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토스카나, 매력 가득한 이탈리아 소도시 종합선물세트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도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풍경은 따로 있다. 내겐 토스카나 피엔차 언덕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풍경이 그랬다. 지금도 마음이 답답하거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면 고요하고 부드러웠던 발도차 평원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한다. 그때는 몰랐다. 토스카나의 풍경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강하게 남아 있게 될 줄은.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은 피렌체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도시들은 소도시 정도의 크기다. 윈도 배경화면처럼 펼쳐지는 발도르차 평원에 자리 잡은 도시들인 피엔차, 산지미냐노, 몬테풀차노, 피엔차 등은 이탈리아 소도시라는 콘셉트만으로 이탈리아 여행의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한번 가봤던 로마 외에 피렌체에만 초점을 맞춘 일정이었기에 피렌체와 근교의 도시(시에나, 피사, 친퀘테레 등)들만으로도 빠듯했다. 하지만 피렌체까지 와서 토스카나의 발도르차 풍경을 안 보고 가자니 왠지 뭔가 하나가 빠진 느낌이었다.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들은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기에 발도르차 평원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자가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여러 모로 편리하다.
혼자 여행인 데다가 시간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맛보기라도 다녀오지 않으면 아무래도 후회가 될 것 같아서 일일투어로 토스카나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발도르차'의 대표적인 풍경 하면 초록색의 밀밭이 화면 한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여행 성수기는 4~5월이다. 그때는 토스카나 지방 와인투어를 비롯해 다양한 여행상품이 운영되는데 11월은 비수기라 토스카나 상품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11월 하순을 지나면 비가 자주 내리기에 투어 진행이 힘들어 아예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원 모객이 잘 안 돼 예약해도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혹여 모객이 안 돼서 취소될까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투어가 확정이 됐다. 토스카나 여행은 시에나, 피엔차 소도시 두 곳과 약식의 끼안티 와인투어(토스카나 지방 식사 풀코스 포함), 발도르차 평원, 막시무스의 집으로 대표되는 사이프러스 길까지가 일일투어 코스였다. 그야말로 '운 좋게' 막차를 탄 셈이었다.
피렌체에 있는 동안에도 밤사이에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 많았는데 여행 당일 의외다 싶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토스카나 여행의 시작은 가장 먼저 시에나였다. 시에나에 대한 여행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기에 더 감동적이었던 시에나를 뒤로 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을 했다.
+ 피렌체 라이벌 두 도시, 피사와 시에나 https://brunch.co.kr/@haekyoung/240
달리는 차창밖으로 언덕 위의 작은 도시들 몇 개를 스치고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렸는데도 가도 가도 끝없는 포도밭의 연속이다. 구불구불한 포토밭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것에 지쳐갈 즈음 이런 곳에 길이 있나 싶을 정도의 막다른 길로 접어들어 안으로 한참 들어가니 레스토랑 입구가 나왔다. 가이드 없이 혼자라면 절대로 들어서지 않았을 곳이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 싸인 식당 발아래로 펼쳐지는 포도밭과 발 도로차 평원의 그림 같은 풍경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감탄 모드가 시작됐다.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일 뿐인데 이 정도의 뷰라니. 이래서 토스카나 토스카나, 토스카나 하는구나 싶었다.
산을 오르는 중에 두어 개의 레스토랑을 스쳐지나긴 했는데 여행비수기라 문을 닫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랬기에 레스토랑에 사람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현지인들 몇 분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토스카나 음식도 피렌체와 거의 다르지 않아서 메인 메뉴는 티본스테이크와 스파게티였고 사이드 메뉴, 와인과 디저트가 풀코스로 제공됐다. 특히 시에나에서 먹어보고 싶었던 아몬드가 들어 있는 비스킷 종류인 칸투치(Cantucci)와 빈 산토(Vin Santo)도 맛보라고 준비해 주셨다.
피렌체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어 보고 싶었으나 혼자서는 양이 너무 많아 먹지 못했는데 티본스테이크를 한 입 넣는 순간 입에서 살살 녹는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 티본스테이크는 무조건 레어여야 한다. 한국에서는 레어 따위는 절대 먹지 않는 내 입맛이지만 부드러운 레어는 꿀맛이었다. 소위 마블링이라는 비계가 거의 없는 이탈리아 소고기를 한국처럼 웰던으로 했다간 기름기가 없어 질기디 질긴 소고기를 맛보게 된다. 실제로 볼로냐를 여행했을 때 웰던으로 시켰다가 큰 낭패를 봤다.
피렌체에서 티본을 먹지 않아 나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같이 간 일행은 한국 사람들이 무조건 몰려가는 그 레스토랑보다도 맛이 좋다고 했다. 고기가 들어간 라고 스파게티도, 일반 스파게티도, 그밖에 음식들도 모두 맛있었다. 3종류의 와인이 제공됐는데 개인적으로 끼안띠 와인 맛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토스카나 지방의 특산 와인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무슨 맛일까 기대했던 칸투치(Cantucci)는 왜 꼭 빈 산토(Vin Santo) 와인에 찍어 먹어야 하는지 먹어보니 알았다. 칸투치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확실히 빈 산토에 찍었을 때 풍미가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빈 산토는 뒷맛이 알코올향이 강해 와인의 맛과는 차이가 있었다. 같은 풍경 아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길을 나설 차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과 '글래디에이터'가 촬영됐다는 피엔차로 향했다.
14세기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예쁜 골목을 지나 불쑥 나타나는 발도르차의 전망, 피엔차 성벽에 선다는 것은 발도르차의 전망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었다. 피엔차는 그런 도시였다.
피엔차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독특했다. 큰 아치형의 문 사이로 안으로 들어서면 어디로 가든 예쁜 골목이 길을 내어준다. 피렌체, 시에나 등 '중세'라는 타이틀을 가진 몇 개의 도시를 앞서 보았지만 피엔차의 골목을 보는 순간 '피엔차의 골목을 이기지는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엔차는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1400년대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로 지금도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도시전체가 중세인 조선시대 세트장인 셈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시대극을 촬영할 때 가장 먼저 찾는 도시가 피엔차라고 한다. 여러 영화가 촬영됐는데 그중 우리가 익히 아는 19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 주연)은 실제로는 베로나 지역 두 가문의 이야기인데 영화 촬영은 피엔차에서 했다. 또한 영화 '글레디에이터'도 피엔차와 인근 지역에서 촬영됐다.
피엔차는 중세의 풍경이 잘 남아 있어 이탈리아 사람들도 드라이브 겸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여행의 비수기라고 할 수 있는 11월이었기에 골목은 한산했고 여행객도 거의 없었지만 우리처럼 부러 찾아온 사람들도 간간히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예외 없이 아름다운 골목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성수기라면 골목마다 사람이 넘쳐날 텐데 오히려 비수기라 한적한 골목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 다만, 골목마다 더 많은 꽃이 피어있고 수시로 장터가 열리는 피엔차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면 도시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하는 건 두오모로 불리는 대성당이다. 하지만 피엔차에서만은 성당의 우선순위는 뒤로 밀린다. 예쁜 골목을 걷다 보면 발길은 자연스레 도시의 성벽이자 곧 발도르차 전망대인 곳으로 홀린 듯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골목 끝 어렴풋이 보이는 발도르차 풍경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절로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와는 완전히 결이 또 다른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텐트 밖은 유럽'의 큰 형 유해진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저 앞에 서면 절로 카메라를 댈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골목을 따라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면 마치 문이 열리듯 집과 집사이로 발 도르차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높고 낮은 구릉들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곡선에 뾰족했던 마음이 절로 다듬어지는 기분이다.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는 발 도르차의 풍경은 압도적인 풍경이라 말할 수 있는 '강렬한 한 방'은 없지만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낭만주의 화가들이 이런 풍경을 왜 그렇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직 국가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이었던 11~12세기 도시국가들끼리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기에 토스카나 지역의 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발 도르차 평원이 아닌 언덕 위에 세워졌다. 그 덕분에 발 도르차 평원과 어우러지는 언덕 위의 도시들은 토스카나 지방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이런 발 도르차 평원은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놀라운 사실은 발 도르차가 원래는 아예 경작이 불가능할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는데 300년 동안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금은 와인용 포도 재배, 밀 등을 경작하는 곳이 됐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수백 년 동안 흘린 인간의 숭고한 땀이 배어있는 발 도르차, 모든 수확이 끝난 뒤 텅 빈 풍경마저도 꽉 찬 느낌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발도로차 평원을 걸어 로마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걸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으로 따라 난 길을 걸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발 도르차 평원을 감상하는 재미도 아주 특별했다. 토스카나의 여러 소도시 중 꼭 방문해야 할 도시 중 피엔차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구도심에서 어느 골목이든 걷다 보면 이곳 성벽 전망대로 이어지니 중세의 골목과 어우러지는 발 도르차의 풍경에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성수기였다면 한때 마구간으로 사용했던 곳을 개조한 카페에 앉아 커피도 한잔 마셔보면 좋았을 텐데 비수기라 문을 닫은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얼추 발 도르차의 풍경 감상이 끝나갈 즈음, 자연스레 발길은 대성당으로 향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피엔차의 구시가는 끝에서 끝까지 약 4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다. 그럼에도 도시 안에는 성당, 광장, 궁전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지어졌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대성당 옆의 박물관에서는 계획도시로 만들어진 피엔차의 건축방식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모습도 매우 특이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는 르네상스의 특징이 그대로 적용되어 '소실점'이 건물에 어떻게 활용됐는지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공간이 작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소실점을 골목에 적용해 꺾어지도록 만든 점 등등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눈 크게 뜨고 주목해야 할 내용들이 많았다. 어쩐지, 피엔차가 그렇게 작은 도시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이유, 피엔차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었다.
피엔차는 초기 르네상스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1996년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이처럼 피엔차가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만들어지고 발 도르차 풍경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전망의 도시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교황 비오 2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피엔차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피엔차 대성당 내부는 이 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심플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화려한 것 같기도 했던 피엔차의 대성당이었다.
피엔차를 방문하게 되면, 아니 토스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아니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하는 풍경이 있다. 바로 발 도르차 평원에 줄지어선 사이프러스 나무인데 일명 '막시무스의 집'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막시무스의 집'이 피엔차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피엔차를 나서 발 도르차 평원 사이로 달리다 보니 막시무스 비슷한 집이 한 둘이 아니었다. 들판 한가운데 사이프러 나무 사이에 위치한 집들은 '농가주택'으로 숙박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숙소들은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성수기 때는 2박 이상, 심지어는 일주일 이상의 숙박만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혼여행으로 농가민박에서만 머물다 오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란다.
드디어 영화 속 장면에서 많이 보던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곳에 도착했다. 어쩌면 '토스카나'하면 떠올리는 풍경이 바로 이 집의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이미 우리 외에도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집은 한동안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촬영장소였던 '막시무스의 집'으로 알려졌던 곳인데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 실제 촬영지는 아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이 일대 여러 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실제 촬영지는 이 집에서 조금 더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피엔차를 찾는 여행객들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전 세계인의 인생숏 명소는 오늘도 열일 중이다.
이탈리아 11월의 해는 빨리 진다. 오후 5시 경이되니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온통 초록색 들판으로 윈도 배경 화면 같은 실사버전의 토스카나 풍경은 4월 말~5월 중순이고 그때가 토스카나를 여행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난 텅 빈 들판마저도 아름다운 토스카나였다.
피렌체와 다르고 시에나와도 달랐던 토스카나의 소도시 피엔차. 예쁜 골목 옆으로 또 예쁜 골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엔차는 1시간이면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런 물리적인 수치 따위는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발 도르차 풍경을 내 집 앞 전망으로 누리는 피엔차가 뒤로 멀어져 간다.
문득 이렇게 멋진 사이프러스 길을 차로 달리며 토스카나의 다른 도시들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피렌체 멧돼지 동상에 동전은 넣지 않았지만(동전을 넣고 소원을 빌면 피렌체에 다시 온다는 속설이 있다) 언젠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발 도르차 평원을 신나게 달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여행을 끝으로 이제 이탈리아를 떠나 튀르키예로 간다. 튀르키예는 또 어떤 모습을 만나게 될까.
+ 다음이야기 : 튀르키예.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