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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Sep 18. 2021

언제나 시작은 가볍게였다.

볼레로처럼 불어나는 일감

세상에 이런 웹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01. NHN NEXT를 졸업한 지 몇 해가 지났는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도 않는 시점인 올해 봄쯤 그 시절 만들었던 손편지 대필 서비스 사이트를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하튼 그때의 이름은 학교의 이름을 따 NEXT POST 였고, (앞의 NHN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를 신청해주었죠. 그때는 월별로 주제를 정하고 필사자도 섭외하는 방식이었는데, 의외로 가장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주제는 '나에게 쓰기'였습니다. 지금의 MZ세대, 그리고 특히 Z세대를 말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아마, 그때가 파편화된 사회의 사람들이 저성장 시대의 미래불안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처음으로 느끼던 시절이 아녔을까 싶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만-


02. 몇 개월 운영하다가, 이내 인생 과부하 시점이 도래했습니다. 애초에 서비스를 구현할 기술적인 숙련도가 미숙한 학생의 신분이기도 했고, 취업준비도 해야 했으며-, 서비스 비용이 무료인 데다 어디 투자받아서 진행했던 일도 아니기에 필사를 도와주는 분들을 매로 새로 섭외하기도 도메인 유지 및 서버 비용, 기타 유지비들을 충당하는 것도 부담으로 느껴졌습니다. 수입이 다소 안정적이 된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그래도 어떻게든 유지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이내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돼버리고 말죠. 그때의 감정과 상황은 오로지 그때의 것이니까요. 


03. 필사해주셨던 분들의 프로젝트 기간의 시작과 끝에 인터뷰를 남겼습니다. 시작 전엔 필사하시는 분들의 손 사진과 그달의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했습니다. 끝난 후에는 하고 난 후의 소회, 아쉬웠거나 기억나는 글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저도 다른 분이 필사자로 일해주셨을 때, 신청해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인터뷰를 나누면서 신기하게도 가장 기억에 남고 서비스에 맞다고 느껴졌던 글귀가 제가 보낸 것이기에 기분이 묘했습니다. 끝내 그분에게 그것이 제가 요청한 글이라고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장을 다시 기록해 두자면, 

오늘의 작은 시작을 기억합니다. 


다시 보니 날짜를 같이 기입해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습니다. 그 후, 수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살면서 액자에 끼워진 채로 현관문 쪽 서랍장 위에 비치된 글귀를 스쳐 지나가듯 꾸준히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재생' 혹은 'replay'가 되어 인셉션처럼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지금의 결정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04.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서비스의 초기 아이디어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환소'역할을 하면 재밌겠다고 시작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말 그대로 아날로그 편지로 넥스트 포스트 쪽에 보내주시면 디지털로 변환해서 웹페이지를 만들어 드리고, 반대로 디지털로 텍스트를 남기면 아날로그 편지로 보내는 방식을 생각했었죠. 그런데 구현하려는 단계에서 주변 지인들의 피드백을 받아 아날로그 편지를 디지털로 바꾸는 쪽은 폐기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신생 서비스에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고 브랜딩 가치를 쌓아 올린 작은 서비스들은 대단하고 부럽습니다. 어쩌면 서비스의 세계에도 경력직이 유리한 것일지도요-


05. 서비스를 종료한 후에 중간과정으로서 재시도하려고 했던 흔적들도 있었습니다. 월별로 기획하지 않고, 심플하게 텍스트를 입력하는 방식, 인스타 계정으로서 서비스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있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병행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녔습니다. 더불어 마케팅의 부재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점에서 보면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잘 유통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제품에 대한 평가는 유통이 이루어진 다음에 진행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자본력이 가끔은 부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서비스는 수익을 전제로 하는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부분은 어려운 지점으로 남아있습니다.


06. 그리스-로마 신화를 집필한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써 내려가지 않고 거의 말미부터 앞쪽의 이야기를 필요에 따라 조금씩 기술하며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대문호는 아니지만, 이미 서비스가 베타로 제공되고 있는 시점에선 베타 이전의 고민과 우여곡절을 기술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은 듯합니다. 시작은 언제나 가볍게. 과정은 지난하고 무거울 예정이지만 목표는 정식 출시까지의 과정을 기술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 이후의 인생은 역시 지금 시점에선 예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후후-


07. 생업에 종사하면서 서비스를 만드는 것조차 정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이 매우 소수인 누군가에게 영향이 되어 자본주의적 동기가 아닌 서비스를 통해 또 다른 사회의 다양성을  만들게 되면 참 기쁠 것 같다는 마음으로 매거진을 시작해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넥스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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