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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안다고 믿는 것, 진짜 아는 것

아는 거 없이 아는 척 하는 애, 우리는 그걸 빈수레라 부르기로 했어요

    

일하던 뮤지엄에 종종 크루즈 관광객들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크루즈 손님들은 조금 특별하다. 일반 관광객과 달리 짧은 시간에 많은 수가 몰려오고, 또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기념품을 구매하는 사람도 비교적 더 많은 편이다. 크루즈 상품에 성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가 포함된 경우, 기프트샵 이용 손님은 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니까 결국, 크루즈가 들어오면 정신없이 바빠진다는 소리다.

      

아마 업무 초기의 나였다면 크루즈 관광객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잔뜩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이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붙으면서 오히려 여러 손님을 응대하는 게 재밌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바빠도 일이 제대로 돌아갈 때 느껴지는 그 활기찬 리듬이 좋았다. 몰아치는 손님들을 깔끔하게 잘 상대하고 난 뒤 느끼는 그 성취감이란! 그러니 크루즈 손님이 얼마나 몰려오든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판매가 됐든 안내가 됐든 얼마든지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던 날. 크루즈 한 대가 또 빅토리아에 정박했다. 그날 성에 방문한 크루즈 팀은 미국에서 온 단체 손님이었다. 다들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높아 보였는데, 얼핏 보기에도 팔순은 훌쩍 넘기신 듯 보이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거동이 느리고 몸이 조금 불편하신 듯 보여서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따랐다. 할아버지는 별일 없이 무리에 섞여 관람 코스를 따라 성안으로 사라지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기프트샵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팬트리와 브랙퍼스트룸 사이의 복도였다. 관람코스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기프트샵 입구와 바로 이어져 있어서 내가 있던 곳에서는 고개만 빼꼼 내밀면 바로 볼 수 있는 장소다. 


무슨 일이지? 별생각 없이 성 안쪽을 들여다보니....... 세상에! 아까 그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신 게 아닌가!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주위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가까이 가 보니 할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 옆에서 한 중년 여성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스태프임을 알아보고 바로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줬다.     


“호흡이 없어요. 앰뷸런스를 불러야 해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호흡이 없다니! 나는 급히 허리춤의 무전기를 뽑아 들었다.


“여기, 할아버지 한 분이 쓰려지셨는데 호흡이 없어요! 1층 팬트리 앞이에요!”     


근처에 있던 큐레이터와 직원이 급히 뛰어 내려왔다. 그 사이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줬던 여성분은 벌써 할아버지의 가슴을 반복해서 누르고 있었다. 응급조치인 심폐소생술이다. 작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려온 다른 직원이 쓰러진 할아버지 옆에 남았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기프트 샵으로 돌아갔다. 가게를 비워 둘 수 없어서 돌아가긴 했지만 계속 출구로 시선이 갔다. 호흡이 없다니....... 설마 정말 돌아가시는 건 아니겠지? 진짜 돌아가신 거면 어쩌지?


초조하게 서성거리길 몇 분쯤, 곧 기프트샵에 난 뒷문으로 구급대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들것을 든 대원 여럿이 급히 안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 들것에 흰 천이 씌워져서 나올까 봐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할아버지가 구급대원들과 함께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쓰러져 호흡이 멎었던 고령의 관광객이 다시 숨을 쉬고 자기 발로 성을 걸어 나간 일.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그건 빠른 응급조치 덕분이었다. 옆에 있던 관광객이 늦지 않게 심폐소생술을 한 덕분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부축받긴 했지만 스스로 걸어 성을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은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됐다. 조금 놀랍고 비일상적인 경험이었지만, 쓰러졌던 관광객이 무사히 성을 나갔으니 나로서는 더 신경 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성은 다시 평범하게 북적거렸고, 나도 평소처럼 손님을 응대하고, 물건을 정리하다가 퇴근했다. 집에 돌아와 식사하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낮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도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쓰러져 누워있던 할아버지의 발, 몰려있던 다른 손님들, 다급히 심폐소생술을 하던 여자, 들것을 들고 뛰어 들어오던 구급대원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억 속 장면이 계속 떠오를수록 그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정말 그러했다. 우선 앰뷸런스를 불러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스태프였다. 하지만 앰뷸런스를 부른 건 내 무전을 듣고 뛰어 내려온 다른 스태프였다. 나는 911에 전화할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상황을 발견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무전에 대고 여기 문제가 생겼다고 외치는 것뿐이었다.     


무전에 대고 외친 말도 문제가 있었다. 성의 응급상황 매뉴얼에 따르면 이런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전기에 대고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성을 돌아다니는 모든 직원이 상시 무전기를 들고 다니기에, 직원 근처를 지나는 관람객들도 무전 내용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비상 상황에 놀란 손님들 때문에 자칫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 말고 수습할 수 있는 사람만 호출하라고 되어있다. 


나는 이를 꽤 여러 번 읽었다. 매뉴얼의 지시사항이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 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무전에 대고 “사람이 쓰려지셨는데 호흡이 없어요!”라고 외쳐버렸으니까.     


응급상황이 생기면 911에 전화하고, 매뉴얼을 지키고, 위급 상황에 맞게 심폐소생술을 한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뭐 복잡한 것도 없이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도 나는 못했다. 앰뷸런스도 못 부르고, 무전 매뉴얼은 떠오르지도 않았으며, 심폐소생술은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온 실전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덜컥 멈췄다. 크루즈 손님들이 오기 전, 어떤 손님이 와도 자신 있다며 의기양양하던 꼴이 우스울 만큼.     






이 일은 내가 ‘안다고 믿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머리로 아는 것과 그 지식을 사용하고 적절히 쓸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고, 배운 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건 결코 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안다고 믿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자신에 차 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 중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을까? 생각보다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많이 배우고 주워듣긴 한 거 같은데, 그게 내가 정말 아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는 거 같은 것’들만 많지, ‘진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당장 내 신앙의 모습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덕분에 뭔가 들은 건 많다.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배운 거 같은데 그것들을 실제로 그리고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면 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런 주제에 교회에 익숙해지고 예배에 익숙해졌다고 은연중에 마치 내 신앙이 충분히 성숙한 것처럼 자신에 차 있지 않았나.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내가 떠오를 때마다, 그래서 허술하기 그지없는 내 실체를 다시 바라보게 될 때마다 나는 약한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헛지식만 가득한 사람이 용케 무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은 염치없지만 하나님께 더 많은 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모자라요.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데 앞으로도 썩 달라질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 이 모자란 딸을 더 예뻐해 주시고 더 안쓰럽게 여겨주셔서 제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내려주세요’라고. 


그러면 왠지 하나님이 결국 웃으며 ‘오냐, 그러마’ 해주실 것 같아서. 그러면 자괴감으로 쓰던 속이 어느새 조금 간질간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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