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차게 망한 첫 번째 인터십
실패는 그냥 실패로 끝나는 줄 알았다
무사히 비자가 연장된 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근처에 있는 작은 국제개발협력 NGO를 발견했다. 아프리카 잠비아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 지원을 하던 곳이었는데, 한창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을 때라 무척 반가웠다. 지난 몇 달간 어학원과 홈스테이에서 익힌 생존 영어 덕분에 자신감이 붙었던 걸까, 나는 무작정 인턴십을 해보고 싶다며 이메일을 보냈다.
지원서를 보내긴 했지만 사실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경력이랄 것도 뭣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캐나다 국민도 아니고 말이나 제대로 알아들을지 걱정되는 어학연수생인데, 그 사람들이 왜 날 뽑겠는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답장이 왔는데 덜컥 인터뷰를 보자는 거다. 그렇게 빅토리아 다운타운의 작은 건물에서 생애 최초로 인턴 면접을 봤다. 면접 공부고 뭐고 그런 걸 해보기는커녕 있다는 것도 몰랐다. 덕분에 때가 너무 안 묻은 내 답변은 필요 이상으로 단순하고, 솔직했다.
“왜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은가요?”
라는 대표의 질문에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데, 나중에 혹시 관련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인턴십 경력이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라고 답했다.
맞다. 너무 솔직했다. 당혹스러워하던 대표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인터뷰를 봤으니 내 영어 실력이 사무직 업무를 보기에 많이 부족하고, 내 내용물(!)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 대표님은 “어학원이 끝나는 오후 시간에 오라”며 출근 일을 정해줬다. 나를 맡아줄 ‘사수’ 같은 직원도 소개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어린 학생이 업계에 관심이 있다니, 뭐라도 배울 수 있게 도와주려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뭐, 그리고 무급이니까.
그렇게 시작한 첫 인턴십. 사실 인턴으로 지원하고 면접도 봤지만, 출근하며 느끼기에는 뭔가 자원봉사자 같은 느낌이 있었다. 업무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영어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어학원이 끝난 오후에나 출근했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도 상당히 자유롭게 출퇴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2~3일, 오후 2시 출근해서 5시 반 퇴근’ 같은 스케줄을 향유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일은 쉬운데 어려웠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업무 강도는 쉬운 일이었지만, 내게만 대단히 어렵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영어가 엄청 큰 장애물이었다. 인터뷰까지는 별문제가 없어서 몰랐는데,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내 영어 실력은 정말 턱없이 부족했다.
업무 문서에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당시 내가 보던 서류는 ‘woman empowerment’ 같은 단어로 도배되어 있었다. 들고 간 전자사전에는 ‘empowerment (임파워먼트, 권한 부여 및 이양)’의 뜻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니 서류 하나 읽는 것도 힘들고, 당연히 다른 일이라고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작성해야 하는 이메일의 내용이나 형식도 너무 낯설었다. 인턴십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장밋빛 미래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직원들도 나도 서로 난감하고 민망한 상황이 이어졌다.
직원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나를 일에 끼워주기 위해 애써주었다. 분명히 못 하고 있고, 많이 느린데도 기다려주고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찾아서 맡겨주었다. 지역 슈퍼마켓 체인에 기부 요청서를 보낼 때면, 자기는 이렇게 보냈다며 자신이 보냈던 이메일을 참고하라고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시민교육이나 국제개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면 수업 보조 역할로 함께 참여해서 상황을 보고 익숙해질 수 있게 해줬다. 공부할 겸 읽고 참고하라며 아프리카 국제개발 관련 자료들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고맙고, 민망해서 자꾸 웃음이 난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도움에도 불구하고, 첫 인턴십 도전기는 조금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나는 몇 달간의 사투 끝에 인턴십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직원들에게 괜히 부담만 주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기간을 정해두고 인턴 계약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인사만 하면 언제든지 인턴십을 끝낼 수 있었다.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한 뒤 인사하고 나오던 날. 뭔가에 패배 선언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나의 부족함을 마주 보게 된 느낌이 들어서 많이 부끄러웠다. ‘이건 아무래도 실패라고 봐야겠지?’ 내 첫 인턴십 도전은 그렇게 몇 달 만에 조금 초라하게 마무리됐다.
그렇게 부끄러운 추억 하나로 끝난 것 같았던 첫 인턴십.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실패도 멋지게 사용하셨다. 우선, 이 부끄러운 첫 도전이 내게 또 다른 도전의 문을 열어줬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내 실력은 모르는 분야의 일을 영어로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적극 활용했는데, 이때 우연히 ‘국제개발협력 책 번역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됐다. 아직 국내에 번역 출판되지 않은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좋은 책을 찾아서 번역하고 출판하는 프로젝트였다.
또 감당 못 할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인턴십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으나마 일종의 자신감을 줬다. 그렇게 한 번 물어보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놀랍게도 프로젝트팀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소외된 90%와 함께하는 디자인>, <유엔공식가이드북> 이라는 책을 국내에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 함께했다.
또한 막연히 관심만 가지고 있던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됐다. 이는 내 진로 결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후 국제개발협력 업무를 하는 연구소와 NGO 등에서 일하게 된다. 아프리카 말라위 산골 마을 사람들의 백내장 수술이 이들의 삶에 경제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조사하러 가기도 하고, 스와질란드 여학생들을 위한 생리대를 지원하거나 화장실을 짓고, 수도관을 연결하기 위한 펀딩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베트남 소녀들의 생계비를 지원하고 이들을 위한 미술봉사단을 꾸리기도 했다. 국내의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 이주민들을 위한 의료비 지원 사업도 진행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나는 캐나다에서 접했던 첫 인턴십 때와 놀랍도록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프로젝트를 만들고 이를 위해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쓰거나, 학교나 세미나 등에 외부 강의를 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국제개발협력에 대해 알리는 일.
하나님은 내 부끄러운 실패로부터 무수히 많은 일들을 뽑아내셨다. 그걸 깨닫고 나니 숨기고 싶었던 실패 경험이, 하나님께서 날 키우고 보살피시는 중이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추억처럼 느껴졌다. 역시,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크시다. 그리고 결국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