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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네 작고 평범한 사정도 내게 중요하단다

어쩌겠어요. 자식놈이 하고싶다는데.


사람들의 이주와 이동에 관해 공부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대학원을 알아봤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딱 이거다 싶은 전공 과정을 찾을 수 없었다. 캐나다에서 영어를 배울 때 작문을 봐주던 선생님이 영국의 대학원을 추천해주셨고, 나는 몇 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다.      


그 중 원하던 학교에서 조건부 합격 연락을 받았다. 


이 ‘조건’이라는 건 학생마다 달라지는 편인데, 내 경우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당시 아직 졸업하지 않았던 학부를 일정 학점 이상으로 졸업할 것. 그리고 조금 더 높은 어학 시험 점수를 제출하거나 ‘학기 전 수업(pre-sessional course)’을 수강할 것. 


나는 이 조건을 받아 들고 정말 기뻤다. 

그건 그냥 내가 원했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완벽한 오퍼였기 때문이다.     






‘학기 전 수업’은 외국인 학생이 입학 전에 듣는 일종의 영어 집중코스 겸 학과 적응 수업이다. 보통 어학 시험 점수가 입학 기준보다 조금 낮은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사실 나는 이미 이런 수업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영어 작문 실력을 높이고 싶어서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의 학기 전 수업을 수강했었는데, 덕분에 학문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영어를 경험하고 리서치 페이퍼 작성법 등을 훈련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대학원 시작 전에도 꼭 ‘학기 전 수업’을 듣고 싶었다. 수업 적응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기 전 수업 듣기를 조건으로 입학 허가가 나다니. 원래부터 듣고 싶었는데, 나야 좋지!    

하지만 이렇게 좋은 오퍼에도 한 가지 불만스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비자 문제다. 조건부로 학기 전 수업을 듣는 학생은 총 두 번의 비자 신청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한두 달 정도만 체류 가능한 비자로 입국해서 학기 전 수업을 듣고, 그 성적에 따라 최종적으로 다시 입학 가능 여부를 따져 대학원 수업을 듣기 위한 비자를 받는다. 결국 비자를 두 번 신청하는 건데, 이러면 비자 신청비도 두 배로 들고 두 번째 비자 심사를 기다리는 한 달여 동안은 여권도 없이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한다.     


뭐, 대부분 학생이 별 불만 없이 이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이를 피하고 싶었다. 비자라는 건 발급 과정 중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확률이라지만, 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캐나다에서의 비자 문제가 떠올라서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탄하고 찬양하게 됐지만, 6개월 학원 등록해놓고 3개월 비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마음고생했던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경험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니 가능하면 비자 신청을 한 번에 끝내고 출국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조건부 입학’을 ‘무조건적 입학’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입학 허가서에 붙은 ‘조건부’라는 말을 떼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영어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 다행히 이는 그렇게 어려운 목표가 아닌 듯해 보였다. 올려야 하는 점수가 고작 0.5 점이었기 때문이다. 네 개 영역의 시험을 보는데, 그중 한 과목의 점수가 딱 0.5 부족했다. 남아있는 시간은 몇 달. 0.5 점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못해 남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대로 안 되더라. 여러 번 시험을 봐도 이상하게 꼭 한 과목에서 0.5 점이 모자랐다. 모자란 A 과목 점수를 올려놓으면 갑자기 멀쩡하던 B 과목 점수가 0.5 점 떨어졌다. 매일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열심히 기도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과목별로 사이좋게 0.5 점씩 돌림노래를 불러댔다. 매번 돌아가면서 꼭 한 과목만 점수가 모자라니, 어찌나 약이 오르던지.     


‘아니, 하나님. 이 정도면 좀 점수가 나올 만하지 않나요? 저 진짜 열심히 했는데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예요? 시험 본다고 돈도 많이 들어갔어요. 지금 한 푼이 아쉬운데....... 혹시 제가 비자 두 번 신청하고 돈 두 배로 내고 한 달 내내 속앓이 끙끙하는 게 하나님 뜻이라고 하실 건 아니죠? 계속 기도했는데. 아, 왜 계속 안 들어주세요? 하나님! 듣고 계세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시험에서 또 0.5 점 모자란 성적표를 받고 나니 나도 모르게 불평하는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 점수 맡겨 놓은 것도 아니면서, 철없는 딸은 또 애꿎은 하나님께 징징거리고 짜증을 부렸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빙자한 심정적 깽판을 치고 있을 때, 문득 캐나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영어가 부족해도 국제개발협력 NGO에 인턴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크레이그다로크 성에서는 기대도 못 했던 직원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이주민·난민 지원센터에서는 원래 인턴을 모집하던 시기가 아닌데도 인턴 기회를 얻었다. 이때 단체 거의 모든 부서 업무를 보조했고, 대학 행사에도 참여해서 당당히 부스를 열어놓고 단체를 홍보했다. 


그 모든 과정 중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고, 늘 내 한계와 인지를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더는 불가능하지 않았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닫혀있던 문도 얼마든지 열린다는 걸 몇 번이고 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고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입학처에 한번 말이나 해 볼까?’      






바로 입학처에 이메일을 쓰고 그 동안 본 영어 시험 성적표를 전부 첨부했다.  

    

“제 점수는 매번 학교에서 요구하는 평균 점수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개별 과목 점수가 꼭 하나씩 0.5 점 모자랐죠. 첨부파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 번은 A과목 점수가 0.5 점 낮은데 다음 시험에서는 오히려 기준보다 0.5 점 높습니다. 한 번 점수가 낮게 나온 과목도 다음에 본 여러 시험에서는 오히려 성적이 더 높게 나오기도 합니다. 평균 점수는 계속 요구 점수를 넘었고요. 저는 제 영어 실력이 학교의 요구 수준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매번 이렇게 조금씩 성적이 달라지는 바람에 비싼 시험료를 내고 시험을 또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것 때문에 제 비자가 분할된다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였다. 


“제가 모든 학기 기간을 커버하는 비자를 받게 된다고 해도, 저는 수업 전에 미리 가서 프리 코스를 들을 예정입니다. 프리코스를 들으면 수업 적응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기왕이면 분할 비자가 아니라 연결 비자를 받은 상태로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순식간에 이메일을 작성해서 망설임도 없이 전송해버렸다. 평소 내 행동 패턴과는 많이 다른 일이었다. 흥정은 시도할 엄두도 낸 적 없고, 제시된 기준에 나를 맞추려 언제나 아등바등했었는데. 타자를 치면서도 내가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뒤에는 또 어땠던가. 요청이 받아들여질 확률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괜찮을 거 같아요. 감사해요, 하나님.’ 


조금 전까지 점수 안 나왔다고 하나님께 떼를 써 놓고는, 갑자기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긴다며 감사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엉뚱했지만 정말 저런 기도가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학교 측의 답장이 왔다. 결과는 놀라웠다. 입학처는 내 상황을 이해해줬다. 당연히 입학은 여전히 조건부였지만, ‘조건’의 내용을 변경해서 내 요청을 들어준 것이다. 


기존 조건이 미리 도착해서 ‘학기 전’ 수업을 수료하는 거였다면, 이제는 ‘학기 중(in-sessional)’ 보충 수업을 듣는 것으로 조건이 바뀌었다. 이건 결국 내가 전체 학업 기간을 모두 커버하는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학기 중’ 보충 수업을 들으려면 당연히 정규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니까!    

  





정말 놀랍고 고마웠다. 하지만 이 결과에도 여전히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학기 중’ 수업이 아니라 ‘학기 전’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정규 수업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미리 공부하고 싶었던 건데, ‘학기 중’ 수업을 듣게 되면 이 이점이 사라진다. 


오히려 워밍업 없이 듣는 본 수업에 헐떡이면서 보충 수업까지 추가로 들어야 하니 학업 하기가 더 힘들 수도 있겠다.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변경된 조건 때문에 학기 중 보충 수업을 듣는 게 필수가 됐다고 해도, 나는 꼭 학기 전 수업을 듣고 싶었다.  

   

다시 이메일을 썼다.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학기 전 수업’을 꼭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 ‘학기 전 수업’과 정규 수업 기간을 모두 커버하는 비자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담당자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내 케이스를 비자 담당자에게 연결했다.     


만세!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 믿기지 않는 결과가 기쁘고 놀라워서 어쩔 줄 몰랐다. 우선 기대도 못 했던 일이지만, 입학 조건이 가벼워졌다. ‘학기 중 보충 수업’을 들으라는 건 어쨌든 입학해서 수업을 듣는다는 걸 전제로 한다. ‘학기 전 수업’ 결과에 따라서 입학 여부를 따지겠다는 이전의 조건에 비해, ‘우선 입학은 시켜주는데 보충수업 들어라’는 식의 훨씬 더 나은 조건이 된 것이다. 


느낌상으로는 거의 ‘조건부’라는 단어를 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원하던 학기 전 수업도 들을 수 있게 됐고, 번거로운 비자 신청을 두 번이나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모든 게 완벽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굴러가지만은 않았다.     


비자 담당자에게서 온 이메일을 열어보았더니, 다시 학기 전 수업 기간 4주만 커버할 수 있는 비자 신청서가 와 있지 않은가! 내가 입학처와 나눈 이야기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은 이메일이었다.     

말도 안 돼!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기나긴 이메일 랠리의 막이 올랐다.     






“제 비자는 4주짜리가 아니에요. 다시 보내줘요."   

  

답장이 왔다.    

 

“아니. 넌 조건부 입학이니 학기 전 수업 기간 4주분의 비자만 나오는 게 맞아.”    

 

다시 메일을 보냈다.     


“아니요. 제 조건은 ‘학기 전 수업’ 아니라 ‘학기 중 보충 수업’입니다. 그래서 원래 정규 수업 기간만 커버하는 비자를 받는 건데, 제가 학기 전 수업 4주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 학위 기간과 학기 전 수업 기간을 모두 커버하는 비자가 나와야 해요.”     


그러자 비자 담당자는 이전 입학처 담당자에게 내 이메일을 다시 토스했다. 

    

“얘 하는 얘기 확인 좀 해봐.”

     

그리고 이전 담당자에게서 답장이 왔다.      


‘혹시 입학처 담당자가 그사이 마음을 바꾸진 않았겠지?’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메일을 열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안고 열어본 답장에는,     


“휴가 중입니다. 00일까지 연락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맥 빠지는 글 몇 줄이 덜렁 쓰여 있었다. 

   

오. 하나님. 


입학처 담당자의 휴가 기간, 이메일 랠리는 잠시 휴전을 맞았다.   

  

며칠 뒤 드디어 담당자의 휴가가 끝났다. 

남의 휴가 끝나길 이렇게 간절히 기다려보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휴가 다녀온 사이에 담당자가 내 케이스를 까먹지는 않았나 보다. 그는 비자 담당자에게 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내줬다.     


“얘 말이 맞아. 점수가 살짝 모자라긴 하지만 ‘학기 중 보충 수업’으로 결정됐으니 학위 기간 전체 비자야. 그리고 자기가 ‘학기 전 수업’을 추가로 듣겠다고 했으니 그 기간이 추가로 붙은 비자가 나오는 게 맞아.”   

  

비자 담당자는 그제야 제대로 된 비자 신청서를 보내줬다. 그렇게 학기 전 수업 기간과 학위 기간을 전부 커버하는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학기 전 수업을 듣되 비자는 한 번만 신청하기’라는 목표가 완벽히 이루어졌다.      





그 뒤 몇 년이 지났다. 삶은 정신없이 시간을 따라 흘렀고, 어느새 학생일 때의 일은 그저 가끔 떠오르는 추억이 됐다. 그날도 그랬다. 노트북 폴더를 뒤지다 논문 초안 파일을 발견했고, 혼자 추억에 잠겼다가 그날의 기억에 닿았다.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생각하고 바라볼수록 조금씩 다른 게 보였다.     


계속 뱅글뱅글 돌던 점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일에 실패하고 좌절하던 내 모습. 아주 어리고 미숙했던 기도. 갑자기 생겼던 용기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보냈던 나답지 않은 편지, 그리고 얻었던 놀라운 결과.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그 모든 일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안다면 삶에는 더 이상 우연이 없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입국하던 날, 짧게 나온 비자에 실망하던 마음은 하나님께서 항상 가장 좋은 결과로 인도하신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쥐가 나오는 하숙집에서 울며 기도하던 순간은 하나님의 인도와 예비하심에 감사하고 일하심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 일하셨고, 단 한 순간도 나를 ‘하나님 없는 우연에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그렇게 찬찬히, 그동안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떠올렸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하셨는지, 그 모든 순간 내게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갔다.   

   

함께 낯선 땅을 걸어주시던 하나님. 수많은 추억과 비밀을 함께 나눈 하나님. 늘 내가 얼굴을 파묻고 울 곳이 되어주셨던 하나님. 가장 슬픈 날과 가장 기쁜 순간 꼭 함께 계셨던 하나님. 자잘한 일상의 행복과 호기심, 실패와 좌절 중에도 나를 늘 안아주시던 하나님.      


그제야 비로소, 성적표를 들고 한숨 쉬던 내 옆에, 어린아이처럼 떼 쓰는 기도나 하던 내 곁에 계시던 하나님이 보였다. 혼자 실망하고 끙끙 앓던 내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시던 하나님이. 일방적이고 어린 기도를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그때 내 기도는 정말 어렸는데, 내가 한 건 떼를 쓰고 불평하는 기도밖에 없었는데. 그것뿐인데도 하나님께서는 내 종알거림을 기뻐하셨다. 어린 나와 함께 하시며 내 기도를 듣고 계셨고, 나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 하나까지 다 돌보고 계셨다. 내게 방법을 알려주시고, 상대방의 이해를 얻게 하셨다. 진작 포기하고도 남았을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셨다.      






내가 비자를 한 번에 받든 두 번에 받든 그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 엉망진창인 기도도 들으시고, 내 마음도 만지시고, 날 위해 일하셨다. 하나님께 한없이 작고 하찮다 못해 의미 없을 일도 무시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울컥, 울음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긴 왜야. 그게 내게 의미 있기 때문이잖아.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의미 있기 때문에,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따뜻한 관심과 섭리가 늘 어려 있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묘한 양가감정이 든다. 

이상함, 그리고 벅참. 신기하고 이상한데, 동시에 벅차다.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신경 쓰세요, 하나님? 저한테야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정말 별거 아닐 텐데, 왜 제 기도를 들으세요? 별거 아닌 그 말들을 왜 기뻐하시는 거예요?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왜 내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세요? 왜 날 좋아해요?      


고맙고 좋지만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그 정도까지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벅차다. 

    

하나님께선 늘 웃는 얼굴로 날 보신다. 그리고 내게 집중하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심지어 내가 봐도- 별 쓸모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고 울어도 늘 진심으로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신다. 엄살을 부려도, 어리게 굴어도, 의젓하지 않아도, 못하고 또 못해도, 괜한 짜증을 부리다 왈칵 울어버려도. 하나님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하다. 나를 끌어안은 팔은 단 한 번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작고 평범한 사정도 내게 중요하단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코끝으로 열이 몰린다.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건 매번 확인받아도 매번 마음이 벅차다.      


평범한 일상 속, 오늘도 하나님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고 또 표현하신다. 내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처럼 또, 내 옆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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