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친구가 이웃집의 근사함에 대해 말했다.
“우리 옆집은 비싸고 멋진 집이야. 오전에는 햇살이 거실 가득 들어와. 근데 그걸 누가 누리는 줄 알아? 집주인은 집을 사고 유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해서 그 시간에 집에 없어. 햇살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누리는 사람은 그 집 메이드야. 아이러니하지?”
집은 일터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나 같은 프리랜서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9 to 6’ 직장인보다 훨씬 많다. 주거 환경은 생각에도 영향을 끼친다.
1인 가정이 서울에서 쾌적한 집에 안착할 때까지 과정은 녹록치 않다. 친구 말대로 볕이 잘 드는 남향집을 장만하려면 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서 집에서 볕이 드는 것을 볼 수 없다. 서울을 고집하는 이유는 많다. 양질의 일자리, 각종 문화시설 집중, 대형 병원 등. 이러한 이유들로 나도 서울을 떠나기를 주저한다. 분당에서 혼자 사는 J는 “이번에 이사했는데 대형 병원까지 차로 10분 거리라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했다. 혼자 나이 들면서 병원에 다른 사람 도움 없이 가는 일에 진심이 된다. 서울에 살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의 실제 주거 환경은 마음에 좀이 슬게 만든다.
김태리가 혜원 역으로 출연하고 임순례 감독이 만든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은 고시원에 산다. 학교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편의점에서 일한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서 폐기 처분하는 삼각김밥이나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다. 임용고시 합격은 쥐구멍에 들 볕이다. 임용고시에 붙어도 인생이 단시간에 극적인 승리의 드라마로 변하진 않는다. 혜원은 현재 삶을 진짜 삶으로 가는 통로쯤으로 여기며 고생을 견딘다. 하지만 인생은 단 한 순간도 ‘임시’란 딱지를 붙일 수 없다. 모든 순간은 딱 한 번만 지나간다. 우리가 임시라고 여길 뿐이지 모든 순간은 다 진짜다.
혜원은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습하고 작은 쥐구멍에 갇힌 쥐가 되어버린다. 고단함만 남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집으로 도망친다.
수능 시험이 끝난 날, 혜원의 엄마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엄마가 남긴 편지 한 장이 혜원을 기다렸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갓 스무 살의 혜원은 엄마의 가출도, 엄마의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혼자 힘으로 스물 초반을 살아냈다. 취준생이 되어서야 엄마가 남긴 말을 이해할 준비가 됐다. 비록 시골집으로 도망치듯 왔지만, 그곳에서 비로소 뼛속까지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고시원에서는 절망을 품었다면 시골집에는 햇살이 넘치고, 꿀잠이 보장된다.
혼자 사는 일은 스스로를 챙기며 사는 것이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서울에서나 시골에서나 똑같다. 장소만 옮겼을 뿐인데 그 방식이 달라진다.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도시락이 아닌 갓 지은 밥을 먹는다.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밥은 달달하다. 밥에 오롯이 담긴 온기는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을 사르르 녹인다. 혜원은 텃밭에서 자란 제철 채소로 엄마가 만들어준 제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골집에 내려왔지만, 서울에서 살 때와 비교할 수 없게 자신을 잘 돌본다. 1인분의 삶을 잘 사는 것은 셀프 돌봄 달인이 되는 것이다. 혜원은 잘 살기 시작했다.
낡은 시골집에서 사는 일은 낭만만 있지 않을 것이다. 텃밭을 가꾸려면 땡볕에 잡초도 뽑아야 하고 가뭄이 오면 밭작물에 물도 공급해야 한다. 낡은 집을 고치고 유지하는 일도 혼자 해내기에 만만치 않을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템퍼 매트리스에 리모컨으로 각도를 조절하는 침대에서 잠을 깨는 삶, 각종 고급 식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삶에 대한 욕망을 밀쳐내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질주한다. 나를 극진히 돌보려는 일이 정신 차리고 보면 결국 나를 해친다. 대기업에 입사했던 재하는 월급을 축낸다는 말을 들었다. 조직에서 개인은 월급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재하는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깎아내리는 조직을 떠나 귀농한다.
빽빽한 아파트 숲에서 자고 일어나면 내 이름 석 자로 계약한 아파트 한 채를 갈망하지만, 논밭을 보며 살면 계절을 느낀다.
“밤 조림이 맛있다는 건 가을이 깊어졌다는 뜻이다. 곶감이 맛있다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이다” 하고.
신축 아파트를 내 것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는 대신 제철 재료로 음식을 만들 궁리하는 것이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맞는 삶의 속도와 방법을 탐색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속도와 기준을 뒤좇느라 뼈를 깎아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면 삶의 속도를 다시 설정할 때다.
임용고시 낙방은 혜원에게 오히려 삶의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
가장 중요한 질문을 얼버무리고 열심히 산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진 않은가?
B는 몇 년 동안 서울살이를 한 후에 여수에 정착했다. “서울에서는 다들 바쁜데 나만 한가하니까 내가 별로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불편했어요. 그런데 여수에 오니까 마음이 너무 편해요.” 대도시는 사람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혜원도 그랬다. 마음이 가난하면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에 동참할 여유가 없다. 혜원은 임용고시에 붙은 남자 친구를 향한 질투심에 마침표를 찍고, 축하를 건네는 여유를 마침내 얻는다.
혜원은 아카시아꽃이 피는 계절이면 꽃을 따서 얇게 튀김옷을 입혀 화전을 만든다. 밤이 여물어 바닥에 떨어지면 주워서 밤 조림을 만들고, 감이 열리면 하나하나 직접 깎아서 걸어둔다. 지나가는 바람이 어루만지면 곶감으로 익어간다. 흥이 나면 막걸리를 빚고 지짐이를 부쳐 친구들과 ‘꽐라’가 된다. 시골에서 삶의 기준은 계절이다. 소박하고 하찮아서 관심 받을 만하지 않은 계절 말이다.
먹고 마시는 데 정성을 다하는 일이 하찮은 일일까? 미슐랭 평점을 받은 식당에서 한 끼에 십 수만을 쓰려고 소소한 것을 다 버리며 일하는 것만이 정성을 다해 사는 것일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힘껏 챙기며 사는 것이야말로 넉넉해야 누릴 수 있는 일이다. 가슴에 착 달라붙은 욕심 그릇을 깨고 자연을 누리며 사는 삶이야말로 ‘영끌’ 해서 대출받아 집을 사는 것보다 더 힘든 결심이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블로그 이웃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가 강릉으로 이주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에 정착한 이유를 물었다.
“제가 하는 일은 매일 출퇴근할 필요가 없으니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서울과 같은 집세인데 주거의 질은 훨씬 좋거든요.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보여요. 아침 이른 시간이나 일을 마친 저녁에는 자전거를 타요. 달리다 보면 어떤 날에는 정동진까지 갈 때도 있어요. 지는 해를 머리에 이고 곁에는 바다를 두고 달리면서 드는 생각이 뭔지 아세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예요.”
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여유 있는 사람의 온화함과 행복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 뒤섞였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
“강릉에 오면 맛있는 커피 대접할 테니 한번 오세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가 문득문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