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의 선택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독일식 소시지가 든 핫도그였다. 독일식이니 맥주가 빠질 수 없어 한잔 시켰다. 핫도그는 생각보다 맛있지는 않았다. 빵, 소시지, 볶음 양파가 각각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할까나?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가격에 상응하는 푸짐한 양으로 위로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마켓을 구경하기 위해 걷다가 문득 핫도그에게 그 이상의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서 똑같은 음식도 전혀 다른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맛있다고 기억하는 것도 다시 먹었을 때 정녕 내가 먹었던 것이 맞나 할 정도로 별로 일 수도 있다. 남들이 추천해준 것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항상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특히 처음 오는 낯선 곳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다음번에 오면 랍스터를 먹어봐야겠다!
하이라인
마켓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으며 구름은 새하얀 솜털 같았다. 다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하이라인'이라는 공원이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고가철도를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한 곳인데 2.33km 길이로 첼시 지역 서쪽을 위아래로 가로지른다. 하이라인의 남측 시작점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는 무명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펼쳐놓고 뽐내는 중이었다. 관광객들의 주목을 끌만한 셀러브리티나 뉴욕의 관광명소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표현한 것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철제 계단을 타고 공원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밑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까이는 잘 보이지 않던 주변 건물들의 지붕이나 상층부 모습이 멀리는 뉴욕과 뉴저지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 강과 맨해튼 고층 건물들이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용을 과시했다. 공원 산책로 주변으로 곳곳에 나무와 풀들이 심어져 있었고 중간중간 앉거나 누울 수 있는 벤치들이 지친 사람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주었다. 주변을 구경하며 걷는데 갑자기 산책로 위로 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공원이 건물 한 귀퉁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마 예전에 철도가 이렇게 놓인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보니 생뚱맞지만 기차가 철로를 오가던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반질반질한 철로 위로 연기를 뿜는 기차가 속도를 늦추며 건물 중간에 멈춰 선다. 찌든 때에 절은 너덜너덜한 야구모자를 쓰고 자신 덩치보다 두 세 치수 이상 되어 보이는 후줄근한 작업복을 걸친 스미스가 기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화물칸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힌다. 때마침 얼룩으로 가득한 가죽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육중한 철문을 가볍게 열고 나온다. 스미스보다 몸무게가 세내 배 더 나갈 것 같은 사내로 이름은 뉴먼이다. 입 주위와 뺨에는 검은 굵은 수염이 가득한데 중간중간 희끗희끗 빛이 감돌고 있다. 스미스가 기차의 화물칸과 건물 출입구 바닥이 연결되도록 두꺼운 나무판자를 깔고서 화물칸으로 들어간다. 뉴먼은 분주한 스미스를 향해 일을 시작한 지 하루 이틀이 된 것도 아닌데 왜 아직도 이리 굼뜨냐고 소리친다. 방금 도축된 돼지와 소를 실은 수레를 양손으로 잡은 스미스가 혓바닥을 내밀며 판자를 따라 내려온다. 뉴먼은 물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눈썹을 한번 추켜올린 뒤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수레를 앞장 세우고 스미스와 뉴먼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십여분이 지났을까? 빈수레와 함께 두 사람이 문밖으로 나온다. 뉴먼은 주머니에서 궐련 갑을 꺼내 밑동을 툭툭 쳐서 담배 두 개비를 빼낸다. 하나는 자신의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스미스에게 건넨다. 맛있게 담배를 태우던 뉴먼이 얼마 전 옆동네 거래처 사장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근에 트럭에다가 얼음 같은걸 넣어서 맨해튼 곳곳으로 육가공품을 운반하는 녀석들이 나타났다는 얘기다. 그 친구들의 일거리가 많아지고 있는데 저녁에 바에서 그 거래처 사장과 만나서 그쪽 사업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되면 오라고 말한다. 스미스는 금세 다 피운 담배 끝에 달라붙은 불씨를 워커 밑바닥에 비벼 꺼트렸다. 재빨리 기차 위에 올라간 그가 뉴먼에게 윙크를 보낸다. 그 모습을 본 뉴먼이 스미스에게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기차가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점점 자욱해지며 두 남자가 그 속으로 사라진다.
건물을 통과해서 계속 걷다 보니 중간에 산책로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전망대 같은 데크가 나타났다. 그 아래는 바로 차도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데크에 앉으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와 양 옆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치 도로 한가운데 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이라인에 인접한 건물들 중 꽤 인상적인 것들도 많았다. 한쪽 외벽에 마더 테레사와 간디가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이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이크 형식으로 그려진 상가, 지붕 위에 나무로 된 물탱크를 수십 년 넘게 얹고 있는 빛바랜 붉은 벽돌 건물, 마치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입면이 층층이 쌓인 오피스가 산책하는 사람들을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주변 건물 구경을 하며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 끝에 다다랐다. 버려진 철로에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대신 시민들의 손으로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산책과 휴식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용도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는 옛 철도의 흔적은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도 이곳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미래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 이야기는 끊기지 않을 것 같다. 산책길 풀숲 사이로 드러난 녹슨 철로가 반짝거리고 있다.
허드슨 야드
최근 뉴욕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은 '허드슨 야드'일 것이다. 안 좋은 이슈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사람들이 많이 보여 들어서 그렇다. 특히 얼마 전에 개장한 신기한 구조물이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요새 뉴욕 관련 소식과 SNS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또 방문하고 싶어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이라인의 북쪽 끝이 바로 허드슨 야드와 연결되어 있다. 공원의 끝에 다다렀을 때 그 핫한 녀석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반겨주었다. 'Vessel'이라는 이름을(일반 공모를 통해 가장 많이 불려지는 임시 명칭이지만 거의 확실하게 공식 명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진 나선형 계단 구조물로 벌집 모양을 연상시켰다. 고급스러운 구릿빛 살갗을 뽐내고 있는 Vessel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휴대전화가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이 특이한 친구가 확실히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주변에는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고층건물과 쇼핑몰뿐만 아니라 한창 공사 중인 듯 안전펜스가 둘러쳐진 채 뼈대만 드러낸 건물들도 곳곳에 보였다.
사실 이곳 허드슨 야드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간 부동산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철도 차고지 부지를 이용하여 공공녹지공간, 주거건물, 호텔, 오피스빌딩, 쇼핑몰 그리고 문화시설을 새로 올리는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가 올해 3월에 완료되었다. Vessel의 개장은 이 개발의 성패를 가늠해볼 만한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였는데 한 달이 조금 넘은 지금까지는 프로젝트 관계자들을 미소 짓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무료티켓을 받으면 직접 내부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데 한 번에 1000명 정도 이용하도록 통제된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 신박한 계단 자체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을 끌어모은 힘에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마 나중에는 Vessel을 빼놓고 허드슨 야드를 얘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주객전도가 된 느낌이기도 하지만 결국 목적 달성 측면에서는 제 몫을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될 것이다.
쉴 새 없이 걸어서 고생한 다리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근처 벤치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오늘 둘러본 첼시 지역의 관광명소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버려져 슬럼화 된 공간들이 다시 생명력을 얻어 사람들이 붐비는 명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묘하게 머릿속에서 비슷한 시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던 서울의 몇몇 곳들이 오버랩되었다. 사업이 잘 추진되어 실제 완공된 곳도(서울로 7017은 하이라인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있지만 주체들 간의 이해관계 문제와 시행사의 부도로 인해 엎어진 경우도(용산 국제업무지구는 허드슨 야드와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었으나 사업예정지는 아직도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있었다.
역사적으로 동시대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번성하다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쇠락의 길로 빠져들어 폐허가 돼버린 대도시들이 수도 없이 많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정말 건강하게 성장해온 젊은이가 갑자기 아주 치명적인 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에 비해 도시 내 특정 지역의 슬럼화는 대도시라면 생애주기에서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잔병과 같을 것이다. 특히 현대의 대도시 중에 슬럼화 된 일부 지역으로 인해 그 도시가 망했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잔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확실하게 치료하는 것을 선호하는 주치의라면 과한지만 강한 약물과 원인을 제거하는 수술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주변 신체조직이나 다른 부분에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반면 병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에 대해 주로 몸의 자가면역 시스템이 대항하도록 최소한의 의료적 치료법을 추천하는 의사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환자의 몸상태에 따라 의도하는 것과 다르게 슬픈 결말을 맺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치료법을 선택해야 할까?
치료법의 선택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환자의 상태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일 것이다. 환자의 병력, 가족력, 직업, 일상생활습관 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통해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다시 하고 싶은 얘기로 돌아가자면 도시재생은 새롭게 바꾸려고 하는 공간이 이전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부터 시작하여 주변의 지역과의 시공간의 연결성뿐만 아니라 미래의 예측되는 발전 가능성 등 셀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여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무리 유명한 의료진에 의해 비싼 돈을 들여 효과가 탁월한 약을 투여하고 수술을 한다고 할지라도 잔병이 되레 예상치 않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도 하나의 생명체와 다를 게 없다. 당장의 이익을 위한 성급한 자세가 아닌 더 넓게 깊이 멀리 내다보는 시선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