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이벤트에 진심인 하나님
첫 인턴십 도전을 아쉽게 마무리한 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빅토리아의 한 뮤지엄에 자원봉사 지원을 한 것이다.
내가 지원했던 뮤지엄은 따로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지 않고, 오직 기부금과 입장료 등의 수익금만으로 내부를 복원하고, 박물관을 운영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 운영에 자원봉사자를 많이 활용하는 편이었는데, 선발된 자원봉사자들은 일정 기간 훈련을 받고 성의 역사와 유물을 안내하는 도센트(Docent)나 입장료를 받고 성의 기본 안내를 담당하는 캐셔(Casher) 등으로 활동했다.
당시 나는 말을 배우고 능숙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시도하고 있었는데, 자원봉사도 그중 하나였다. 여러 사람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언어도 문화적 이해도 늘어날 것이라 생각해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던 중 성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지원하기까지 며칠을 망설였다. 호기롭게 도전했던 인턴쉽을 씁쓸히 마무리한 게 얼마 전이라 조금 주눅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도센트도 캐셔도 관광객들을 응대하고 성의 유물과 역사를 설명하는 포지션이라 영어를 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어서 지원하는 어학연수 학생을 과연 뽑아줄까?
‘하나님, 이 사람들이 저를 뽑아줄까요? 여기서도 민폐를 끼치면 어쩌죠?’
나는 속으로 하나님께 몇 번이나 물었다. ‘저 여기 써도 될까요, 하나님?’ 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 거기 써라”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거나 갑자기 벽에 글자가 나타나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기도하고 고민하는 사이, 내 마음은 천천히 ‘지원하자!’로 기울어갔다.
그렇게 보낸 지원 이메일. 다행히 며칠 뒤 인터뷰를 보자는 답장이 왔다. 인터뷰는 성의 2층 스태프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직원 한 명과 1:1로 봤는데, 생각보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대화하듯 진행됐다. 영어가 완벽해야만 뽑힐 수 있을 거란 내 걱정은 사실이 아니었다. 현지인처럼 말하지 못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영어를 구사한다면 외국인 학생들도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었다.
몇 번의 교육을 마치고, 나는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일은 매우 흥미로웠고, 같이 일하는 직원과 봉사자들 모두 친절하고 밝았다. 공부하고 외워야 할 것도 많고, 따로 돈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정말 즐겁게, 그리고 감사하며 일했다. 새로 배우는 모든 일이 재밌었고, 성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그렇게 도센트 업무를 시작으로 캐셔 업무와 기프트샵 업무까지 모두 익혀나갔다.
성에 일하러 오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작은 입구를 열고 들어온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캐셔 포지션도 재밌었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실망한 기색이던 관광객들의 시선을 천장으로 끌어올려 감탄하게 만드는 도센트 역할도 즐거웠다. 관람 코스 끝 기념품점에서 관광을 마친 사람들의 흥분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는 것도 기뻤다. 이렇게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주시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자들의 게시판 역할을 하는 팬트리 냉장고에 직원을 뽑는다는 공지가 붙었다. 곧 여름이라 손님이 훨씬 많아질 테니 미리 여름 시즌 직원을 한 명 더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공지를 그냥 흘려 넘겼다. 뽑힐 직원이 부럽긴 했지만, 영어도 부족한 외국인 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측에서도 당연히 영어가 능숙한 현지인을 원하겠지. 여기 원어민 대학생 봉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평소처럼 일하다 조금 한가해진 시간, 자원봉사자 지원 당시 내 인터뷰를 맡았던 니콜이 다가와 따로 말을 걸었다.
“이번에 새로 직원 뽑는 거 알지? 우리는 네가 일해주면 좋겠는데, 혹시 생각 있니?”
......나?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른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직원이 되라니? 처음에는 그저 얼떨떨했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엄청 기뻤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온 거 같았고,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단순히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뭐 하나 신기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첫 번째. 우선 나는 그 포지션에 지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모집 요강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뽑힐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결국 기회가 내게 돌아왔다. 그것도 ‘지원해 봐’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널 뽑고 싶어’라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두 번째. 전혀 몰랐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모집 요건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갖춰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전혀 미리 계획하거나 한 게 아니었다.
성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자원봉사자는 도센트나 캐셔, 기념품점 보조 중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자리마다 업무 차이가 많이 나고 숙지해야 하는 내용도 달라서 한 가지를 골라 포지션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도센트라면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가득 들어찬 유물이나 성의 역사에 대해 외우고, 캐셔라면 다양한 결제 수단을 소화하고 입구에서 손님의 흐름을 조절하는 스킬에 집중한다. 외국인 캐셔라면 자국과 다른 캐나다 화폐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기념품점 보조 업무를 하는 경우 창고의 재고 위치와, 상점 내 다양한 상품군, 가격을 외우는 식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왔다는 웬 특이한 봉사자 한 명이 세 개 포지션 업무가 다 재밌어 보인다며 온 성을 쏘다닌 거다. 그리고 정말 세 개의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성에 갑자기 관광객이 몰려 바빠지거나 어떤 포지션을 맡았던 사람에게 사정이 생겼을 때, 어디든 바로 투입돼서 일할 수 있는 ‘직원 같은’ 봉사자가 하나 생겼다. 그게 바로 나였는데 그걸 나만 몰랐다. 나는 그냥 흥미를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위의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쳐도 아주 커다란 마지막 장애물이 하나 남는다. 이 때문에 그동안 외국인들이 고용되는 일이 적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외국인은 고용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 근본적인 문제, 바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다. 그런데 세상에, 내가 그걸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는가? 밴쿠버 공항에서 만난 입국심사관이 날 대차게 까준 덕분에 입국 후 재신청했던 그 비자 말이다. 공부하면서 일하는 것도 가능한 아주 긴 비자. 내가 그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박물관 운영국 입장에서는 내가 꽤 매력적인 선택지였던 셈이다. 여기저기 공고하고, 지원받아서 인터뷰 보고, 그렇게 뽑은 직원을 다시 훈련하는 등의 번거로움 없이 바로 뽑아서 바로 쓸 수 있는, 검증된 즉시 인력이 이미 성안을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비자 문제도 알아서 잘 해결해 둔 상태로. 그렇게 나는 정식으로 고용계약을 맺었고 자원봉사로 하던 일을 돈을 받으며 하게 됐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대체 하나님은 몇 수 앞을 보시는 건가? 비자 문제로 고생할 때, 남들은 다들 쉽게 쉽게 받는 걸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게 하시냐고 원망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직원이 된 뒤 자연스럽게 성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유물 공부도 더 진지하게 했다. 덕분에 성의 여기저기서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간을 잔뜩 보낼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새로운 기적을 마음껏 즐겼다.
종종 성의 1층 드로잉 룸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거의 성만큼 나이가 오래된 스타인웨이앤손 피아노였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1층 드로잉 룸 한 가운데에 자리해서 당시 여기서 예술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물품 중 하나였다. 내가 피아노를 조금 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박물관 측에서 가끔 이 피아노 쳐보는 걸 허락해줬는데, 피아노를 치러 들어갈 때면 동료 직원들이 그 구역의 보안을 잠시 해지해서 전시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피아노 앞에 앉아서 나는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잔잔한 찬송 곡을 쳤다. 사실 그나마 연주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악보를 펴놓고 쳤다. 연주할 때면 1층 전시실을 돌던 관광객 중 몇은 옆에 가만히 서서 음악을 들으며 공간을 감상했다. 오래전 이 공간에서도 누군가가 피아노를 쳤을 거고, 누군가는 차를 마시며 담소하거나 한쪽에서 편히 쉬었을 것이다. 많이 부족한 연주였겠지만, 미약하나마 성을 찾은 관광객들이 그런 평화롭고 나른한 오후를 같이 느껴보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싶어 기쁘고 뿌듯했다.
성에서 일하는 동안 당연히 영어도 많이 늘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대했고 수많은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말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그때의 내 영어 실력이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능숙하고 유창했을 거다. 그 외에도 다른 자원봉사자들을 돕거나 교육하기도 했고, 특별 시즌마다 벌어지는 이벤트들(연극제, 성탄절 특별 음악회, 스코틀랜드 전통 행사 등)도 마음껏 즐겼다.
재밌게 노는 거 같은데 친구도 생기고, 영어도 늘고, 거기다 돈까지 벌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이 기적은 내 삶을 한 번 더 크게 확장시켰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하게 되는 경험의 종류와 질도 늘었다. 벌어지는 일이 너무 신기하고 꿈같아서 종종 말도 못 하게 행복해졌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또 한 번 배웠다.
하나님은 내 생각, 내 계획보다 언제나 더 크시구나!
나보다 훨씬 먼저 움직이시고, 내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미리 보고 계획하신다. 그리고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신다.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작은 조각들이 하나님의 안에서 어느 순간 커다랗고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여기서 더 대단한 건, 그런 하나님이 내게 대단히 호의적이셔서 그 모든 일하심을 통해 나한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거다.
“예수, 예수, 아름다운 주. 주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드셨네”라는 찬송이 절로 떠올랐다.
하나님은 정말로 내 여행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