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APR19
CrossFit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굵고 길게 내리는 장대비보단 공중에 흩뿌리는 듯한 이슬비에 가까워 보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되면서 내 생활에서 규칙적인 일과가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운동이다. 4년 전 크로스핏(Crossfit)을 처음 접하고 그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중간중간 부상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운동을 쉰 적이 있어 운동을 한 기간에 비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더 많다. 아직도 매번 WOD(Workout Of the Day, 글자 그대로 그날의 운동이라는 크로스핏 용어)를 할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근육이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진다. 바로 운동이 끝난 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는 이 고생을 왜 돈 주고 하나 자책하면서도 다음날이 되면 또다시 운동을 하러 온다. 힘들지만 끝나고 난 뒤 느껴지는 상쾌함과 뿌듯함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은 계속해서 이 운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인 것 같다. 물론 실질적인 신체 운동능력 향상 효과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 운동에는 특이한 문화가(나중에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커졌지만) 하나 있다. 바로 어느 나라 어떤 동네를 가더라도 그곳의 크로스핏 박스(Box, 크로스핏에서는 보통 운동하는 장소를 이렇게 부른다)에 사전에 문의하면 일정 비용을 내고 1일 이용(통칭 Drop-In)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며칠간 비행과 관광으로 인해 운동을 하지 못하여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어제 숙소 근처에 있는 크로스핏 박스를 검색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메일로 문의하니 빠른 답변이 왔고 다음날 오전 10시 수업으로 예약을 잡았다.
숙소에서 그곳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먼저 가서 분위기도 보고 몸도 풀 겸 여유 있게 출발하였다. 밖에 나와 보니 비는 안에서 보던 것 같이 약해서 괜찮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쓰고 있던 우산이 뒤집혀 뼈대가 부러졌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스무 살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동기들과 교양수업을 들으러 건물 밖을 나왔다. 우산 위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갑자기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언제까지 우산으로 비를 피해야 할까?'
나도 모르게 우산을 벗어던졌다. 머리 위에 떨어진 비는 얼굴로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나의 몸의 곳곳을 적셔가는 그것은 소리도 냄새도 감촉도 내가 지금까지 느낀 것보다 훨씬 더 상쾌하였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온 순간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였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내 아래로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그 위로 계속해서 물방울이 튀겼다. 그 뒤로 다시는 그렇게 비를 맞은 적은 없었다. 한 번만으로도 충분히 그로 인한 결과가 어떤지 알았기 때문이다. 한때 치기 어린 마음으로 했던 부끄러운 행동이지만 가끔 오늘과 우산 없이 비를 맞는 날이면 그날이 생각난다.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그렇게 옛 추억을 되새기다 보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박스는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순간 멈칫하였다. 조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청소도 언제 한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건물 관리자가 제대로 신경 쓰지 않거나 없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2층에 도착하여 미로 같은 좁은 복도를 따라갔다. 아래에서 봤던 박스 엠블럼이 그려진 입간판이 내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주었다. 안에서는 회원들이 열심히 운동하고 듯 거친 숨소리가 쉴 새 업이 흘러나왔다. 카운터 앞에서 서성이는데 이곳의 코치로 보이는 흑인이 나를 발견하였다. 그는 열심히 구르는 사람들에게 계속 움직이라고 소리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눈에도 엄청나게 발달된 역삼각형의 상반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는데 커다란 그의 손을 통해 열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코치는 안쪽으로 나를 안내하며 몸을 풀고 있으라고 하였다.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공간인데 생각보다 넓어서 놀랐다. 중앙에 줄지어 서있는 스테이션들은(풀업과 바벨 운동 등을 할 수 있는 기구) 나의 운동 욕구를 더욱 자극하였다.
10시에 가까워지자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곧이어 수업시간이 되었고 코치가 10시 수업 사람들을 가운데 공간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서로 자기소개와 이번 주말에 뭐할지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례가 되자 약간 긴장되었지만 나는 한국에서 왔고 주말에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관광객이지만 정말 계획이 없었다) 말했다. 그렇게 가벼운 아이스 브레이킹 타임을 가지고 코치의 구령에 따라 스트레칭을 시작하였다. 몸풀기를 마치자 코치는 중앙에 있는 보드를 가리키며 오늘의 WOD를 설명하였다. 3명이서 팀을 이뤄서 하는 운동이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실제로는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할 수도 있지만) 백인과 흑인 남자들과 함께 팀을 이뤘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곳에서 처음 보는 동양인인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 궁금해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우리가 함께 나눠서 해야 할 동작들은 5가지였고 중간에 두 번 800m 러닝도 포함되어 있었다. 5가지의 동작중에는 기본적인 것도 있었지만 난이도가 있는 것들도 있었다. 사실 5개월 정도 운동을 쉬다가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되어 자신이 없었다. 특히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 바에 매달리는 동작이 부담되었는데 오늘 해야 할 동작중에 T2B(바에 매달려 몸을 말아 올려 발끝을 바에 터치하는 복근 운동 동작)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웜업으로 몇 번 해보니 생각보다 잘되었다. 다니던 곳 말고 다른 박스에 가면 잘 안되던 동작이 잘되기도 한다는데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았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WOD를 시작하였다. 초반 동작들은 생각보다 좀 해볼 만했다. 약간 힘든 동작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다른 팀원들의 페이스에 맞출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중간에 러닝에서 내 밑천이 다 드러나고 말았다.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뛰는데 초반부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러닝 때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래도 같이 뛰는 팀메이트들이 멱살 잡고 이끌어 줘서 마칠 수 있었다. WOD를 완료하고 나니 팀원들과의 서먹한 기운이 많이 사라졌다. 그들과 오늘 운동에 대해서 간단하게 리뷰하며 서로 잘하는 부분에 대해 칭찬을 하였다. (부족한 부분은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본인이 뼈저리게 느꼈을 테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역시 함께 몸으로 고생하면 금세 친해지기 쉽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나머지 팀들이 운동을 다 마치고 난 뒤에 장비 정리와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였다.
오늘의 수업료를 내려고 하는데 코치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다만 다음에 오면 그때부터는 공짜가 아니니까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말하였다. 오래간만에 운동을 해서 개운하였는데 수업료도 면제받으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코치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다 보았던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안에 들어가니 함께 운동한 팀메이트들이 먼저 와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다시 반갑게 인사했다. 주문을 하기 위해 같이 줄을 섰는데 그들 중 흑인 친구가 창밖을 보며 몇 해전 태풍이 와서 이 근처가 모두 물에 잠긴 얘기를 해줬다. 일주일 넘게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백인 친구가 다음 주 중에 시간이 되면 같이 운동하자며 자신은 보통 새벽 5시 반에 운동을 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가 뜨지 않으면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최근의 기상패턴을 보았을 때 무리일 것 같아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콜드 브루를 든 채 숙소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그쳤지만 언제든지 다시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이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Time Life Building
맨해튼의 거리를 걷다 보면 굴뚝같이 생긴 원통이나 하수구에서 김이 올라오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는 모습으로 맨해튼의 길거리를 대표하는 친숙한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런데 도대체 땅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저렇게 쉴 새 없이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걸까? 혹시 숨겨진 지하터널로 증기기관차가 지나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대공황 시대에 굶주림으로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이 만든 땅굴 도시의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일까? 온라인 검색 포털을 통해 몇 초만 투자하면 금세 연기의 정체를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터무니없는 유치한 상상이 가져다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와 같은 공상에 자주 빠지는 중년 남자의 모험을 그린 영화를 보았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처음 국내 개봉 제목을 보고 원제와 뉘앙스가 다르게 바꾼 것이 되게 거슬렸다. 어딘지 모르게 어렸을 적 비디오 대여 가게에서 많이 보았던 90년대 B급 할리우드 영화의 제목같이 한물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렇게 제목을 바꾼 것이 원제보다 영화의 내용과 감독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해주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월터 미티가 일하는 LIFE 매거진이 인수합병을 통해 오프라인 잡지 발행사업을 중단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포토 에디터로 16년째 근무한 월터는 전설적인 사진작가로부터 폐간호의 마지막 표지로 쓰일 사진이 담긴 필름을 받게 된다. 그런데 월터는 필름에서 작가가 표지로 지목한 '삶의 정수'를 담은 25번째 사진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임무가 될 수도 있는 표지 사진을 찾기 위해 연락도 닿지 않고 행방도 알기 어려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사진작가를 찾아 태어나 처음으로 상상만 하던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시리즈로(이 영화의 국내 개봉 제목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듬어진 것 같다) 유명한 벤 스틸러가 감독, 제작, 주연을 맡았는데 한마디로 이 영화는 그가 영화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There's Something About Mary, 1998)> 와 같이 더벅머리의 숙맥 청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제는 눈가의 주름이 눈에 띄고 머리도 희끗해져 무게감이 느껴지는 중년 남자가 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이 생각보다 영화 속 주인공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맞춤옷을 입을 것처럼.
영화에서 나오는 LIFE 매거진의 실제 건물이 바로 맨해튼에 있다. 건물 내부는 못 들어가겠지만(실제 촬영은 세트에서 진행했을 것이므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영화에서 본모습과는 다를 것이다) 건물 앞이라도 직접 보고 싶어 맨해튼으로 향했다. 오전처럼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해는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는 길에 점심을 해결할 겸 유명하다는 베이글 가게에 들렸다. <Best Bagel & Coffee>라는 정말 순수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는데 역시 맛집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어디에서 주문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지나쳐 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카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그를 따라 줄을 섰다. 기다리면서 앞사람들이 주문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점원과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꽤 오래 주문하는 모습이 신기하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약간 긴장한 채로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 딱 한마디만 말했다. 그러자 점원이 뭐라고 물었는데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녀는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해주었는데 빵의 종류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빵을 구울 것인지 말 것인지 기본 내용물을 다 넣는지 추가할 것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등골에 식은땀 맺히는(?) 주문을 마치고 계산하는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추가해서 값을 치렀다. 베이글과 커피를 기다리다 생각해보니 앞사람들의 긴 주문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몇 분 뒤 점원이 내 주문 번호를 불렀고 고대하던 베이글과 커피가 나왔다. 구석의 빈 테이블이 보여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꽁꽁 싸인 베이글의 양쪽을 잡고 갈라보니 빵 사이로 크림치즈, 연어, 양배추, 토마토 그리고 또다시 크림치즈가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 연어가 가장 두툼하게 들어 있어 보기만 해도 연어가 입안에서 춤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고픔에 더 이상 보고만 있지 못하고 순식간에 베이글 반쪽을 해치웠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된 연어 샌드위치였다. 남은 반쪽은 안에 들어 있는 재료들을 여유롭게 음미하며 즐겼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였다. 사실 아침에 운동을 해서 한 번에 다 먹었지 평상 시라면 반쪽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를 양이었다. 그러다 샌드위치의 가격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 정도 양을 주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였다.
연어로 가득 찬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월터의 직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타임스퀘어를 지나쳤다. 이틀 전 밤늦게 숙소로 돌아가다 아쉬워서 다녀갔는데 그새 한번 봤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든 내가 부끄러워 빠르게 그곳을 지나갔다. 가장 붐비는 친근한(?) 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몇 블록만 올라가니 정말 신기할 정도로 한산하였다. 구글맵을 보고 찾아갔음에도 목적지 주위에서 길을 잃었다. 역시나 휴대전화의 GPS를 맹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맨해튼에서 (주소를 찾기 쉬운 직교형 도로 위에 만들어진) 몸소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한 블록을 돌아서 드디어 영화 속 그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 앞으로 영화처럼 꽤 큰 분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사각형 형태로 안쪽 대리석 기단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 내려왔고 기단 중앙에서 여덟아홉 개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감탄할만한 명소라기보다 지나가는 행인이 '오! 이런 곳에 분수가 있다니 잠시 쉬어 가면 좋겠군!' 정도의 생각을 들게 끔 하는 곳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월터가 이 분수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찾으려고 했던 삶의 정수를 담은 사진이 어떤 모습인지 이곳에서 깨닫게 되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나도 월터와 같이 분수 난간에 걸터앉아 보았다. 눈을 감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야상영으로 영화를 보고 나왔던 그날 밤, 가슴이 벅차올랐던 느낌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렴풋 꿈꾸었던 여행을 월터를 통해 잠시나마 엿볼 수 있어 그랬던 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온 월터는 통장잔고가 바닥났지만 더 이상 소극적이지도 멍 때리 지도 않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마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분명 일상에서 뛰쳐나와 낯선 환경에 속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선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었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사람들은 정말 헤아릴 수도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지금 당신의 모습이 정말 마음 깊이 원하는 삶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우리들 중 몇 명이나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무기력함에 사로 잡혀 허우적거릴 때 가끔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간 꿈꾸던 일탈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뭘 하더라도 결국 내 삶이니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월터가 아이슬란드에서 이륙하는 헬기에 뛰어 올라타는 부분이었다. 분수의 물소리가 점점 옅어지고 그 장면에서 흐르는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가 귓가에서 점점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