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지쳤구나, 나와 여행가지 않을래?
하나님은 종종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들을 엮어서 큰 그림을 그리신다. 그저 눈앞에 있는, 맘에 드는 선택지를 고른 거 같은데, 나중에 보면 그 모든 순간이 사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에 놀라게 된다. 참 신비롭고 기분 좋은 일이다.
내 긴 여행의 시작도 그랬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평소처럼 선택지를 골랐다. 그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 10년’의 인트로 같은 거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얘, 너 많이 지쳤구나. 나랑 여행 가지 않을래?’
의미 없이 바쁘고 끝없이 소진 시키는 일상에서 하나님은 나를 끄집어내셨다. 비록 당시의 나는 그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바쁘고 정신없던 날. 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대학 교정에는 여름 방학을 앞둔 설렘과 활기가 가득했다. 흘깃 쳐다본 게시판에는 “14박 15일 유럽 호텔팩”, “유럽 일주 배낭여행”, “실크로드 원정대 모집” 같은 홍보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기 중에 여름 방학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일부러 할 만큼 좋아하지도 않았고,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도 딱히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나는 좀 무기력한 상태였다. 야심차게 시작한 복수전공 학점은 엉망이고, 몇 달 동안 애써가며 준비한 공모전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영어는 해도 해도 늘지 않았고, 이것저것 잔뜩 벌여놓은 일 때문에 하루 일정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나름 열심히 산 거 같은데 딱히 성과는 없고, 오히려 실패만 쌓인다. 나는 점점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이리저리 실수하고 사고 쳐대는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왜 못해내지? 왜 하나를 제대로 못 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원망하고 후려쳤다. 정확히 뭐가 힘든 건지도 모르면서 동시에 뭐든 힘들었고, 그저 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속 편하게 여행이라니. 그런 데 쓸 시간에 대외 활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나라도 더 하고, 책 한 권을 더 읽는 게 생산적이지. 나는 퍽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북경에 교환 학생으로 가 있던 고등학교 친구의 연락을 받은 건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 건물을 막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 다 같이 항저우에서 만나기로 했어! 너도 와!”
당시 주변에 중국어를 전공하고 중국으로 유학이나 교환학생, 어학연수 가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가장 친한 친구 넷이 같은 기간 그렇게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날 연락한 친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별생각 없이 받았던 그 연락. 그게 매일 비슷비슷했던 내 일상에 일어나게 될 변화의 시작임을 그때는 몰랐다.
친구는 나를 중국으로 불렀다. 중국에 있는 친구 넷이 방학을 맞아 모이기로 했으니 나도 와서 같이 놀자는 것. 솔직히, 당시 나는 중국이라는 여행지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가서 뭘 해? 친구들이 오라고 하는 ‘항저우’가 어딘지도 몰랐다. 다만 친구들은 만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교회에서 내내 붙어 있던 친구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게 그동안 많이 서운했는데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솔깃했다.
음, 그래도 여행은 돈도 많이 들고, 여기서 할 일도 많은데......
망설이던 내 등을 떠밀어준 건 부모님이었다. 잔뜩 날카로워져서 매일 새벽에 나가고 새벽에 들어오는 모습을 걱정스러워하셨는데, 친구들과 여행 갈 기회가 생겼다니 잘됐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좋은 기회라며, 친구들과 함께하길 권하셨다.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시더라.
부모님의 허락과 응원을 힘입어 못 이기는 척 중국행을 결정했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보호자 없는 여행이었다. 대사관을 찾아가 비자를 받는 것도, 혼자 비행기에 오르는 것도, 보호자 없이 외국 길을 거니는 것도, 낯선 곳에서 외국어를 더듬거리며 혼자 길을 찾는 것도 다 처음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상하이 푸동 공항에 내렸다. 중국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고, 영어도 ‘헬로, 나이스 투 밋츄’ 겨우 하는데 세상에, 표지판이 뭐가 그리 많은지. 낯설고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당황으로 허둥거렸다.
어찌어찌 공항은 빠져나왔지만, 그 뒤가 또 문제였다. 물어물어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는데, 거기 있는 건 내가 익히 한국에서 타던 것 같은 버스가 아니었다. 간판 없는 셔틀버스, 다인승 승합차 같은 게 잔뜩 서 있었다. 번호도 없고 글자도 없는 차들이 버스라고? 어쩔 줄 모르고 멈칫거리다가 근처에 모여 있던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겨우 한 차에 올라탔다. 차에는 아무 표시가 없다. ‘내가 제대로 탄 걸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 혼자 있으니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온갖 것이 다 불안했다. 이대로 국제 미아가 되는 건 아니겠지? 고작 버스 하나 타는 것뿐인데 어찌나 무섭던지. 차가 달리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자연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막막하고 무서우니 저도 모르게 기도가 튀어나왔다.
‘하나님, 이거 모르겠어요.’
‘하나님, 저게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 저 긴장되고 무서워요.’
‘주님, 이건 어떻게 해야 하죠?’
‘하나님,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세요.’
잔뜩 긴장한 채로, 나는 계속 하나님을 불렀다. 다행히 버스는 날 제대로 된 곳에 내려주었고, 마중 나온 친구도 무사히 만났다. 버스에서 내려 친구를 따라가면서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됐다. 생에 첫 자유 여행이었다. 그전까지 내 여행 경험은 그저 관광지를 돌아보는 패키지여행이 전부였다. 잠깐 들러서 사진 찍고, 다시 바쁘게 이동하는, 신기하지만 돌아서면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것.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함께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유적지부터 동네 시장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중국어를 배운 친구들과 함께 다니니 볼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돈도 덜 들었다. 나는 좀 더 오래 보고, 마음껏 생각하고, 많이 물어보며 여행을 즐겼다. 자연히 여행의 깊이가 깊어졌다.
여행하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아,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였다. 경직된 이미지로만 이해하던 외국의 낯선 땅에도 내가 살던 곳과 똑같이 장사하고, 학교에 가고, 장을 보고, 아이를 키우고, 식사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도 분명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하나하나 특별하게 만드신 사람들이겠지.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익숙한 사람들이 신기했고, 비슷한 듯 다른 삶이 흥미로웠다. 머릿속에서 언제나 회색빛이었던 세계 지도가 수채화 물감 번져가듯 조금씩 색을 입었다. 비로소 배낭여행을 떠나겠다고 들떠있던 동기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이 이런 거라면,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면 온 방학을 다 쏟아부어 낯선 땅을 돌아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으리라.
인상 깊었던 점은 또 있었다. 바로 친구들이다. 어릴 때부터 같이 교회 마당 뛰어다니며 놀던 애들이, 나는 그렇게 떨며 겨우 도착한 곳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다들 낯선 말을 배워 쓰고, 공부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나고 자란 모국의 생각법 위에 또 다른 나라의 그것을 잘 조화시키며 성장하는 그 거침없는 모습이,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서툴지만 열심히 살아 나간 흔적들이 눈부셨다. 친구들은 잘 못 느끼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나는 그들이 훌쩍 성장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네에서 같이 군것질하고 깔깔거리던 친구들이 어느새 성큼성큼 앞으로 뛰어나간다. 그걸 보며 하나님께서 참 다양한 방법,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을 키우신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나도 저렇게 성장하고 싶다는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저도 이런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여행을, 낯선 땅에서의 삶을 경험하고 싶었다.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러면 지금의 정체되고 답답한 모습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바라고 발버둥 치며 가지려 했던 ‘성장’이 거기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고 일 년 후, 나는 졸업 전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휴학계를 냈다. 6개월 계획의 어학연수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6개월로 정한 데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1년은 너무 긴 것 같고 3개월은 너무 짧은 것 같아서였다.
그동안 했던 수많은 활동이나 계획과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결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나도 놀라고, 주변 사람들도 놀랄 만큼 확신에 차서 결정했다. 비용 걱정, 취직 걱정 같은 게 발길을 붙잡을 만도 한데, 신기할 만큼 단호하게 어학연수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여행길에 올랐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비록 그 순간에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