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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있잖아, 내가 널 정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 목숨 보다 더. 

 

겨울이 찾아왔다. 캐나다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 그해 겨울에는 마음이 유독 가라앉았다. 비수기를 맞아 관광객이 줄어든 성은 고요했고, 빈 거리에 바람이 시리게 불었다. 밤은 너무 길었고, 낮에도 도통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었다. 한 달 가까이 하늘은 계속 회색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하늘에 무언가 묻어있었다. 


손바닥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조각.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저게 뭘까 한참 바라봤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풍선 같은 것도 아니고, 비행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모양은 약간 찌그러진 다각면체. 대체 저 파란 조각은 뭘까? 


한참을 바라보다 겨우 알았다. 그게 하늘이라는 걸. 매일 일상처럼 덮여있던 구름 사이가 어쩌다 열려서 아주 작게 파란 하늘이 드러났던 거다. 나도 모르게 하늘은 당연히 회색이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한국에 가지 못한지 1년하고 몇 개월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삶은 전에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1년 이상 사용한 영어는 점점 더 능숙해졌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별 불편이 없었다. 익숙하게 출근해서 조용한 뮤지엄 안을 떠돌다가, 간혹 방문객이 찾아오면 능숙하게 유물에 관해 설명하고 안내했다. 저녁이 되면 이제는 발이 먼저 아는 퇴근길을 따라 아침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회색 하늘 아래를 걸어 돌아왔다. 


캐나다 도착 후 얼마 안 됐던 작년 겨울에는 한창 어학원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여러 저녁 약속으로 바빴지만, 이제는 그럴 일도 없었다. 대부분 관광지는 이미 한 번씩 다 돌아봤고,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갔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주로 방 안에서 혼자 보냈다.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으면 온 공간이 밤처럼 고요했다. 그러면 늘 컴퓨터를 켰다. 방에 있을 때는 항상 노트북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재생시켜두었다. 높고 경쾌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빈 공간을 채웠다. 그걸 보며 저녁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퇴근길에 와인을 한 병씩 사 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먹는 양도 늘었다. 배가 부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먹기를 멈추지 않아 불편할 만큼 과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 뒤 맞이하는 다음 날은 그 전날, 전전날, 그 주, 아니, 어쩌면 한 달 내내 그랬던 것처럼 피곤하고 무기력했다. 그런 삶이 회색빛 겨울날을 채워갔다.      






말씀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잔뜩 밀린 방학 숙제를 바라보듯 한참 성경책을 보다가 “......그냥 내일 읽자.”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 내일이 모레가 되고 글피가 되다 일주일, 열흘이 되면 매일 조금씩 더 무거워진 마음에 더 도망도 못 가고 겨우 책을 폈다. 억지로 읽으려니 괜히 짜증이 치솟아서 온갖 불평을 내뱉었다.       


“성경책은 글자가 너무 작아서 읽기가 불편해.”

“종이가 얇아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짜증 나.”

“번역을 너무 옛날 말로 해 놔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말이 너무 많아.”

“규빗, 규빗, 규빗, 규빗! 이런 거 대체 왜 읽어야 해?”    

       

어쩌다 한번 성경을 펴놓고도 온갖 짜증을 다 내며 성경이 얼마나 독자 친화성이 부족한 책인지에 대해 따박따박 허공에 따져댔다. 그리다 결국은 성경을 꼭 자주 읽지 않아도 된다며, 온갖 궤변을 늘어놓았다.   

  

‘굳이 이 이해도 안 가고 읽기도 힘든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쓸 필요가 있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내 마음도 말할 수 있는 기도가 더 중요한 거 아닐까?’

‘나는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까 성경은 좀 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 읽지 않는 나를 정당화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자꾸 날 괴롭히는 죄책감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도무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침대맡에 올려놓은 성경책이 계속 눈에 들어왔고 괜히 마음에 찔렸다. 뭔가 아주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종종 안부 연락 때마다 튀어나오는 어머니의 질문도 문제였다.      


“요즘에는 성경 어디 읽고 있어?”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이 질문이 글쎄 몇 달간 끊임없이 계속되는 거다. 아주 곤란했다. 매번 같은 곳을 읽고 있다고 대답하려니 어느 순간부터 그게 좀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아직 요한복음이야. 아, 그만 좀 물어봐.”      


좋아. 알겠어, 알겠다고. 아무래도 성경을 읽긴 읽어야겠다. 자꾸 찔러대는 마음과 어머니의 질문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성경책을 잡긴 했다. 하지만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는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대단히 무기력한 상태였던 나.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마음, 또는 의무감. 이 사이에서 어떻게든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무래도 읽긴 읽어야겠는데, ‘안 해’ ‘귀찮아’를 남발하고 있는 이 무기력쟁이를 어떻게 설득하지? 매일 몇 장씩 읽자고 다짐하자니, 시작도 전에 이미 농땡이 칠 내가 눈에 선했다.     


‘하루 한 장 읽기는 어때?’ 

‘안 돼. 못 해.’     


단호한 거절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반 장 읽기?’

‘그것도 좀 부담스러워. 한 장이 엄청 길면 어떻게 해? 반도 길 거야.’    

 

역시 거절. 그렇다면 더 줄여야겠군.   

  

‘좋아, 하루에 10절 읽기는 가능하지 않을까?’

‘음....... 될 거 같긴 한데, 분명 그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을 거 같아. 매일 성경을 펴야 하는데, 못하는 날 생겨서 흐지부지되면 어떻게 해?’ 

    

확실히 무기력쟁이의 마음이 좀 움직인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는 듯했다.    

 

‘그러면 하루 한 장 읽기! 하루에 딱 한 장만 읽으면 돼! 어때? 이건 부담스럽지 않겠지?’

‘그래, 뭐....... 피곤한 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좋아. 그렇게 해보자.’     


매일 한 절이면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고 어쨌든 한 절이라도 읽으려면 성경을 펴긴 할 테니까. 그렇게 매일 성경을 펴다 보면 어떤 날에는 좀 더 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늘려 가면 되겠지.     


그렇게 ‘하루에 성경 한 절 읽기’가 시작됐다.     






자기 직전까지 틀어놓던 예능 프로그램을 조금 일찍 끄고, 한 절 읽자마자 잘 거니까 방 불도 끄고. 침대 옆에 작은 스탠드만 하나 켜두고, 정말 딱 한 절을 읽었다. 짧았고, 쉬웠다. 물론 초반에는 그것도 하기 싫어서 ‘오늘 건너 뒬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 마음을 누르고 성경을 한 절 읽는 게 내내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 참고 책을 폈다. 


성경을 읽은 뒤에는 간단히 기도하고, 기분 좋게 침대에 누웠다. 한 절이지만 말씀 읽었고, 짧았지만 기도도 했다. 좋아, 할 거 다 했네! 의무감에 겨우 지키고 있는 형식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하니 끝도 없이 불편하던 마음이 좀 편해져서 좋았다. 죄책감이 사라지니 잠자리가 편했다. 며칠을 그렇게 하니 조금씩 습관이 되는지 한 절 읽기가 예전만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평범하고 여상하게 우울하고 지쳐있던 겨울밤. 노란빛을 내는 작은 스탠드 아래에서, 나는 그날 읽을 한 절을 위해 성경책을 폈다. 여전히 내 성경 읽기 표는 요한복음에 멈춰있었다. 그날의 한 절은 익숙한 구절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외우고 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그 한 절을 막 다 읽어가던 때, 채 다음 절로 눈길을 주기도 전. 순간 마음이 크게 울렁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저 부분이 유독 크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크게 울려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알았다.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계셨다.    

  

“있잖아, 얘야.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단다.”    

 

미친 사람처럼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부분을 몇 번이나 손으로 쓸며, 소리 내고 또 소리 냈다. 눈물이 너무 흘러서 부옇게 번져 보여도, 헐떡이는 숨과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려도 멈출 수 없었다.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고 계셨다. 머리의 생각이 채 이를 인식하기도 전에 마음이, 눈물샘이, 호흡이 먼저 반응했다.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로와 안도감이 날 압도했고, 나는 온몸이 시뻘게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기쁨, 깊은 안도감, 설명하기 어려운 서러움, 너무 크게 요동하는 이름 모를 감정, 선명한 행복함 같은 것들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구절인데, 너무 익숙해서 때로는 별 감흥 없이 넘기던 말인데. 그 말씀이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면 또 가슴이 뛰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하나님이. 그 크고 또 크신 분이. 작은 스탠드 아래서 펑펑 우는 나를 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부쩍 하나님께 친밀감을 느꼈다. 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생기니 그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작은 고민, 부끄러운 두려움, 유치한 소망,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호, 욕심, 흥미와 호기심,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속마음도 하나님 앞에서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 좋은 것만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날 평가하는 분이 아니라 내 이야기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 하시는, 정말 날 사랑하는, 날 기다리고 바라보고 쓰다듬고 품에 안는 분이시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만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말하고, 보이고, 울고, 바라고, 헷갈려 하고, 화내고, 묻고, 쉬고, 안길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상냥하고 다정히 날 대하셨고, 내게 늘 귀 기울이셨다. 하나님은 내 작은 생각과 행동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내가 가야 할 길로 분명히 인도하셨지만, 그 중간중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내버려 두실 때도 있었다. 자유롭게 시도하고, 실패하고, 궁금해하고, 놀라고, 재밌어하고, 신기해하고. 다시 신나서 하나님 품에 안겨들며 내 삶을, 하루를, 생각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재잘대는 것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정말로 내 숨 쉴 곳이었고, 어떤 비밀이든 소곤거릴 수 있는 믿음직한 친구였으며, 먹고 싶은 거 있다며 안겨들 수 있는 부모님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나를 언제나 사랑하고 듣고 안아주는 존재. 그게 바로 하나님이었다. 

     

이제는 모르면 그냥 바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너무 자동으로, 무의식중에 바로 묻다 보니 가끔 이런 걸 하나님께 물어도 되나 싶은 것까지(‘하나님, 제 귀걸이 한 짝 못 보셨어요?’) 물어보다가 어, 하고 민망하게 웃는다.   

   

아직도 가끔 그날 일을 떠올린다. 우울하고 추웠던, 많이 외로웠던 겨울밤. 마음도 닫고, 기대도 닫고, 마시지도 못하던 술을 마시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화면을 몇 시간씩 바라보던 그 밤. 게으름과 자기합리화 속에 겨우 겨우 읽어가던 말씀을 통해 나를 안아주고, 위로하고, 살려주셨던 하나님.     


하나님, 제가 정말 좋아해요. 하나님, 절 위해 목숨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나를 다시 찾아주셔서, 살려주셔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랑 상관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내게 당신을 주셔서 감사해요.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 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너를 보호하시고 널 붙드시리.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사막에 강물을, 길을 내시는 주.

내 안에 새 일 행하신 주만 바라봅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너를 보호하시고 널 붙드시리.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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