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시뇨리아 광장, 우피치 미술관, 베키오 다리, 피티 궁
피렌체 대성당도 얼추 봤으니 다음으로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했다. 시뇨리아 광장은 '살아 있는 야외 박물관'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광장에 놓인 예술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그대로 미술관에 옮겨 놓고 관람료를 받는다고 해도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피렌체 현지에서 투어를 하게 되면 이곳 시뇨리아 광장의 작품 감상부터 시작할 만큼 작품 하나하나마다 전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예술품이었다. 새삼 이런 작품마저 시민들에게 무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피렌체가 부러웠다.
시뇨리아 광장은 첨탑이 우뚝 선 건물이 눈에 띄는데 현재 피렌체 시청사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이다. 원래 이름은 시뇨리아 궁전으로 메디치가의 궁전으로 사용됐는데 아르노 강 너머 피티 궁이 완성되자 시뇨리아 궁전은 '오래된' 혹은 '옛날'의 뜻을 가진 이탈리어 '베키오'를 붙여 베키오 궁전으로 불리고 있다. 베키오 궁의 탑은 아르놀포의 탑 (La Torre di Arnolfo)으로 높이가 상당한데 쿠폴라 보다는 낮지만 조토의 종탑보다 높다. 따라서 미켈란젤로 언덕을 비롯해 도시 어디에서나 아르놀포의 탑이 조망된다. 이 탑에는 감옥이 있는데 메디치 가의 사람들도 이 종탑에 갇히기도 했다. 현재는 유로 전망대로 운영되고 있는데 종토의 종탑을 오른 뒤였기에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베키오 궁전 옆으로 피렌체 최초의 공용분수인 넵튠분수가 있고 그 옆으로 기마상은 메디치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코지모 1세다. 그리고 시청사 앞에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가 놓여있다. 원래는 성당의 높은 외벽에 설치할 조각으로 만들어졌기에 조각을 올려다봐야 하는 것을 감안해 다비드의 얼굴과 돌을 쥔 손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해 크게 만들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다비드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광장에 들어선 사람들 대부분은 다비드상 앞으로 몰려든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힘들었다. 청소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놓인 다비드 상은 진품이 아니고 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의외로 내 눈길을 끈 건 너무나도 유명한 다비드상 옆에 놓여 있어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라는 작품이었다.
헤라클레스의 근육이 너무 건장하니 옆에 놓인 다비드의 소년미가 더 돋보인다. 작품 하나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데 하필 다비드 상 옆이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었다. 다비드 옆에 세워질 동상이라는 걸 너무 의식한 나머지 작가가 과도하게 헤라클레스의 근육을 부각해 만들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누가 봐도 나란히 서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중심축이 기우는 상황에 대한 작가의 부담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니 나라도 열심히 봐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청자 앞에 다비드와 헤라클레스가 놓인 건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다. 이 두 인물들은 피렌체 공화정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두고 뺏고 빼앗았던 피비린내 나는 정치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된 조각품들이다. 이 이야기만으로도 포스팅 하나가 나오는 분량이라 생략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검색해 보면 좋겠다.
다비드 상이 워낙 주목을 받는 관계로 시뇨리아 광장의 다른 작품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로지아 데이란치'의 작품들 역시 예사로운 작품들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로마시대부터 19세기 작품까지 13개의 오리지널 조각 작품들이 전시가 되고 있는데 '사비니 여인의 강탈'과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니' 두 작품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로마 건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비니 여인의 강탈'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깎아서 만들었다는데 세 명이 인물들이 얽혀 하늘로 향하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 품고 있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코지모 1세 기마상을 만든 사람과 같은 잠볼로냐 작품이었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니'는 메두사의 목을 벤 후 몸통은 발로 밝고 자른 머리를 쳐들고 서 있는 페르세우스가 너무 사실적이라 툭치면 동상에서 바로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시에나 공국을 정복 기념으로 만든 동상이라고 하는데 피렌체와 시에나가 한때 엄청난 경쟁관계에 있었고 뒤늦게 출발한 피렌체 공국이 시에나 공국을 이겼을 때의 승리의 기쁨이 이 동상 하나로 모두 설명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른 곳에서 보고 또 한 번 놀라게 됐는데 그건 바로 피티 궁에서였다. 13세기 당시 피렌체의 정치 상황은 상당히 혼란했다. 왕당파와 교황파가 번갈아 집권하는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로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는 영영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메디치가 정권을 잡았다가 실각하는 것이 반복되는 등 피렌체의 다양한 정치적인 사건들이 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벌어졌다. 종교 개혁을 외치던 사보나롤라도 이 광장에서 처형됐다. 이처럼 피렌체 정치 사회의 중심인 광장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시위와 집회를 줄이고자 코지모 1세가 이곳에 조각품을 전시하고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인 로지아 데이란치를 만들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순히 그런 공간이겠거니 생각만 했었는데 피티 궁에서 수많은 작품을 보다가 시뇨리아 광장을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시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자리에 있는 작품들, 페르세우스니, 다비드, 헤라클레스였다. 그림은 '1859년 4월 27일 아침'이란 제목으로 토스카나 공국으로 남아 있던 피렌체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새롭게 태어난 날로 이 날은 피렌체에 이탈리아 삼색국기가 공식적으로 걸린 아주 역사적인 날을 그려냈다. 피렌체 사람이라면 그림의 내용에 주목했겠지만 내 눈에는 중세 때부터 지금까지 숱한 정치적인 사건의 장이었던 곳에서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이 더 놀라웠다.
시뇨리아 광장의 로지아 데이란치를 옆에 있는 건물이 바로 우피치 미술관이다. 미술관치고는 건물이 너무 네모반듯하다 싶은데 원래 이곳은 은행 건물이었다. 메디치가가 수집한 작품들은 베키오 궁에 전시했는데 작품이 점점 많아지면서 전시할 공간이 부족해지게 됐다. 그러자 베키오 궁 바로 옆에 있는 메디치 은행 건물 맨 위 2개 층을 넓혀 미술품을 보관하게 됐고 이곳이 그대로 우피치 미술관이 됐다. '우피치'는 영어 '오피스(Office)' 라틴어 어원으로 '사무실'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됐다는 것쯤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세계 최대의 르네상스 미술관'이라는 우피치는 르네상스 시기 그림과 조각 약 10만 점을 보유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우피치로 와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유인즉슨, 메디치가가 후손이 끊기면서 마지막 상속녀였던 안나는 ‘메디치가의 소장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렌체 시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피렌체를 올 수밖에 없다. 로마도 그랬지만 피렌체 역시 두오모와 우피치 미술관만으로도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으니 조상덕을 톡톡히 보는 도시지 않은가.
우피치 미술관으로 곧장 들어가기에 앞서 회랑의 조각은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이카벨리, 갈릴레이, 보카치오 등등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기존질서와는 전혀 다른, 모두가 '예'라고 할 때 과감하게 '아니요'라고 하며 기존 질서에 반했던 사람들이 그 재능을 펼쳐내는 걸 동시대를 살면서 바라봤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가끔 상상하게 된다. 너무나도 파격적인 사상이 담긴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이 새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었음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수많은 천재들을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기존 질서와는 전혀 다른 아이디어와 상상이 인정받으며 현실로 구현해 낼 수 있었던 건 '메디치'라는 가문의 후원이 때문이었고 메디치가 없었다면 과연 르네상스가 가능했을까 싶기도 하다. 회랑 맨 앞의 동상이 코지모이고 두 번째 동상이 그의 손자 위대한 로렌초인 이유, 설명이 필요할까.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들은 워낙 유명해 익숙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맨 위층의 3층부터 차례로 이어지는 관람은 어지간히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중간 정도 즈음이면 집중력이 떨어질 정도로 작품이 너무 많았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 앞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멈춘다. 단체 여행객이나 미술관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을 이끄는 도슨트들도 설명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우피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식상하다 생각했던 '보티첼리'였다.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이 봐서 살짝 지겹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 앞에 서는 순간 얼음이 됐다. 이 그림이 품고 있는 다양한 상징성은 정설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해석이 있다. 또한, 실제 모델이었던 시모니아베스푸치를 짝사랑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보티첼리의 순애보까지 정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숱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그림은 너무 알려져 상투적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런저런 것을 다 떠나서 보는 순간 그냥 얼음이 됐다. '환상적'이라는 말보다 수천 배나 멋진 단어를 못 찾겠다. 세상에.... 그림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왜 이 그림이 그렇게 많은 상상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직접 이 그림 앞에 서니 알 것 같았다. 싸구려 프린팅의 그림으로 다 안다고 생각했던 보티첼리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몇 무리의 사람들이 수차례 바뀔 동안에도 혼자만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렵다.
그리고 또 한 번, 감탄에 마지않았던 건 카라바조의 그림이다. 몰타에는 카라바조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그림이 있다. 카라바조라는 화가의 작품 역시 실제로 보면 그가 표현해내고 있는 빛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이미 몰타에서 그런 경험이 있어 우피치에서 만나게 될 카라바조의 그림은 얼마나 생생할지 기대가 됐다. 책에서 숱하게 봤던 메두사와 바쿠스 두 작품 모두 '역시!'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카라바조의 본명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인데 이미 미켈란젤로라는 예술가가 있어 출신 지역인 카라바조로 불렸던 사나이. 그 미켈란젤로가 없었다면 오늘날 카라바조가 미켈란젤로로 불리고 있으려나. 그 미친 성격은 미켈란젤로보다는 그냥 카라바조로 불리는 게 더 어울리긴 한다.
우피치 미술관 3층에는 유리창이 있는데 그곳에서 베키오 다리가 보였다. 자세히 보면 베키오 다리 위 건물이 우피치 미술관과 통로로 연결된 것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사리 통로(Corridoio Vasriano)'다. 이 통로는 베키오 궁전, 우피치 미술관에서 피티궁전까지 회랑으로 이어지는데 무려 1.2km라고 한다. 코시모 1세는 피티 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베키오 궁전으로 출근할 때 시민들과 뒤섞이기 싫어 점포 위에 전용 통로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피렌체의 정치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에 만에 하나 폭동이 일어나는 등 급하게 피신해야 할 상황을 위해 더 요긴하게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우피치 미술관을 나서면 바로 아르노 강과 마주하고 정면으로 피렌체를 유명하게 만드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베키오 다리가 보인다. 베키오 다리를 찍고 싶다면 여기가 사진 포인트다. 너나없이 이 난간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자세히 보면 다리 위에 레고 모양으로 짜 맞춘 듯한 건물들이 매우 독특했다.
베키오 다리는 베키오 궁에서 설명했듯 '오래된(Vecchio) 다리'라는 의미인데 이름 그대로 아르노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로마시대부터 나무다리를 설치해 시민들이 통행을 했던 다리로 홍수로 인해 다리가 자주 유실되자 1345년에 지금의 다리를 건설했다. 당시는 정육점과 가죽 상점이 있었지만 베키오 다리에서 풍기는 도축장 고기 냄새와 가죽 냄새가 싫었던 베르디난도 1세가 그들을 내쫓고 금은 세공 상인들을 입주시켰다. 베키오 다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금은 세공 가게들이 있는 고급 쇼핑거리인데 하나같이 이 근처에서는 기념품도 심지어는 젤라토도 사 먹지 말라고 할 정도로 물가가 비쌌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자물쇠가 한가득이다. 원래는 다리 위에 주렁주렁 매달았는데 다리가 훼손되는 등 문제가 생기자 지금은 다리에 매달면 벌금을 매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리 위에 있는 동상 아래 구조물에 주렁주렁 자물쇠를 매달아 놓았다. 감정형의 F지만 이런 맹세 따위는 부질없다고 믿는 사람이라 아무리 베키오 다리라고 한들 그냥 그랬다. 다만, 사랑의 맹세를 위해 자물쇠를 매다는 건 베키오 다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건 좀 궁금했다.
자물쇠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베키오 다리 위에 동상으로 제작이 됐나 궁금했다. 그는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니'를 만든 벤베누토 첼리니로 피렌체 최고의 금속가로 인정받는 사람이란다. 하지만 예술 작품과 인성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이 다리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 '단테 알레기에리(Alighieri Dante)'다. 단테의 '신곡'은 다른 예술작품보다 한 발 앞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라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작품이다. 단테의 신곡은 알면 알수록 '신곡'의 위대함에 놀라게 된다는데 문제는 텍스트만으로도 그 위대함을 이해하기에는 내게는 아직은 어려운 책이다.
단테는 정피렌체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 사신으로 갔지만 되려 추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자신이 태어나고 사랑했던 피렌체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라벤나에 묻혔지만 피렌체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단테 탄생 600주년에 맞춰 단테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오픈했는데 시뇨리아 광장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박물관 안은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대신 박물관과 접하고 있는 골목에 자그마한 성당을 찾았다.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작은 성당이지만 이 성당을 알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했다. 이 성당은 젬마 집안 가문의 성당으로 단테와 그의 아내 젬마와 결혼한 장소이고 젬마가 이 성당에 묻혀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베아트리체도 이 성당에 묻혀 있다는 점이다. 단테의 아내 젬마, 단테가 첫눈에 반해 평생을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 두 여인이 어떤 연유로 같은 성당에 묻힌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당 안에는 두 점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성당 앞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한 번은 마주쳤을 수도 있음을 가정한 그림이 또 하나의 그림은 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가 결혼을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결혼식의 그림이 인상적인데 단테가 멀리서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을 보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짠했다. 말 한 번 건네어보지 않은 여인을 평생을 품었던 단테, 시모니아베스푸치를 짝사랑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보티첼리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힘이 센지 다시 한번 느낀다.
수백 년이 지나 이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성당 안 베아트리체의 무덤 위에 놓인 바구니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 적었을 정성스러운 손 편지를 놓고 간다. 짝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편지였을까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연서일까. 그게 뭐가 됐던 피렌체에서는 완성된 사랑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 너무 볼거리가 많았던 피티궁
사실 피렌체가 곧 우피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피치가 유명해 피티 궁 팔라티노 미술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 나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피티 궁까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우피치 미술관과 통합 입장권을 샀고 할 수 없이 가게 됐다. 오후 느지막이 가서 대충 1시간 정도 설렁설렁 보고 보불리 정원 잠시 보면 되겠지 싶어 갔는데 맙소사.
피티 궁은 그리 대충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단, 피티 궁 자체가 크도 너무 컸다. 2층 한 개층을 전체 사용하고 있는 팔라티노 미술관 외에도 3층의 모던 미술관, 의상 박물관, 도자기 박물관 등도 있었다. 피렌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보불리 정원은 족히 2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너무 대책 없었다는 불길한 느낌은 피티 궁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오후 3시 정도에 도착했기에 한가로울 줄 알았는데 웬걸 엄청나게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나마 지금이라 한산한 편이라는 데도 입장까지 한 참이 걸렸다. 아르노 강을 건너야 해서 주요 관광지와 조금 떨어진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인기가 좀 덜한 곳이었다.
피티 궁은 피렌체 가문이 약 200여 년 간 실제로 생활했던 궁전이지만 원래 주인은 피티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가 피렌체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 피렌체의 또 다른 가문 피치 가와는 엄청난 경쟁관계였고 피치 가의 테러로 로렌초의 쌍둥이였던 줄리앙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로렌초가 아르노 강이 피로 물들 정도로 피치 가에게 피의 보복을 한 것은 유명하다. 그런 피치 가가 메디치 가에 밀리기 싫어 메디치 궁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짓기 위해 브루넬레스키에게 의뢰를 했지만 피치 가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한참 동안 주인 없이 방치되고 있는 건물을 메디치가 코즈모 1세가 인수 후 결국 메디치 가의 궁전이 되면서 더욱 화려하게 탈바꿈했고 이후 약 200년간 이곳을 메디치 가의 궁전으로 사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너무 간과했다.
간단하게 소지품 검사를 하고 계단을 올라가면 팔라티노 미술관이 나온다. 미술작품도 작품이지만 메디치 가가 실제로 생활했던 공간을 엿보는 재미도 솔솔 했다. 엄청나게 화려한 공간은 방방마다 그리스 신화를 테마로 한 천장화가 장식하고 있고 벽면 한가득 엄청난 작품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너무 작품이 많아 보기도 전에 기가 질릴 지경인데 걸지 못하고 있는 작품도 아직 수두룩 하다니 새삼 메디치 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층 전체는 팔라티나 미술관인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보티첼리, 루벤스, 카라바초 등등 이름만 대면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수두룩해 우피치 못지않은 존재감이었다. 실제로 가끔씩 피티 궁과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들도 교차 전시가 된다고 한다. 방마다 주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두긴 했지만 어느 정도 미술에 조예가 있지 않다면 누구나 아는 작품이 아니고선 지나치기 십상이겠다 싶었다.
실제로 팔라티노 미술관 동선의 경우 모든 방을 순서대로 따라가는 관람 동선이 아니었고 몇 개의 방은 독립적이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몇 군데 방을 못 보고 지나쳤다. 그중 가장 아쉬웠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로 발탁되는 장면의 조각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4세였던 미켈란젤로가 노인의 모습을 조각하는 장면을 담은 조각상인데 피티 궁을 너무 신경을 안 쓰고 있는 상태였기에 사실 그 작품이 이곳에 있는 줄도 몰랐다.
피티 궁과 보불리 정원 대충 보겠다 생각해 오후 느지막이 온 것은 완전 패착이었다. 팔라티노 미술관을 들어서는 순간 대충 볼 수 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보불리 정원은 일단 포기하고 미술관에 집중하기로 했다. 작가들의 작품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됐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작품들이 있는 데다가 너무 공부를 안 하고 온 탓에 어떤 작품이 누구 작품인지 감이 잘 안 왔다. 그래도 꿋꿋하게 열심히 관람자 모드에 충실했다.
그래도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탈리아 인상화 화가로 점묘법의 대가로 불리는 플리니오 노멜리(Plinio Nomellini)의 작품이었다. 보라색 바탕에 은은히 빛이 스며드는 작품은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점을 찍어 완성한 작품인데 몽환적이면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2층의 팔라티오 미술관과 3층의 일부였던 모던 미술관의 작품을 보는데도 이미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났고 마감시간이 다 됐다. 잠깐이나마 다른 박물관도 좀 둘러볼까 했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림을 보느라 다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무리였다. 상황이 이러니 시간이 더 있다고 해도 보불리 정원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 같은 관람자라면 피티 궁과 보불리 정원에 꼬박 하루를 할애해야 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안 알아보고 온 내 탓이 컸지만 어쩌겠는가.
피렌체 6일이나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피렌체에서 안 보고 온 미술관과 성당이 수두룩하다. 그냥 되는 대로 가서 부딪쳐보자 싶었던 피렌체 여행은 계획이 없었던 탓에 너무 설렁설렁 수박 겉핧기 식으로 보고 온 것 같아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다. 그러니, 피렌체는 언젠가 꼭 다시 가보리라.
+ 다음이야기 : 시에나와 피사, 피렌체에 밀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