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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Apr 17. 2024

홀로 설 때 두려운 이유 <다가오는 것들>

2021년 기준 1인 가구 비율은 36퍼센트이고, 특히 관악구는 2022년 1월 기준으로 1인 가구 비율이 61퍼센트로 서울에서 가장 높다. 1인 가구는 비혼만 있는 게 아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이유 중에는 이혼, 사별 등도 있다. 이는 고령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게다가 한 번 부부가 됐으면 죽이 되든 밥이 시커멓게 타든 숨을 거둘 때까지 함께 사는 시대가 아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나처럼 결혼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결혼으로 가족을 이루었던 사람이 홀로 설 때 두려움이 더 클 수 있다. 결혼생활이 좋지 않았더라도 혼자인 상태가 익숙하지 않고, 혼자 살 준비가 안 된 탓이다. ‘나이 들어서 혼자 살면 외로움 당첨’이라는 등식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 혼자 나이 드는 다양한 삶의 모델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는 독거노인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독거노인은 ‘빈곤 상태에 놓인 외로운 노인’과 동의어로 해석된다. 매달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이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혼자 여가를 즐기는 노인을, 독거노인의 모습으로 떠올리진 않는다. 독거노인은 말 그대로 혼자 사는 노인인데 말이다. 


독거노인의 이미지는 왜 이토록 부정적일까? 여기엔 사회가 제시한 이미지가 한몫한다. 나도 독거노인의 통념적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독거노인 신세만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더 나이 들면 돈이 많든지 곁에서 서로의 어깨를 토닥일 연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도 모르게 둘은 안 외롭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될 거라는 이미지를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둘이라면 정말 안 외롭고 넉넉할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고,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다. 어느 날 남편이 나탈리에게 갑자기 고백한다.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 

“그녀와 살고 싶어.”


나탈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혼자 살기’에 툭 내던져진다. 듣고 싶지 않은 남편의 고백 전까지는 직업적으로 보람찬 시간을 보내며 가정도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나탈리가 두 발 동동거리며 기름칠하고 조였던 일상의 톱니바퀴 하나를 남편이 빼버렸다. 나탈리는 훌륭한 정비사이지만 빠져버린 톱니바퀴 수명을 연장하진 못한다. 톱니바퀴의 균열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지만,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설상가상으로 출판 예정이던 교재도 전면 백지화된다. 그녀를 따르던 제자 파비엥은 대안적 삶을 꿈꾸며 그녀의 사상을 비판한다. 한밤중에 전화해서 귀찮게 하던 엄마는 더는 혼자 지낼 수 없어 요양원에 들어간 후 결국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고 싶다는 남편의 선언과 함께 거센 폭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휘몰아친다. 안 좋은 일은 동시에 들이닥친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나탈리가 아무리 성실의 아이콘이어도 전부 막아내기는 버겁다. 남편이 나간 자리, 들기 버거운 짐 같았던 엄마의 빈자리는 크기만 하다. 자식들도 다 커서 자기들만의 둥지로 날아가 집이 텅 비었다. 제자마저도 그녀의 철학은 죽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탈리에게 속했던 모든 것이 동시에 모래 알갱이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이제 나탈리에게 남은 것은 ‘온전한 자유’다. 나탈리는 새털처럼 가벼워야 할 온전한 자유가 전혀 기쁘지 않다. 오히려 자유는 불청객이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다. 나탈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실 부정은 어디에도 도움이 안 돼. 고정관념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을 뿐.”     

“별일 아니야. 삶이 끝난 것도 아니야.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한바탕 휘청거린 후, 나탈리가 한 말이다. 


100세 시대다. 아무리 둘러봐도 과거와 같은 안정성은 찾을 수 없다. 직업은 물론 가족도 마찬가지다. 한 번 이룬 가족 상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지 않는다. 둘이 살다가도 혼자가 되고, 해로해도 두 사람이 같은 날 죽지 않는다.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암이나 병으로 먼저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혼자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나탈리 말대로 삶이 끝난 게 아니다. 결혼생활이 끝났을 뿐이고,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뿐이다. 다시 말해 혼자 살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      


뉴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공공지식연구소장인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저서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궁극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혼자 사는지가 아니라 혼자 산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라고. 인류의 혼자 살기 실험은 초기 단계이며 혼자 사는 것이 우리 삶과 가족, 공동체 나아가 도시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주장처럼 혼자 사는 것을 문제로만 바라보면 혼자 살기의 긍정적 기능을 간과하는 셈이다. 태양이 진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일 뿐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나탈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일상을 지탱하는 자기장은 사실 그대로다. 가족, 일, 바깥 활동에서 만난 다양한 관계 등 삶의 여러 요소들은 여전히 그녀의 위성이다. 자식이 품을 떠났어도 여전히 자식이고, 제자가 다른 사상의 길을 가더라도 여전히 제자다. 다만, 관계의 밀도가 헐거워져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나탈리는 자유의 바람에 서서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20년 가까이 같이 살던 가족이 나탈리의 품을 떠났을 때, 그녀가 강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상상 탓일지도 모른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낭떠러지에 혼자 서 있을 때 절박한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원치 않는데 혼자가 되는 고통이 치과에 가는 고통과 같진 않겠지만, 치과는 상상이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곳이다. 치과에 가면 ‘무섭고 아프다’라는 고정된 프레임이 있다. 의사를 만나기도 전에 치료 의자에 눕는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료실 천장뿐이다. 벌떡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부르는 드릴과 석션 소리가 진료실에 전체에 울린다. 입안을 헤집는 굉음 소리에 집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쓴다. 그러면 의사가 묻는다. “많이 아프세요?”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못 견딜 정도로 아프지 않은데 상상으로 고통이 과장된다.      


공공기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다 보면 퇴직하신 분, 퇴직을 앞둔 분, 양육이 끝난 분들을 만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다른 삶을 모색하는 분들이다. 20, 30년 동안 일과 가정에만 시간을 쏟았다면 이제 그림, 글쓰기, 노래, 트레킹, 여행, 춤 등을 배우며 전시회도 하고 발표회도 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열심히 탐색하며 자신을 위한 달콤한 시간을 맛본다. 이분들에게서 외롭고 우울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과거에 보낸 시간의 질이 어떻든 시간은 계속 흐른다. 홀로서기를 할 때 두려움의 포로가 될지, 가슴을 활짝 펴고 두 팔 벌려 품에 안을지 고민해볼 문제다. 환영하기로 마음먹으면 다른 세계가 기다린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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