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APR19
입국심사
짙은 군청색 유니폼 차림의 흑인 여자가 관광비자로 처음 미국에 입국한 외국인들은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소리친다. 그녀를 따라가니 양쪽으로 ATM같이 생긴 기계들이 줄지어 서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녀와 비슷한 옷을 입은 다른 여자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기계를 통해 등록절차를 거친 후에 입국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해준다. 여권을 스캔하고 개인정보를 입력한 후 사진을 찍으면 영수증 같이 생긴 종이가 프린트되어 나온다. 역시나 즉석으로 찍은 저화질 증명사진은 어느 누구도 머그샷처럼 찍히는 걸 피할 수 없다. 스무 살 때 병역 신체검사 후에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나중에 그 사진이 프린트된 일반병사용 체크카드를 받았는데 그때보다는 덜 범죄자스러워 보여서 만족하였다. 종이를 들고 입국심사를 받기 위한 대기줄에 섰다. 한데 심사창구가 4개 있었지만 그중에 한 곳에서만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심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지만 출입국관리 직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로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거나 다른 업무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간에 한번 그 심사관이 자리를 비워 대기하던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심사대 건너편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순간들도 있었다. 내 바로 뒤에는 한국인 노부부가 서 있었다. 어느 동네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정말 평범한 어르신들이었다. 다시 심사가 시작되고 있는데 부인으로 보이는 분이 남편에게 약간 걱정스러운 듯 건네는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 영어 못하는데 어떡하노?”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설마 한마디도 못 알아듣지는 않으시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영어를 아예 못하시는데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때마침 ‘다음’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치 파블로프의 종소리를 들은 것처럼 심사대로 향했다. 미국 입국심사에 관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심사관은 살집이 어느 정도 붙은 젊은 백인 남성으로 갈색의 수염이 턱과 뺨을 온통 덮고 있었다. 일반적인 질문을 받았지만 무뚝뚝하게 여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표정을 보니 마치 FBI 심문이라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다린 것 시간과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이 민망하게 심사는 금방 끝났다. 여권을 받고 심사대를 떠나려다 대기줄을 돌아보았다. 그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까 어렴풋이 들었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괘안타! 손짓 발짓해서 하믄 된다. 그라고 둘인디 뭐 걱정이고?”
생각해 보니 관광비자 신청 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사항은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기본적인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체류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자국어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관광객의 입국이 거부되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었다. 이 곳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어에 대한 나의 열등감으로 섣부르게 그들을 바라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수화물 태그
공항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타야 할 열차를 반대방향으로 탔다가 간이역 같은 곳에서 뙤약볕 아래 서있기도 했고 기차표를 구매하는 곳을 찾지 못해 급한 대로 기차를 탔다가 검표원에게 원래보다 배이상의 값을 치르고 표를 샀다. 자리에 앉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뒷 좌석에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백인 중년 남성이었다.
“젊은 친구 어디에서 왔어? 그런데 그 캐리어의 수화물 태그를 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짐에 관심을 표하는 그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고는 태그에 대해서는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걸 계속 달고 있으면 좀도둑 같은 녀석들이 너의 캐리어를 노리기 쉽기 때문이지.”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다. 이런 곳에서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농담 같지만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긴 비행 및 입국심사와 제대로 열차를 타지 못해 허둥대어 진이 빠져버린 나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안전하게 여행하길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인사말을 감사함을 표하고 창가에 기대어 밖 바라보았다. 터널을 빠져나와 보이는 하늘이 전보다 더 맑아 보였다. 열차는 종착역에 도착하였고 모두들 기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환승을 위해 캐리어를 끌고 출구로 향하기 시작하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는 내게 말을 걸었을까? 한눈에도 이곳에 처음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눈빛이 불안한 외국인이 걱정되서였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여행하다 짐을 도난 경험이 떠올라서 일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국땅에서 낯선 이의 따뜻한 참견(?)이 정말 고마운 순간이다.
양키스 스타디움
우여곡절 끝에 숙소인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였다. 게스트 하우스는 뉴욕의 맨해튼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뉴저지의 뉴포트라는 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그쪽으로 숙소를 잡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맨해튼 내 숙박비가 상당히 비싸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근처 지역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했다. 공항에서부터 허둥댄 것 치고는 게스트하우스 스태프와 약속한 체크인 시간을 많이 늦지 않았다. 간단한 서류작성과 스태프의 설명을 듣고 내가 배정받은 베드에 누워보았다. 매트리스는 나의 몸을 푹신하게 받아주었는데 꽤 상태가 좋은 것 같았다. 침구의 상태도 깨끗해서 이곳의 첫인상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몸은 마치 일주일 넘게 이동한 것 마냥 피곤에 절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 쉬고 싶었다. 짧은 여행도 아니기에 첫날부터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였다. 그러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한국에서 일정 짜던 중 도착하는 날에 양키스 스태디움에서 레드삭스와 양키스의 경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 레드삭스의 팬이므로 보스턴의 펜웨이파크 홈경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 깊은 레드삭스와 양키스 라이벌 경기가 열리는 당일에 같은 도시에 있으면서 관람 기회를 흘려보내기는 정말 아까웠다. 양키스의 홈구장이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야구팬으로서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팀의 구장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기도 하여 표를 예매하였다.
뉴저지와 뉴욕을 연결하는 PATH를 타고 33번가 역에서 MTA(뉴욕 지하철)로 갈아탔다. 플랫폼에서 스태디움으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는데 조금씩 레드삭스와 양키스의 모자나 저지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열차를 타고 가는데 정차를 할 때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들이 많아져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때마침 러시아워 시간과 겹쳐서 퇴근하는 사람들과 야구팬들이 섞여서 더욱 붐비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지하철을 타다가 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여기는 그 모습이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나라는 보통 친구들 또는 연인과 같이 젊은 사람들끼리 함께 가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가족단위로 함께 가는 사람들도 꽤 많아 보였다. 한 백인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딸만 셋인 듯한 가족이었는데 장난치는 아이들과 그것을 말리면서도 미소 짓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다 중간에 정차한 역에서 한 흑인 여자가 열차에 오르며 뒷사람들에게 밀지 말라며 욕을 해댔다. 그녀 주변 사람들이 약간 불쾌해하거나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까 그 가족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향해 아이들이 있으니 욕을 자제해달라고 정중하지만 확실하게 경고하였다. 흑인 여자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다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아버지는 다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는 경기 시작 십여 분전에 경기장 바로 앞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는 조금 늦지 않을까 싶어 걱정했지만 시작에 맞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플랫폼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휩쓸려 계단을 올라갔다. 역 밖으로 나오자 많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월드시리즈 경기가 열리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경기장 내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출입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있어 다른 출입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도 경기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발길을 돌려 처음 들어가려고 하였던 출입구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입장 대기줄의 맨 끝을 찾아갔다. 결국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경기가 시작된 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고 3회 말 양키즈의 공격 중이었다.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던 레드삭스 투수가 오늘 선발로 나와 던지고 있었다. 긴 기다림의 연속으로 쪼그라드러 버린듯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서 치킨텐더 프라이 세트와 맥주 파인트 한잔을 사서 예매한 자리를 찾아갔다. 치킨텐더와 프라이는 다 식었지만 너무 배고픈 나머지 맥주와 함께 허겁지겁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내가 앉은 좌석은 가장 저렴한 내야 쪽 4층 맨꼭대기 자리였다. 왼쪽엔 백인 남성이 친구와 함께 온 것 같았고 오른쪽엔 혼자인 듯한 동양인 노인이었는데 왼편은 아주 시끄럽고 오른편은 그저 경기 중간에 짧은 탄성을 몇 번 지르는 것 빼고는 아주 조용하였다. 양쪽 다 양키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어웨이팀 더그아웃이 있는 3루 쪽 자리라 레드삭스 팬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곳은 양키스 스타디움이었다. 아무리 라이벌인 레드삭스와 경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양키스 홈구장에 양키스 팬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심지어 가격도 저렴한 자리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저 속으로 레드삭스를 응원하며 조용히 경기를 관람하였다.
4월 중순이 넘었지만 뉴욕은 예상보다 추웠다. 기온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부는 바람은 여벌로 가져온 옷을 더 껴입었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배가 부르고 취기가 올라오자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경기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있다가는 내가 끝장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6회가 끝난 뒤 중간 내야 그라운드 정리 시간에 옆자리 친구들이 자리를 뜬 것을 기회삼아 관람석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다가 푸른 그라운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가까이에서 그라운드를 보고 싶어 1층 관람석 근처로 다가갔다. 익숙한 멜로디에 맞춰 그라운드 정리 스태프들 중 일부가 춤을 추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빌리지 피플의 <YMC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키스 팬들은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그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미국에 있다는 것이 온몸에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