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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Jan 02. 2023

지루한 일상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해가 바뀌었다. 일 년 단위로 결산하고, 새롭게 다짐하는 행위에 무덤덤해진 지 오래되었다(고 쓰지만, 나는 새해가 되면 꼭 무언가를 끄적이는 버릇이 있다).


학교 다닐 때는 한 살 더 먹는 의식을 일부러 치르지 않아도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익숙한 반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반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담임 선생님도 바뀌고, 교과 과목 선생님들도 달라진다. 대학 때는 필수 이수 과목이 달라진다. 종강 파티 후 방학을 보내고 나면 수강 신청하면서 비로소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극 내향인으로 바뀐 환경에서 살아남느라 투쟁(?)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익숙해지면 새로운 환경에 다시 내던져지곤 했다.     

 

어른으로 오래(?) 산 지금은 어떤가? 해가 바뀐다고 갑자기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 쁜 습관을 갑자기 버릴 수도 없고, 원래 나약했던 의지가 강해지지도 않는다. 이미 속한 환경에 맞춰 그저 그렇게 어중간하게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무덤덤하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해야 하고, 어제 못 한 일은 오늘도 못 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      


미키 사토시 감독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해서 땅으로 꺼질 것만 같은 스즈메(우에노 주리) 이야기를 보면 ‘대단한 결심 따위는 안 해도 괜찮겠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남편은 외국에서 근무 중이고 매일 한 번씩 통화하지만,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었는지 묻고 답하는 것이 대화의 전부이다. 스즈메는 마치 거북이 먹이를 주려고 태어난 존재처럼 느낀다. 학창 시절 존재감 쩌는 친구 쿠자쿠(아오이 유우)를 떠올린다. 스즈메가 보여준 평범함의 싹은 학창 시절부터 도드라졌다. 가방에 붙이는 스티커를 선택하는 센스에서 평범으로 가는 직진 사다리를 탔고, 그 결과 존재감 0으로 수렴하는 어른이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 남편마저도 스즈메가 한 인격체가 아니라 있어도 잘 안 보이는 사람처럼 대한다.  

    

무색무취한 자신의 존재감에 멍한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스즈메는 스파이 임무를 맡게 된다. 면접 보러 간 자리에서 바로 스파이로 채용된다. 이유인즉 스즈메는 누가 봐도 평범 그 자체여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테니까. 스파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스즈메만 한 사람이 없다. 마음에 안 들어서 버리고 싶었던 평범함이 스파이 임무에 필요한 스펙이 된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식이다. 평범함을 갈고닦았더니(?) 평범함을 필요한 일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타이밍을 만나서 반짝이게 된다. 단점이 무기로 변한다.      


스즈메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눈에 띄고 싶어도 띄지 않는 일상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거북이 먹이를 주는 일도, 청소하는 일도 스파이 활동이라고 생각하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파이’로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매번 생각하니까 문득 평범함의 특성에 관해 고민한다.      


“오후 3시의 슈퍼. 주부는 뭘 사면 제일 평범한 거지? 자꾸자꾸 생각하니까 어렵다.”     


식당에서도 기억에 남지 않을 메뉴를 주문해야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음식을 주문하려고 메뉴를 보기는 처음이다. 사격 훈련을 받고 총을 차에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평범하게 보이려면 규정 속도를 유지하면 되겠지, 생각한다. 웬걸. 교통경찰이 뒤쫓아와서 묻는다.      


“제한속도를 지키고 계셔서요. 뭔가 꺼림칙한 일이라도 있나요?”     


평범함을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하는 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일의 난이도가 달라진다. 스즈메가 누구보다 잘하는 일상적 일을 ‘훈련’이란 이름을 붙이고 나니 일상적 평범함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인식한다. 평범함은 대단함과 통하는 것을, 우리는 자꾸 잊는다.      


동네에서 활동하는 다른 스파이들도 만난다. 라면보다 에스프레소를 더 잘 만드는 라면집 사장은 “눈에 띄지 않는 맛. 대단하지. 맛있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간단한 거야.”란 철학이 있다. 일부러 ‘어중간한 맛’의 라면을 만드는 어려운 일을 한다.      


자잘하고 사소한 일상은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으면 하찮아 보인다. 해는 매일 뜨는데 새해 일출을 보러 가는 것도 무의미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추운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며 보는 일출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일출을 하루 본다고 해서 새해가 갑자기 희망차게 바뀌지도 않는다. 어둠 속에서 추위를 참으며 진짜로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꾸깃꾸깃 접어둔 마음을 펴서 수평선으로 떠오르게 하는 시간을 맞이하는, 자신을 위한 의식이다.

 

바람을 노트에 적고 성취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바람과 성취는 별개다.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꽃길만 걷지도 않는다. 확신하고 길을 나섰다가 뜻밖의 길 위에 있을 때도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고, 사람을 만나 노닥거리다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가기도 하고, 원래 가려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모두 평범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져 때려치우고 싶은 시간이 쌓여 마음이 요동칠 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평생동안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해야할 때는 그리 여러번 오는게 아니야." 몇 번 안 되는 때를 기다리며 지리멸렬해 보여도 관성에 따라 평범함을 벼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스파이 구함’을 보았을 때 스즈메처럼 지원 자격 요건을 완성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올해도 다른 때와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보자, 고 다짐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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