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언저리였다. 술잔을 부딪치며 시끌벅적 떠들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해서 사라졌다. 가끔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SNS를 들여다보았다. 앙증맞은 옷을 입은 아이의 생생한 표정이 담긴 사진, 아이가 손으로 꼼지락거려 그린 그림 사진, 아이가 만든 공작물 사진,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 사진만 볼 수 있었다. 친구 얼굴은커녕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친구 대신 친구 아이가 좋아하는 것, 아이가 그린 그림, 아이의 다양한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행복에서 내 우정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쓸쓸했다. ‘가끔 나 기억나?’ 묻고 싶었지만 느닷없을 거 같아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현생에 흠뻑 빠진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어쩐 일인지 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문득 학교 다닐 때 붙어 다녔던 친구가 그리운 것은 실은 나의 ‘봄날’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파릇파릇해서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던, 그래서 불안했던 ‘내 젊음’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영화 <작은 아씨들>의 감독인 그레타 거윅이 각본을 쓰고 주연한 <프란시스 하>. 프란시스 하는 스물일곱의 수습 무용수로 청춘 열차 탑승객이다. 청춘 열차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채 앞으로 달리기만 한다. 프란시스는 이십 대에게는 위안을 주고, 이십 대를 지나온 비혼에게는 이십대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선사하는 열차이다.
프란시스는 ‘머리만 다른 쌍둥이’ 같은 학창 시절 친구 소피와 함께 산다. 졸업 후에도 변함없는 우정에 기대어 매달 집세와 생활비 걱정도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집에서도, 퇴근 후에도, 휴일에도 같이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대기 중에 있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편하다. 둘이 어깨를 맞대고 한 침대에 누워서 화려한 미래를 꿈꾸곤 한다.
“우리 이야기해 줘.”
“좋아, 프란시스. 우리는 세계를 접수할 거야.”
“넌 출판계에서 먹어주는 거물이 되고.”
“넌 완전 유명한 무용수가 되고 네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내는 거야.”
소피는 출판사에 다니고 프란시스는 무용수를 꿈꾼다. 주머니는 홀쭉하지만 패기는 두둑한 청춘. 청춘은 씨앗의 발아를 기다리며 잔뜩 웅크리는 때이다. 어떤 떡잎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소피의 떡잎은 프란시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자란다. 소피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결정하고 프란시스에게 통보한다.
이제 둘의 우정 1막은 끝나고 2막에 접어든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대화를 나누던 친구는 더는 없다. 소피의 남자친구가 도쿄로 발령이 나서 소피도 같이 떠나는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 프란시스는 절친에게 벌어진 일을 남자친구에게만 말하는데 질투한다. 프란시스는 우정의 모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 소피의 남자친구 앞에서 자기도 가족이 되고 싶다며 떼를 쓸 정도이다.
일도 잘 안 풀린다. 무용수가 되고 싶은데 무용단 사무직 자리를 제안받는다. 무용수로 받아줄 곳이 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사무직을 거절한다. 그러고는 모교에서 행사도우미를 하며 수습 무용수로 지낸다. 이 생활에 언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른 채. 봄볕은 프란시스의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찬란하게 빛난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캐럴라인 냅은 《명랑한 은둔자》에서 결혼이나 가족처럼 제도화된 관계는 사회적 지지를 받지만 우정에는 규칙도 없고,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우정 상담소’를 찾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니 가족 상담소, 직업상담소 등은 있는데 우정 상담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친구를 꼽으면서 말이다. 우정도 흔들리고 마모되고 소멸한다. 그러다 소생하고 새로 태어난다. 이 사실을 차츰 받아들이게 된다.
이십 대를 돌이켜 보면 프란시스처럼 내가 피우고 가꿀 수 있는 꽃이 무엇인지 몰라서 갈팡질팡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느라 친구들보다 늦게 직장생활을 했던 터라 ‘나의 쓸모’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거리에서 나만 흑백 시대에 머무는 것 같아서 조급했다. 친구들이 차례로 청첩장을 내밀 때마다 축하를 건네면서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이제 누구랑 술 마시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누구랑 노나. 이런 질문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지워졌지만 말이다. 우정이 8할이었던 학창 시절과 달리 어른 세계에서 우정은 사랑처럼 움직이는 것을 차츰 인정하게 된다.
일찌감치 자기 길을 찾아가는 소피와 달리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거리를 달리는 프란시스에게 내 이십 대를 대입하고는 프란시스를 힘껏 응원한다. 프란시스는 무엇이든 꿈꿀 수 있지만, 아무것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학창 시절의 순도 높은 우정에 대한 환상에서 깰 것이고, 새로운 모양의 우정에 길들 것이다. 단짝 소피를 향해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도 잦아들고, 이따금 안부를 나누며 소피 곁에 남편과 아이가 있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길을 찾아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길이 아니면 되돌아오더라도.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 마시며 이야기하고, 첫 지하철이 다닐 때 집에 오곤 했던 적이 있어요.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이제 그 친구들과 연락도 안 할 줄 몰랐어요. 다들 잘살고 있겠죠?”
C가 탄식에 가까운 말한 적이 있다. C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C와 내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친구들인지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내 이십 대인지 모호했다. 우정이 우선순위였던 시간은 ‘화양연화’였다. 사회적 의무와 책임은 상대적으로 헐겁고 잠재된 가능성은 크고, 터무니없는 권리를 주장해도 이해받았으니까.
졸업은 매일 뭉쳤던 친구들과 거리 두기를 배우는 출발점이다. 신입 사원으로 살아남으려면 친구들은 잠시 서랍에 넣어두었다. 겉에서 보면 ‘직장인’이란 말로 비슷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저마다 다른 길을 걷는다. 일상에 점점 매몰되고,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가 지나간다. 크고 작은 사건을 겪고 그 흔적이 고유한 개성으로 새겨진다. 프란시스는 싱글로, 소피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나와 내 단짝도 그랬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공유하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공통점도 줄어든다. 대신 환경과 나이에 맞추어 적응한 사회인이 된다.
대학 때 단짝을 2023년 연말에 만났다. 코로나로 거리 두기 탓도 있지만 인생의 항로가 완전히 달라진 터라 카톡으로 가끔 안부 메시지만 주고받았다.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거리에 사는데 먼저 만나자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은 채. ‘한번 보자!’라고 말하는 데 5년이 걸렸다.
마주 앉아서 그동안 근황을 압축해서 나누며 깨닫는다. ‘아, 이래서 내 친구였구나.’ 중요한 사건과 고민 앞에 섰을 때 취하는 태도에서 친구를 다시 찾는다.
홀로 사는 비혼 친구들과도 생활이 달라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믿으며 대체로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짧게는 몇 달에 한 번씩 길게는 몇 년에 한 번씩, 침묵의 문을 두드린다. 그동안 겪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른다. 관계의 농도는 옅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친구이다. 나도 모르는 나를 친구가 안다. 친구가 모르는 친구를,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