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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Jul 27. 2019

2. WTC / Hank's Juicy Beef

18APR19

WTC(월드 트레이드 센터)


 아침에 숙소를 나와 PATH를 타기 위해 뉴포트 역으로 향했다. 딱히 특별한 일정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우선 맨해튼으로 가서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3번가 행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 서있는데 건너편 플랫폼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에서는 WTC(월드 트레이트 센터)행 열차를 탈 수 있다고 하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승강장에 바람이 일며 멀리서 내가 기다리던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열차와 반대편 플랫폼을 번갈아 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반대편으로 건너왔을 때 내가 타려고 했던 열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예전에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던 시절 이용하던 집 근처 지하철 역은 하나의 플랫폼에 양방향으로 열차가 오고 갔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다 반대편 열차가 들어오는 쪽을 종종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내 앞으로 타야 할 열차가 도착하여 문이 열려 있다. 이번 차를 놓치면 분명한 지각이다. 때마침 반대편으로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나는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서류가방을 앞에 있는 열차 안으로 던져 버리고 반대편 열차로 뛰어 올라탄다. 뒤를 돌아서니 가방을 삼킨 열차가 가속을 내며 빠르게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내가 올라탄 열차의 문이 닫힌다. 열차는 거침없이 질주하여 지하터널을 빠져나온다. 창밖으로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차들이 보이고 곧이어 반짝거리는 한강이 나타난다. 출입문 수직 창 통해 들어온 아침햇살이 온몸을 감싼다.


 하지만 항상 현실은 축 처진 어깨 위로 가방끈이 여전하였고 지하를 달리는 열차 창문으로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만 비춰 보일 뿐이었다. 역내 안내방송이 회상에 젖어 있던 나를 깨웠다. 눈앞으로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상상만 하던 일탈을 저지르는 것 같아 마냥 두근대는 가슴을 앉고 WTC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 맞은편에는 아직 학교에 다니 않아 보이는 어린애가 셋이나 되는 백인 가족이 앉아 있었다. 미국인 같아 보였는데 그들도 나처럼 뉴욕으로 관광 온 것 같았다. 아이들 중에 제일 큰 남자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징징 거리자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도착하면 바로 밥을 먹자며 아이를 달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괜스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을까 눈치가 보였다.


 열차가 종착역인 WTC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플랫폼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데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얀 아치형 구조물들이 줄지어 타원형 돔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포유류 동물의 배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끔 해주었다. 연신 감탄을 하며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곳과 비슷한 장소를 웹서핑 또는 SNS를 하다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스페인의 유명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만든 건물로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Oculus'



 한국에서 어렴풋 이곳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우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교 학부시절에 구조공학에 재미를 느끼고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때 큰 영향을 받은 건축가가 바로 칼라트라바였다. 사실 그는 우리가 보통 건축하면 떠올리는 건축설계 쪽 보다는 구조공학 엔지니어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학업을 마치고 실무를 하면서 구조공학을 바탕으로 한 건축설계를 통해 자신만의 설계 스타일을 정립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도 그와 같이 엔지니어이면서 동시에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하지만 대학원 첫 학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칼라트라바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실에서도 실무를 하는 구조설계 업계에서도 오직 당장 돈이 되는 연구와 설계만 쫓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꾸는 꿈이 그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자 자퇴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님과 주위 지인들의 만류로 우여곡절 끝에 석사과정을 끝마쳤다. 그리고 꿈은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지나 오늘 우연히 한 때 나의 롤모델이었던 사람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역시나 그의 솜씨에 또다시 매료되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부를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그니처와 같은 V형 구조물이 비대칭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뉴포트를 출발할 때부터 하늘에 안개가 자욱하였는데 여전히 날씨가 좋지 않았다.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상부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흐린 날 나름대로의 운치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디선가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면 좋을 것만 같았다.





Hank’s Juicy Beef


 대학원 석사과정 때 삼시 세 끼를 샌드위치로 해결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나는 샌드위치를 무척 좋아한다. 심지어 회사를 다니던 시절 아침에 사 먹는 샌드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출근 전에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싸가지고 다닌 적도 있을 정도였다. WTC 근처 구경을 하고 나니 몸에서 뭘 좀 먹어야 될 것 같다고 계속해서 보내는 신호를 이제야 의식할 수 있었다. 맨해튼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기에 맛있는 음식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첫 식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나의 소울푸드인 샌드위치로 결정했다. 


 구글맵 통해 검색하다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뉴욕시청 근처에 있는 Hank's Juicy Beef라는 샌드위치 전문점이었다. 평점도 높았고 사진 속 샌드위치도 맛있어 보였다. 뉴욕시청 옆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리 멀어 보이지 않은 것 같아 걸어가기로 하였다. 내가 뉴욕의 길거리를 실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신기하였다. 뉴욕시청은 카메라를 든 방송사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아마도 뭔가 시청에서 특별한 발표나 행사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시청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조금 걸으니 바로 가게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제대로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부는 샌드위치 가게 치고는 크고 테이블도 꽤 있었는데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주문을 받는 줄과 음식을 받는 곳 모두 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주문 줄을 따라 벽에는 가게 관련 신문스크랩과 이곳을 방문한 유명인들의 기념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카운터와 바 위 상단 천정에 걸려 늘어 뜨려 진 성조기가 인상적이었다. 


 메뉴판에 여러 샌드위치들이 나를 유혹하였지만 처음 왔기에 이곳의 시그니처 샌드위치와 수제 맥주를 시켰다. 주문을 마치고 카드로 결제를 하였는데 주인이 결제용 태블릿을 내쪽으로 돌렸다. 화면을 보니 일정 금액 줄지어 쓰여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자세히 보니 팁 금액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팁 문화가 보편적인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결제 시스템에 녹아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팁을 줄만한 서비스를 받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고 싶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금액 아래에 No Tips라는 버튼이 보였다. 주인은 나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 평소에도 손님이 팁을 선택할 때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팁을 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은 들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은 것 같지 않아 맨 아래 버튼을 눌렀다.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먼저 마셨다. 공복에 마시는 맥주는 언제나 옳다. 특히 낮에 마신다면 더욱더!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근처에서 일하는 것 같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배달 대행하는 딜리버리 맨들도 눈에 띄었다. 드디어 시그니처 샌드위치가 나왔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겉 종이는 기름에 절어 있어 식욕을 돋아주었다. 그런데 비주얼에서 예상한 것과는 맛이 특이하였다. 안을 가득 채운 시그니처 피클이(이름이 발음하기도 어려웠는데 벽에 걸린 스크랩 기사를 떠올리니 이태리 전통 절임 방식으로 만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그렇지만 빵 사이의 푸짐한 슬라이스 비프와 모차렐라 치즈는 만족스러웠다. 약간 아쉬웠지만 기념비적인 맨해튼의 첫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다시 이곳을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숙소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샌드위치들은 수 없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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