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다고 열심히 사는 거 아니고 열심히 산다고 성공하는 거 아니다
하나님과의 여행을 시작하기 전.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정말 바빴다.
새벽에는 영어 학원, 낮에는 학교에서 복수 전공, 저녁엔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공강 시간이면 학보사 취재를 가거나 원고를 작성했고, 짬을 내어 외국인 유학생을 돕는 교내 활동도 했다. 주말이면 봉사 활동이나 각종 대외 활동이 온오프라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고, 주일엔 성가대나 찬양팀, 주일학교 교사 봉사, 청년부 모임 등으로 교회에 살다시피 했다.
새벽에 나갔다 새벽에 들어오길 반복하는 내 모습에, 부모님은 ‘자식이 아니라 집에서 잠만 자는 하숙생 같다’고 혀를 내두르셨다. 열심과 노력으로 삶의 점수를 매긴다면, 당시 내 점수는 꽤 고득점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칠 만큼 달리고 달렸는데도 나는 늘 무언가 부족한 사람 같았다. 열심히 살아도 특별히 성과가 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은 따라잡기 힘들만큼 너무 빨리 뛰어나갔다. 원인 모를 조바심과 초조감에 불안했다. 그게 무엇이든,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미 꽉 찬 일정에 꾸역꾸역 해야 할 일을 계속 더했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으면 그냥 잠을 줄였다. 하루에 적게 자면 한 시간, 많이 자면 네 시간 정도를 잤다.
당연히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는 삶을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꾸려나갈 수 없었다. 곧 삶의 이곳저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내내 졸다 헤어지고, 지하철에서는 서서 자다 무릎이 꺾여 넘어졌다.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을 놓치는 일은 너무 흔했다.
균열은 점점 커졌다. 신경이 날카롭게 서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굴었다. 비정상적으로 꾸역꾸역 추가되던 여러 일정이 결국 엉망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좋은 관계를 맺으며 봉사하러 가던 곳이 있었는데 어느 날 도망치듯 그만둬 버렸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그냥 그만두겠다는 전화만 한 통 한 뒤 도망쳤다. 그런 한심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 그러고 있었다. 미안하고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대외 활동으로 어떤 공연의 홍보 초대권 발행을 도운 적이 있었는데, 주말 공연 홍보를 위해 매주 주중에 미리 초대권 이벤트를 열고 참가자를 선정해야 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이를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공연 시작 몇 시간 전! 급히 지인들에게 초대석 자리를 채워달라고 사정사정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실수가 반복됐다. 결국 나는 쫓겨나듯 그 일을 그만두었다. 미안하고, 창피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저 내가 잘살고 있는 줄 알았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어쨌든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날도 일정이 가득한 날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가방까지 멨으니 이제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기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서 가만히 시계를 바라봤다.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단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꾸준히 움직이던 시곗바늘이 결국 ‘지금 나가도 도저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는 시간’을 넘어간 뒤에야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늦었네. 지금 나가봐야 제때 못 갈 테니 오늘은 그냥 가지 말자”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한동안 그런 일이 반복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확실히 무리하고 있었다. 온갖 것을 다 하려고 드니 결국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나는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다. 그저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게, 더 노력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면, 모든 걸 쏟아부어 최선을 다하면, 힘든 걸 견디면, 그러면 결국 남들이 말하는 행복에 닿을 줄 알았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녀놓고도 나는 여전히 그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맹목, 또는 판타지에 가까운 이상한 착각이었다. 왜 뛰어야 하는지, 어디로 뛰고 있는 건지, 정말 그게 나한테 이로운지 차분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초조하고 불안해서 남들이 뛰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달렸을 뿐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지도 잘 모르는 ‘이상적인 모습’에 나를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형체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무작정 따라가려니 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심적 기저에는 언제나 옅은 불안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 불안을 다시 ‘열심’으로 덮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피곤하기만 했지만, 바쁘게 살고 있으니 잘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건 내가 최소한 기도는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기도는 많이 어렸다. 그저 힘들다고 토로하다가 ‘A를 해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B를 가지고 싶어요’ 같은 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은 나의 부족함이나 어리석음을 뛰어넘어 일하셨다. 그걸 알기까지는 꽤 오랜 여행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있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주일학교, 성가대, 성경 학교를 거처 제자 훈련을 받고 찬양팀을 하며 주일학교 교사가 되기까지. 교회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늘 교회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오롯이 만나고 느끼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해 지식으로는 배웠지만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히만 알았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사실 나는 늘 내 노력으로 삶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려 버둥거렸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내게는 하나님을 제대로 느끼고, 기다리고, 신뢰하며 합을 맞추는 훈련이 필요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함께 보낼 시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방향도 모르면서 혼자 정신없이 가속 버튼을 밟아대다가 하얗게 타버릴 거 같았다.
감사하게도 상냥하신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셨다. 그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불안과 피로의 쳇바퀴 속에서 괴로워하는 나를 한 번에 끄집어내신 뒤 상상도 못 해본 새로운 길 위에 훌쩍 올려 두셨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