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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Jul 27. 2019

0. 뉴욕행 비행기

17APR19

뉴욕행 비행기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전벨트 등이 소등된 이후로 그들은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속해서 비행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확인하고 또 찾는다. 첫 식사가 끝나고 기내식 트레이가 다 정리된 뒤로 기내 안의 조명은 어두워진다. 대략적인 형태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빛이 없지만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서인지 여전히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승객들의 요구사항을 응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잔다. 식사 때 위스키를 연거푸 두 잔을 주문하여 마셨다. 그래서인지 추가로 맥주를 주문하자 내 자리 구역의 담당 스튜어디스가 이미 위스키 두 잔을 마신 것을 되물으며 이번 맥주 이후 주류 요청은 일정 시간 지난 뒤에 제공해드리겠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녀의 대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다 술에 취해 기내난동 일으킨 뒤 공식활동을 중단한 가수의 사건들이 생각났다. 그제야 그녀의 대응이 그러한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고 승무원의 기내 응대 매뉴얼에 이미 포함되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다 마시고 난 뒤 두 번째 식사 때까지 추가로 주류를 주문하지 않았다. 내가 약간 소심한 것이 있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보게된 그녀의 눈에 뜨게 굽은 어깨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앞좌석의 중년 여성은 빈 옆자리를 차지하여 몸을 누였다. 하지만 자리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등받이를 앞뒤로 조정하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떴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도 비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할당된 좌석만으로도 충분히 넓다고 느껴진 것도 있지만 두 좌석 모두 사용해서 눕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할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미리 시차 적응을 하기 위해 비행 중에 최대한 많이 자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술의 힘을 빌려 깊이 잠들어 보려고 하였지만 충분한 양의 알코올을 음용하지 못하여서 그런지 한두 시간 옅은 잠을 잔 뒤로는 더 이상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문득 '이번 여행을 시작한 게 잘한 일인가?' 하는 전에도 수없이 반복한 의문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마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처럼 떠나왔지만 잠시 방심하고 있던 틈을 타고 늘 그렇듯 현실적인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의 빈자리를 파고든다. 아무래도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전혀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에 나는 또다시 그 익숙한 두려움에 잠식당한다.


 누군가 팔꿈치를 치고 지나간다. 담당 스튜어디스였다. 그녀는 나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일을 하고 있을까? 나 또한 최근까지 그녀처럼 정신없이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하지만 가끔씩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될 때면 입 밖으로 뱉어내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에선 그렇지 않다고 부르짖곤 하였다. 결국 누르고 눌러도 외면할 수 없는 내 안의 결연한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정해진 길의 중간에서 비상등을 켜고 잠시 멈춰 섰다.


 집에서 무료하게 쉬고 있던 어느 늦은 오후, 어렸을 적 보았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청소년 관람불가인 영화였지만 중학생 시절이던 당시 나는 소위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을 보는 것으로 학업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기에 부모님의 눈을 피해 몰래 밤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다. 러닝타임이 일반 영화에 두배 정도 되었기에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의 포스터는 지금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빛바랜 흑백사진 스타일의 포스터인데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었다. 양쪽 건물 사이로 다리의 주탑이 보이고 그 아래로 한없이 작은 꼬마 아이가 걷다가 뒤돌아 서 자신을 따라오는 더 큰 아이들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다시 생각 난 김에 영화의 정보를 찾아보다 갑자기 포스터 속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그곳에 가면 영화에 미쳐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뉴욕행 비행기를 끊었다.


 어두운 기내 안으로 갑자기 눈부신 햇살이 들어온다. 창가 좌석의 누군가 내려져 있던 창문 가림막을 열어 올린 것 같다. 새벽의 태양빛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레퍼토리의 상념에 잠겨 있던 나를 현실로 이끈다. 앞좌석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비행정보를 확인한다. 이제 도착지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조금씩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중학생 시절 시험 보기 전처럼. 나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립밤을 꺼내 아랫입술에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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