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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네 속도대로 해도 괜찮아

치타처럼은 못 뛰지만, 시츄에게는 시츄의 속도가 있다. 


여름. 빅토리아의 유동 인구는 관광객 덕분에 몇 배로 늘어났다. 내가 일하던 곳에도 관람객이 무섭게 몰려들었다. 일반 입장객에 크루즈 단체 손님들까지. 쉴 새 없이 들어온다. 이럴 때 성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아무래도 성 입구에서 매표소와 안내 데스크 역할을 하는 캐셔(Casher)다.     


캐셔 일은 어렵진 않은데 정신이 없다. 주된 업무는 입장료 결제와 언어별 안내 자료 배포, 오디오 투어 기기 대여, 그리고 관광객들의 질문에 응대하기 등이다. 그 외에도 관광객들이 건물 안으로 입장하기 전에 슈 클리너(Shoe Cleaner)를 사용하게 하거나, 주고받은 동전이나 거스름돈이 정말 캐나다 동전인지 확인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중간중간, 많이 나간 안내 자료는 정리해서 다시 채워 두고, 택시 호출을 요청하는 손님을 위해 콜택시를 부르는 일도 한다. 무엇보다 손님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이 모든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다.     


자, 그러면 밀려오는 여름 성수기 관광객들을 응대하는 캐셔는 몇 명이나 될까? 셋? 다섯? 안타깝게도 그것보다 훨씬 적다. 줄 서 있는 사람이 열 명이건 천 명이건, 성수기 비성수기 가리지 않고 캐셔는 언제나 한 명이다. 딱 한 명.      


이는 사실 뮤지엄 자체의 공간 문제 때문이다. 캐셔 카운터는 성의 주 출입구와 메인 홀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인데, 평범한 집으로 치면 현관문과 중문 사이에 있는 신발장 한쪽 공간에 테이블을 두고 손님을 받는 식이다. 워낙 공간이 좁다 보니 매표소를 한 곳 밖에 둘 수 없어서, 손님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캐셔는 언제나 한 명이다.      






여름 햇빛이 엄청 쨍하던 어느 날, 나는 캐셔 자리에 서 있었다. 성수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관람객이 몰아닥친 날이었다. 당시 자원봉사자에서 직원으로 전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렇게 많은 손님을 받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원봉사 기간도 있었고, 그동안 업무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갑자기 늘어난 손님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약간 압도되었다고 할까?     


사람들은 계속 말을 걸었고, 눈앞에 전 세계의 카드가 다 들이밀어졌다. 정신없이 계산하고 안내하는데도 줄은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줄이 계속 길다는 걸 인식하자 문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하고 손은 바쁜데, 그날따라 슈 클리너를 사용하기 전에 메인 홀로 돌진하는 손님들도 너무 많았다. 뮤지엄 건물 자체가 유적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슈 클리너에 발을 넣고 신발 바닥을 한 번씩 닦아야 했는데, 오래 줄을 선 뒤 입장할 수 있게 되니 급한 마음에 메인 홀로 달려 들어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렇게 신참 캐셔의 머릿속은 점점 새하얘져 갔다.      


그때, 자원봉사자일 때부터 일을 가르쳐주고 도와주던 니콜이 메인 홀 밖으로 나왔다. 한눈에 상황을 인지한 그녀가 옆에서 손님 안내를 돕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나를 다독였는데, 그때 해준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괜찮아, 네 속도대로 해. 다들 기다려 줄 거야.”     


순간 그 말이 아주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무척 낯설었다. 이런 말을 실제로 들어본 적이 있었나? 게다가 말 자체가 내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과 너무 달랐다. 기다려줄 거라니, 손님이?   

  

좁은 공간에 매표소가 딱 하나뿐인 것도, 그래서 줄이 긴 것도, 입장 전에 슈 클리너 등 거쳐야 하는 절차가 많은 것도 기다려야 하는 손님 입장에서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을 손님들이 불쾌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버겁고 당황스러워도 그저 내가 더 빨리 못하는 게 잘못이라 생각했고, 줄을 빨리 줄이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베테랑 직원인 니콜이 괜찮으니 그냥 네 속도대로 하라고 말한 거다. 손님들이 기다려 줄 거라면서. 그리고 정말 니콜의 말이 맞았다. 그날을 포함해서 성에서 보낸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관광객이 몰려와 줄이 길어지는 일은 아주 흔했지만, 단 한 번도 ‘줄을 너무 오래 섰다. 카운터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다. 왜 카운터가 하나냐, 더 빨리해 달라’ 같은 컴플레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모든 손님이 정중했고, 기다려줬으며, 웃으며 인사했다.       






캐나다에서 지내는 동안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뮤지엄에서 보냈던 시간 이후, 나는 이주민과 난민을 지원하는 NGO에서 인턴십 기회를 얻었다. 해당 NGO는 인력풀에 등록된 봉사자만 3천 명이 넘어가는 곳이었는데, 자원봉사자실에서 각 부서의 필요에 맞게 봉사자 인력을 연결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나는 이곳에서 인턴십을 했는데 팀의 책임자인 크리시는 언제나 쾌활했고, 무엇보다 잘 기다려주는 상사였다.      


막 단체에 들어갔을 때는 사실 내가 제대로 담당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보였다. 낯선 일, 어색하고 잘 못 하는 일들 천지였다. 하지만 크리시는 아주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내게 다양한 일을 맡겨주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주었고, 못 하는 일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덕분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성에서처럼 온갖 포지션을 다 쑤시고 다녔고, 곧 단체의 거의 모든 부서에 지원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자원봉사자실에서 크리시를 도와 봉사자나 인턴을 관리하다가도, 리셉션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면 능숙하게 리셉션 업무를 처리했다. 단체 홍보자료를 만들어서 지역 학교나 대학들을 돌며 단체를 소개하기도 했고, 이주민이나 난민들을 돕느라 항상 바쁜 거주지원팀과 고용지원팀의 일손을 도왔다. 의욕이 넘쳤고, 업무 역량도 빠르게 늘어났다. 누군가 날 기다려 준다는 걸 알게 되자 놀라운 결과가 벌어졌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나는 ‘내 속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내 속도를 기다려주는 주변 환경 덕이 컸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잠재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붙어갔다.     


네 속도대로 해. 그래도 괜찮아.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나만 해도 나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해준 적이 없다. 늘 조바심 내며 스스로를 다그쳤고 때론 화를 냈다. 학교와 사회의 속도는 늘 내 속도보다 빨랐고, 나는 매번 이를 쫓아가기에 급급했다. 어떻게든 따라가 보려 안달하기만 했다. ‘더 잘해야 해’, ‘저기에 닿아야 해’ 같은 생각을 하며, 손에 닿지 않는 기준점을 향해 욕심껏 달음질치다 나가떨어지고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왜 나는 늘 이렇게 느려터졌는가 자책하면서,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애써 위안하면서. 

    

캐나다에서 지내는 모든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낯선 땅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해주셨다.


“괜찮아. 네 속도대로 해.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라고. 


그건 그 당시 내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다. 그저 내 속도대로 가는 걸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주시며 함께 걸어 주셨고, 결국 멋지고 감사한 결과들을 내 품에 가득 안겨주심으로써 결과는 내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는 걸 알려주셨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를 가장 잘 아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세상 속도에 비하면 한참 뒤처진 것 같지만, 하나님은 내 속도가 느린지 빠른지와 상관없이 계획하신 뜻에 따라 나를 성장시키신다. 그러니 내 속도가 꼭 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 그냥 하나님 손잡고 내 속도대로 열심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괜찮다. 그저 하나님과 같이 있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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