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APR19
Counter Culture Coffee
예상치 않게 행운이 따르는 날이 있다면 계획하는 족족 아무것도 되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속으로 되뇌게 된다. 아침에 숙소 근처의 강가로 산책을 나왔다. 날씨가 맑아서 맨해튼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허드슨강은 평소처럼 잔잔한 듯하면서도 힘차게 흘렀다. 강물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은 건너편의 고층빌딩이 가득한 섬을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보이게 끔 만들었다.
오늘은 뉴욕에 오기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가 볼 생각이었다. 사실은 일반적인 카페라기보다 원두를 로스팅해서 공급하는 로스터리라고 보는 게 맞는 곳인데 맨해튼에 그 회사의 트레이닝 센터와 카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검색해 보는데 금요일인 오늘 트레이닝 센터에서 무료 시음회를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작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바로 한 시간 뒤였다. 이런...... 내가 엑스맨의 뮤턴트중 하나인 퀵실버가 아닌 이상 아무리 빨리 준비해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10시까지 도착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지금 바로 준비하면 많이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 여유롭게 출동준비(?)를 마치고 맨해튼으로 향했다.
목적지 근처 지하철 역에 도착하여 서둘러 밖으로 나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자로 된 간판들이 즐비하고 중국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 앞을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순간 중국에 온 것인가 착각이 (사실 한 번도 중국을 가본 적이 없지만 분명 중국의 실제 거리와 전혀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들 정도였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역시나 이 근처가 바로 차이나타운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짐작한 뉴욕의 차이나타운의 모습에 비해 소박한 느낌이었지만 규모는 상당하였다. 그렇게 예상치 않은 중국 관광(?)을 하다가 시간을 지체하였다. 예상보다 늦어 11시가 넘어 트레이닝 센터에 도착했다. 하얀색으로 된 심플한 폰트의 Counter Culture Coffee라는 글자가 적힌 전면 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데 마침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이벤트가 끝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센터 안은 예상대로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중앙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이미 다 마신 커피잔들이 쌓여있었고 그 주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를 만한 무언가를 전혀 찾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근처에 이 로스터리에서 운영하는 카페라도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어 금방 그 근처로 갈 수 있었다. 길 건너에 카페의 모습이 보이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야외 테이블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였다. 설마... 그러나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카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유리창에 코를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눈에도 꽤 오래전부터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이 고요하였다. 바 테이블 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에스프레소 머신만이 이곳이 전에 카페였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올 때 품었던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아침에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의 섬은 그저 신기루였던 게 아닐까?
피켓
커피로 인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는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시원한 맥주와 기름지고 푸짐한 패티가 가득한 햄버거만이 나를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페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Black Tap Craft Burgers & Beer를 찾았다. 소호 동쪽 끝의 머리에 있는 곳이었는데 매장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다행히 바 테이블 끝에 한자리가 남아 바로 앉을 수 있었다. 정면으로 형형색색의 드래프트 맥주 탭들이 줄지어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니 아까의 아쉬움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바 테이블 담당 서버는 내가 충분하게 느낄 만큼 귀찮은 기색으로 나의 주문을 받았다. 약간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주문 후 바로 나온 파인트 잔에 담긴 IPA 한 모금이 언짢은 기분을 씻어주었다. 곧이어 나온 시그니처 치즈버거도 맛이 좋았다. 아침을 거르고 나와 허기진 것도 있었지만 하프 파운드 이상으로 보이는 두툼한 패티와 셰프가 큼직큼직 무심하게 썰어 넣은 토마토, 오이피클, 양상추는 투박한 아메리칸 햄버거가 무엇인지 느끼게끔 해주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서비스는 별로였던) 마치고 소화를 시킬 겸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에 거의 다다를 무렵 한 건물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무슬림 이웃을 존중합니다.'
그곳은 NYU(뉴욕대학교)의 한 건물이었다. 피켓을 든 사람들은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피켓을 읽고 자신들을 쳐다볼 때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순간 이곳이 뉴욕의 맨해튼이라는 걸 다시 인식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사는 글로벌 빌리지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지나쳐 워싱턴 스퀘어에 도착했다. 커플이 앉아있는 벤치의 구석에 빈자리가 보여 앉았다. 혼자 책 읽는 사람,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 공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 작은 공원에 함께하고 있다. 술기운이 달아난 몸이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해진 것 같았다. 해가 일과를 마치고 점점 내려앉고 있는 중이었다. 방금 전 보았던 피켓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나와는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은 머리로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바로 침상의 머리맡에 놓인 성상의 모양을 떠나 우리는 매일 마주 보며 인사하는 이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