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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Apr 24. 2024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다를 때 <극한직업>

덕업일치. 말만 들어도 설렌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러움부터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미 작가의 에세이 《애매한 재능》은 덕업일치를 꿈꾸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그녀는 서울예대 극작과를 졸업 후 고시원을 떠돌며 자칭 ‘문필하청업자’가 된다.


쓰고 싶은 글은 희곡이지만, 고객의 주문을 받아서 글을 쓴다. 방송 구성작가, 칼럼니스트 등을 거치며 고정적 수입이 없어 생계를 걱정한다. 아동극을 비롯한 몇몇 공모전에서 상금을 받았지만 써볼 궁리를 하기도 전에 집에 생긴 우환이 상금을 잽싸게 채간다. 그럼에도 수미 작가는 글쓰기에 애정을 잃지 않는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아무도 찾는 이 없을 때도 수미 작가의 머릿속에는 글쓰기 등이 늘 켜져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아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 생계와 직결될 때면 더욱 그렇다.


수미 작가의 경우처럼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다른 상황은 해변에 굴러다니는 자갈처럼 흔하다. 전공과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OTT나 유튜브가 없던 학창 시절에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여운을 노트에 적었다. 야간 자율학습에서 빠져나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막연히 영화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었다. 서른 넘어서 직업을 바꿔보려고 허무맹랑하게 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내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이론서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 나는 그냥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평론하기보다는 관객으로 사는 것이 훨씬 좋았다. 나는 관객일 때 빛나는 사람이다.


1,5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선택한 영화 〈극한직업〉은 형사들이 마약상을 잡으려고 잠복수사를 하다가 얼떨결에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범인을 잡아 자신들을 ‘월급 루팡’으로 쳐다보는 이들 앞에서 고개를 한껏 들고 걷고 싶은데, 잘하는 일은 닭을 튀기고 파는 일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대체로 영화에서 강력반 형사는 폼 나고, 강단 있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정의를 구현하는 해결사로 그려진다. 형사에게서 생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반면, 현실에서 형사는 범인을 잡는 직장인이다. 극중에서 범인 추격 장면을 목격한 구경꾼과 형사의 대화는 극사실주의다.

“경찰이 왜 저래……. 막 앞구르기 하고 유리 깨고 그런 거 아니야?”

“돈 없어, 이 새끼야! 창문 깨지면 누가 변상해!!!”


형사도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이전에 직업인이다. 직업인으로서 형사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박봉에다 범인에게 종종 칼도 맞고, 잠복근무 환경도 열악하다. 좁은 차 안에 갇혀 잠을 못 자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밥도 제때 못 먹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간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형사만의 특권(?)이라면 빨간 경광등을 켜고 도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정차된 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나게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수고 깨며 뒷일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질주하는 깔끔하고 유려한 자동차 추격 장면이 얼마나 영화적인지. 현실에서의 형사는 도로에서 추격전을 벌일 때도 박봉 직장인이다. 범인을 쫓다가 16중 추돌 사고를 낸 후 보험료가 올라갈 것부터 걱정한다. 상사에게 깨지고, 잘나가는 나이 어린 동료에게 치이는 소시민이다.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무역상사에서 팔 물건을 기획하고 거래처로부터 서명된 계약서를 받는 것이 실적인 것처럼. 일의 종류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조직에서 빛나는 보석이 되려면 돋보이는 성과가 있어야 한다.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고 반장 팀의 잠복 근무지는 치킨집이다. 종일 손님이라고는 잠복근무 팀밖에 없다.

파리만 잡던 치킨집 사장이 치킨집을 팔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어떨결에 잠복근무 팀이 치킨집을 인수하고,

예상치 못한 대전환기를 맞이한다.


잠복근무 팀은 왕갈비 양념치킨으로 맛집을 일구어낸다. 가게 밖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줄을 서고,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하루 매출이 두 눈 튀어나올 정도로 올라간다. 이 상황이 설상가상인지 전화위복인지 헷갈린다. 운도 따라주었지만, 범인을 잡는 데 바친 성실함과 책임감이 치킨집 운영에 최적이었다. 심지어 최선을 다한다.


치킨 튀기고 파느라 ‘본래 업무’인 범인 미행이 뒤로 밀려나자 팀원들이 아우성친다.

“180도 기름에 데고 칼에 베이고, 씨발 얼마나 쓰라린 줄 알어?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토막살인범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매일 닭이나 토막 내고 있는 이 참담하고 막막한 심정을, 너는 아시냐구욧!!”

하루에 양파 네 자루, 마늘 다섯 접, 파 서른세 단씩 까는 ‘화생방’, 하루 매출 234만 원을 찍느라 잠깐 앉을 틈도 없이 불태운 하루. 치킨집이 대박 난 데는, 그러니까 이유가 있다. 극한 노동의 대가이다.

고 반장이 마약범 이무배와 결투하는 장면에서 외친다. “니가 모르나 본데 우리 소상공인들은 X나 목숨 걸고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범인 잡으려고 치킨집을 하는지 치킨집 하려고 범인을 잡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작 잘하고 싶고 성과를 내야 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고, 뜻밖의 일로 풀려 돈을 벌면 기분이 어떨까? 고 반장이 흔들리자 나도 흔들렸다. 뜻밖의 재능이 되어버린 치킨집 운영. ‘치킨이 미래’가 되어버린 현실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재능이 없는 게 분명한 범인 잡기로 돌아갈 것인가.      


어떤 일에서든 딜레마와 만난다. 이를테면 여행작가는 여행을 다니며 아무 데서나 원고를 쓰고 전송하며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영화 평론가가 칸 영화제에 초대받으면 칸의 해변을 거닐며 영화 이야기를 할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밖에서 볼 때의 모습이다. 여행이 일과 연결되면 책을 내든, 사진집을 내든 강의를 하든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때 ‘업’으로 이어진다. 실적에 집중하면 여행하는 법이 달라진다. 더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여행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을 파악해야 하고, 다른 기발한 여행 콘텐츠들과 차별성을 두고 행하는 ‘기획’ 여행이 된다. 여행이 업이 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여행의 본질은 일탈인데 실적을 생각하면 그 즐거움이 바랜다.


칸에 간 영화 평론가도 마찬가지다. 사멸한 줄 알았던 연애 세포가 부활할 정도로 서정적인 해변을 지척에 두고 컴컴한 영화관에서 하루에 영화만 두세 편씩 보며 시간을 보내고 호텔 방에 앉아서 원고를 쓴다. 이쯤 되면 칸 해변이나 부산 해변이나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흔히 덕업일치를 성공으로 꼽지만,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면  사회의 쓴물을 조금먹은 사람이다. 고 반장의 고민고 반장의 것만이 아니다. 그가 잘 하고 싶은 일은 형사인데 재능은 치킨 장사에 있다. 성실과 책임의 정도는 같은돈이 따라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잘하는 일이다. 


직장인의 업무 특징은 대체 가능성이다. 일정한 훈련만 받은 사람은 누구라도 내 일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직장에서 어디에나 어울리는 큐브 블록이 되는 것도 재능이다.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애매한 재능만 믿고 꾸리던 생계를 내던지는 것이 용기는 아니다.


여행에 미쳐서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월급으로 통장을 채우고, 그 돈으로 여행에 미치는 게 어떨까?

경험이 쌓이면 100세 시대에 고 반장처럼 범인도 잡고 실적도 쌓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덕질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뜻밖의 재능이 된다. 덕질은 내가 나를 계속 부양하는 당근이자 채찍이다.



영화 속 타인을 통해 잃어버린 길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다음 연재는 다음주 수요일 오전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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