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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하나님이랑 같이 가는데, 왜 안 순탄하죠?

분명 하나님이랑 같이 있는데 뭐 하나 순탄한 게 없다


“No! why? why three? I pay six! 

(아니, 왜 3개월만 주는 거예요? 나는 6개월을 등록했는데!)”      


발걸음도 당당하게 떠난 어학연수.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위기에 처했다. 환승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나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심사관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물론, 완전 콩글리시로.     






이 모든 난장판 15시간 전. 나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부모님과 평화롭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목적지는 캐나다. 어학연수를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기 전 기도하며 알아볼 때, 주변에서 캐나다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각보다 춥지 않고, 필요한 서류만 잘 준비해 가면 학원 등록 기간에 맞춰 넉넉하게 체류 기간이 나오니 공부하고 잠깐 여행하다 들어오기 딱 좋다고. 설명대로라면 6개월 정도 현지 어학원에서 말을 배우고 틈틈이 여행도 하고 싶었던 내게 딱 맞는 나라였다.    

  

공항에서 마지막 수속을 밟고 탑승하러 들어가기 전, 부모님은 내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해주셨다. 


“꼭, 뭐든 꼭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야 한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걸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자식을 보내게 된 부모님은 기도로 나를 하나님 손에 맡겼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 손을 붙잡고 길을 나섰다.      






생애 첫 장거리 비행 끝에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입국 심사를 통해 학생 비자 체류 기간을 받고, 빅토리아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만 하면 된다. 빅토리아에서 3개월, 밴쿠버에서 3개월씩 어학원을 다니기로 했기 때문에 우선 밴쿠버 공항에서 비자를 받은 뒤 환승해서 빅토리아로 들어가야 했다.     


비행기 환승까지 2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원래 더 넉넉했던 것 같은데, 인천공항에서 2시간 정도 출발 지연이 발생하면서 환승 시간이 확 줄어버렸다. 그래도 환승에는 크게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비행기로 갈아타기만 하면 되는 건데 뭐가 어렵겠나? 비자도 뭐, 30분이면 되겠지? 


지금이야, 자동심사도 없고 상호 무비자 협정도 드물던 그 당시 기준으로 비자 심사 후 환승까지 하기에 두 시간 반이 빠듯하다는 걸 알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나는 비행기 환승 한 번 해본 적 없는 여행 초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 가볍게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외국인 전용 입국심사 줄에 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줄이 끝도 없이 길었다. 1시간, 1시간 반, 2시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봐도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더뎠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     

 

내내 마음 졸이며 하나님을 불렀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줄 서다가 다 지나간 2시간 반.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놓쳤다.    

  

‘......비행기를 놓쳤다고? 내가 지금 비행기를 놓쳤어?’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건 영화에나 나오는 일 아닌가요?    

 


한편으로 잔뜩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제때 도착했는데, 여기 입국 심사하는 사람들 일 처리가 늦어서 나를 늦게 만들었다고. 지금이야 그건 내 사정이고 입국 심사관이 내 스케줄을 배려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표를 사야 한다는 걸 (심지어 그래도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때는 진짜 충격이었다.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나님, 저 방금 비행기 놓쳤어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럼, 저 빅토리아 어떻게 가요? 내일 가요? 오늘 밤엔 어디서 자구요? 저 여기 아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영어도 못 하는데요? 새 비행기 표 살 돈은 어떻게 해요?’     


당황스럽고 급하니 잠시 침착하게 고민해보거나 뭐라도 방법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온갖 걱정과 우려를 실시간으로 다다다다 하나님을 향해 날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곧 마음이 괜찮아지는 게 아닌가?      


비행기 놓칠까 봐 끙끙대며 속을 앓고, 진짜 놓쳤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는데. 어느새 마음이 놀라울 만큼 괜찮았다. 근심스럽다거나, 마음이 우울하게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냥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심지어 웃음도 나왔다. ‘몰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며 허허 웃고 있더라.    

  





그렇게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정신 놓고 한참을 줄에 실려 다니다가 겨우 입국 심사 테이블에 닿았다. 입국 심사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니, 뭔가를 달라고 했다. 정확히 뭘 달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가지고 있는 서류를 몽땅 주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심사관이 “빅토리아에 3달, 밴쿠버에 3달 있을 거라고?” 물었다. 냉큼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서류 한 장을 들이밀며 “그런데 왜 빅토리아에 있다는 학원 인보이스가 밴쿠버 주소야?”라고 했다.      


그건 유학원에서 준 서류였는데, 내가 등록한 빅토리아 어학원에 학원비를 내면서 받은 인보이스였다. 온통 영어로 쓰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 주소가 밴쿠버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국 심사관이 아무리 물어봐도 나도 영문을 몰랐다. 영어가 빽빽이 쓰여 있는 그 서류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읽었어도 죄다 영어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아니, 나는 그냥 돈 내고 받은 서류를 들고 왔을 뿐인데요?     


해당 학원은 캐나다 전국에 체인이 있었다. 아무래도 밴쿠버가 빅토리아보다 훨씬 큰 도시이니, 어쩌면 밴쿠버 학원에서 빅토리아 학원의 행정 업무 일부를 처리하며 나온 서류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내 인보이스도 그런 식으로 처리된 것 같았는데, 그런 사정을 내가 영어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걸 할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비행기 타고 와서 이 긴 줄에 3시간이나 땀 뻘뻘 흘리며 서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입국심사관님?     


나는 아는 영어를 총동원한 콩글리시에 진솔한 표정, 다급한 손짓 발짓까지 하며 최대한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심사관은 냉정하게 3개월만 인정된다며 3개월 입국 비자를 발급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난 이미 6개월 치 학원비를 냈어요! 서류는 유학원에서 준 걸 그대로 들고 온 건데 3개월만 주면 어떻게 해요?”      


......라고 조목조목 짚어 따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Why three? I pay six!” 같은 어설프고 서툰 문장뿐이었다.      



어떻게든 말을 해보려는 내 얼굴이 너무 간절(혹은 억울)했을까. 심사관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럼 들어가서 연장하든가.”    

  

그리곤 바로 내 다음 사람을 불렀다. 신기하게도 그 말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입국심사관에게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다음 사람이 벌써 앞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나만큼 오래 줄을 섰을 남자는 아직도 테이블을 떠날 줄 모르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곧 심사관에게 자기 서류를 내밀었다. 억울함에 입이 한껏 벌어졌지만,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얼굴로 심사실을 나섰다. 3개월 달랑 찍힌 비자를 들고.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빅토리아로 가는 다음 비행기를 알아보러 환승 카운터에 갔더니, 직원이 다시 한번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비행기 놓쳤구나? 괜찮아. 연결편 또 있을 거야. 빅토리아라. 그거 오늘 아직 한 대 남았을 거 같은데...... 어디 보자. 어? 마지막 비행기가 곧 출발하겠는데? 얼마 안 남았어! 이거 놓치면 너 내일 가야 해!”     


뭐라고요? 나는 제대로 놀랄 틈도 없이 국내선 게이트로 전력 질주했다. 70kg에 달하는 짐수레를 미친 듯이 밀며 환승 게이트로 달렸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항공사 직원들이 어서 서두르라며 나를 더 재촉했다. 


“이러다 놓쳐! 빨리 뛰어!” 


으아아아아! 이미 빠르게 달리고 있는 다리를 더 힘차게 휘저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린 끝에 간신히 탑승장에 닿았다.      


“헉, 빅토, 빅토리,아. 헉헉, 빅토리, 아요! 헉.”  

    

다행히 아직 게이트가 닫히지 않았다.  

    

“어! 여기 마지막 손님 왔어요!” 

“얼른 태워!” 

“여기 수화물이요!”     


기다리고 있던 승무원들에게 급히 수화물을 넘기고 헐떡이며 탑승구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렇게 겨우 마지막 비행기를 잡아탔다.   





   

와. 정신없어. 비행기에 타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세상에. 여행이 이렇게 힘든 거라니. 하나님, 이거 너무 힘든데요.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죽을 거 같아요....... 목적지에 도착도 못 했는데, 이미 일주일 치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거 같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길 얼마간. 내가 넋이 나가든 말든 비행기는 잘만 날았고, 나는 곧 빅토리아 공항에 내렸다. 공항은 아담했다. 내리는 손님도 많지 않았고, 공항도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정신없는 상황을 헤매다 와서일까, 그 조용함이 자못 마음에 들었다. 정신이 조금 깨는 것 같았다. 새파란 하늘이 끝없이 높았고 공기는 쨍 소리가 날 것처럼 청량했다. 빅토리아의 첫인상이 좋았다. 출국장에 마중 나온 홈스테이 아주머니도 만났다. 이제 안심이다. 무사히 도착했다. ‘자, 여기가 네 목적지야. 잘 왔어!’ 하는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슬슬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짐만 찾으면 된다.    

 

그리고 방심이 너무 일렀다. 처음부터 좌충우돌 난리였던 여행길이 그렇게 쉽게 끝날 리 없지. 이번엔 짐이 안 나왔다. 수화물 분실이었다. 6개월간 캐나다에서 알뜰살뜰 살아보겠다고 이것저것 잔뜩 쑤셔 넣었던 이민 가방 두 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 공항을 찾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와 아주머니만 남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컨베이어 벨트에 더 올라오는 짐이 없었다. 아니, 분명히 승무원들이 내 짐을 받아 갔는데, 왜 없지? 수화물이 사라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다. 정신이 탈탈 털려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다.      


‘하나님, 어떻게 이래요? 어떻게 뭐 하나 쉬운 게 없어요? 아니, 하나님이랑 같이 가는 거면 좀 순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그런 상황에서 내가 계속 웃고 있었다는 거다. 아니 어이없어 죽겠는데 뭐가 좋아서 웃어. 나도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머리로는 상황이 어처구니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고 즐겁더라.       


오늘 자 마지막 비행기의 손님이 모두 떠난 뒤, 가장 마지막으로 공항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가장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캐나다와 첫 만남이다.     


파란 하늘이 까마득하게 높았다. 채도 높은 햇살 위로 쨍하고 소리가 날 것 같은 새파란 하늘이다. 공기가 반짝거렸다. 누군가의 애정이 담뿍 묻어 있는 바람이 나를 부드럽게 쓸고 가자,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갑고 청량한 공기에 속이 시원해진다.     


그래, 괜찮을 것 같아. 응, 분명히 괜찮을 거야. 

    

분명 너덜너덜한 꼴이었지만, 아주 피곤했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활짝 웃어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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