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는 여행 좋아한다는 사람치곤 한 번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카파도키아에서 몇 년씩 살다 온 지인도 있고 한 달 살기도 아닌데 터키에서만 주야장천 한 달 이상을 지내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튀르키예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매력에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형제의 나라. 동서양의 매력이 공존한다는 그곳에 닿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렌체에서 이스탄불까지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동한 다음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향해 날았다. 튀르키예는 EU국가가 아니어서 이탈리아에서 출국 심사를 따로 해야 했는데 한국은 자동입출국 시스템을 적용받는 10개국 중 하나라 바로 통과. 한국 사람만 못 느끼는 대한민국의 위상이다.
이탈리아 안녕
어학연수가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 약 두 달이란 시간 동안 어느 나라를 여행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물론 나 역시)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 여행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어 기초가 별로 없는 상태인 데다가 나이 들어서 어학연수는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루에 8시간을 온전히 공부에만 쏟아부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약 8개월이 지나 런던에서 어학연수가 끝났을 때 즈음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나라로 여행은 엄청난 준비가 필요한데 그럴 에너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대부분 다 가본 나라 혹은 도시지만 내가 가보지 못했던 도시를 다니는 것으로 정했다. 그렇게 선택된 도시가 로마, 피렌체, 이스탄불(일주포함), 바르셀로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였다.
피렌체도 이스탄불도 여행정보가 넘쳐나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지쳐버린 내 머리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스탄불에서 뭘 보고 어떻게 돌아다닐 건지는 하나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탄불 비행티켓, 한인 민박 예약 정도만 확정한 채 이스탄불로 향했다. (아무 계획없이 간 건 로마도, 피렌체도 스페인도 다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몰타와 런던도)
피렌체를 떠날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비행기 창밖으로 거대한 이스탄불이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너무 정보가 없는 상태로 이스탄불을 온 것이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몰려왔다. 공항에서 민박 가는 방법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몰랐다. '막상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는데 너무 대책 없이 이스탄불로 왔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어쩌랴 이미 벌어진 일인데.
평소라면 여행 가기도 전부터 역사, 문화, 정치, 볼거리, 먹거리, SNS까지 두루 섭렵한 뒤 떠나는 여행이어야 하는데 통상의 일반상식의두루뭉술한 정보만이 전부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다 싶었다. 몰타와 런던에서 수개월 이상을 살다 보니 다른 나라로 이동이나 여행에 대해 겁이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코로나 이후 튀르키예도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어딜 가나 바가지가 만연하고 특히 공항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다른 도시에서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불안감이 엄습했다.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수없이 이어지는 호객행위를 피해 간신히 버스 타는 곳에 도착했다. 숙소가 탁심광장 근처였기에 행선지에 탁심 광장이 쓰여 있는 버스에 올라타고도 혹여라도 내 가방이 다른 버스에 실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새벽 6시에 피렌체를 떠났는데 이스탄불 도심으로 향하는 동안 일몰이 시작됐다. 이동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퇴근차량에 맞물린 러시아워로 차가 엄청 막혔다. 버스를 타고 지루하게 달리는 시간이었지만 도심이 가까워 올수록 하나둘 사진으로 봤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리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옆에 앉았던 노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다는 내게 노신사는 대번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격하게 반겼다. 몰타와 런던에 있을 때 튀르키예에서 어학연수를 온 몇몇 친구들(30대 이전)이 있었는데 젊은(?) 친구는 '형제의 나라'에 대해 잘 몰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그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시크하게 '아, 그래?' 정도였을 뿐. 내심 나만 반가워했구나 싶었고 한국전쟁과 2002 월드컵의 기억을 직. 간접으로 가지고 있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와의 차이를 실감할 뿐이었다. 그랬는데 대뜸 '형제의 나라'라는 단어를 노신사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내친김에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한 가지 질문이 있다고 청했다. 몰타에 있는 동안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국가명이 바뀌었는데 궁금하던 차였다.
"왜 국가명을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바꿨어요?" 노신사는 너무나 간단하게 칠면조의 이미지가 겁쟁이와 동급이라 터키인의 땅으로 바꾼 건 당연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덧붙여 현재 튀르키예가 처하고 있는 국제정세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설명이 이어졌다. 간혹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도 묻는 등 해박하게 관심이 많았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궁금했는데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명함을 한 장 내민다.앞면에는 자신의 사업 명함이, 뒷면은 국제기구 명함이었다. 노신사는 미국과 튀르키예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 국제 기구에서도 일을 하고 있는 분이었다.
이스탄불에 대해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여행을 왔다는 내게 노신사는 '난민' 유입이 급증하고 있어 이것저것 주의해야 한다며 여러 가지를친절히 일러주셨다. 그러는 사이에 탁심 광장에 도착을 했다.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도착한 탁심 광장은 너무 복잡했고 어디가 어디인지 잘 분간이 안 됐다. 노신사는 혹여 내가 길을 헤매기라도 할까 봐 내 여행캐리어를 들고 숙소까지 찾아가기에 헤매지 않을 정도의 장소까지 데려다주셨다.
혹시 튀르키예에 있는 동안 무슨 문제가 발생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꼭 전화를 하라는 당부도 남겼다. 며칠 튀르키예 지방을 돌아볼 예정이었기에 지방을 다녀와서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다. 하지만 노신사와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튀르키예 지방을 돌아보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왔을 때는 많이 아파서 며칠간 숙소에서 꼼짝도 못 하고 드러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컨디션이 조금 나아졌을 때는 노신사가 미국으로 다시 출장을 가야 했기에 더 이상은 만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아무 준비 없이 도착해 살짝 겁을 먹었던 이스탄불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따뜻한 형제의 정을 느낀 첫날의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 공항
탁심광장의 밤
+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스포르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혼 세 개의 바다가 도심을 접하고 있는데 보스포르스 해협은 흑해로 이어지고 마르마라 해는 에게해로 이어진다. 보스포르스 해협이 아시아와 유럽대륙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보스포르스 해협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 유럽이고 다시 건너오면 아시아다.
이스탄불은 엄청난 대도시지만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지역은 크게 3군데다. 유럽 구시가지에 술탄 아흐멧 역사지구에는 블로모스크, 지하궁전, 아야소피아, 톱카프궁전 등이 있고 탁심과 갈라타 탑이 있는 유럽 신시가지, 그리고 우리의 홍대 분위기와 유사한 카디쿄이가 있는 아시아지구다.
세 구역으로 나뉘는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뒤로 보스포르스 다리를 건너가면 아시아지구다.
역사지구인 술탄아흐멧지구와 탁심광장과 갈라탑이 있는 신시가지
+ 낚시 천국, 갈라타 다리
그리스 비잔티움, 로마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이스탄불. 이름은 다르지만 약 2,700년간 이어지고 있는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인해 이스탄불에 대한 환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환상이 깨지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던 이스탄불과 실제로 본 이스탄불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한 건 바로 갈라타 다리에서 사람들이 낚시하는 풍경 때문이었다.
이스탄불을 다니다 보면 구글지도가 없어도 반드시 가게 되는 곳이 바로 갈라타 다리다. 이 다리는 역사지구인 구시가지와 쇼핑 스트리트가 몰려있는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이고 다리 주변으로 모스크, 시장, 카라쾨이 선착장 등이 있어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 여러 번 지나다니게 된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풍경이 이스탄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도심을 가르지는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풍경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다리 위에 다닥다닥 붙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수백은 되어 보이고 낚시 의자를 놓고 제대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갈라타 다리가 있는 골든혼 일대는 옛날부터 항구로 이용되던 곳으로 옛날에는 손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어족이 풍부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문화 중 하나였다. 여기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취미가 대부분이고 간혹 잡은 물고기를 인근 식당에 파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어떤 물고기가 잡히나 궁금했다. 정어리, 청어, 고등어 외에도 다양한데 놀라운 것은 연간 64톤이나 된다고 한다. 단순히 취미로 하는 낚시라고 하기엔 그 양이 상당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낚시를 해대는 통에 너무 어린 물고기까지 잡아대고 있어 어족자원 생태계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낚시에 대해 문제를 제기를 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하나, 실업자들의 경우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아 여기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튀르키예 경제상황의 바로미터는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숫자라는 얘기도 있었다. 코르나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상황이 안 좋은데 튀르키예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4차선 다리 위는 정신없이 차들이 지나다니고 한편에는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느라 어수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1층에서 다리를 올려다보니 다리 위에서 드리운 수백의 낚싯대가 정신없이 어지럽다. 이 일대에 고등어 샌드위치가 유명하다고 했지만 딱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였다.
도대체 내가 이스탄불에 기대한 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갈라타 다리 1층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2층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주로 취미가 대부분이지만 잡은 물고기를 인근 식당에 파는 사람도 있다고.
정신없이 어지러운 이스탄불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
+ 관광객 쇼핑스트리트 탁심광장과 이스티크랄 거리
환전도 해야 했고 이것저것 사야 할 것이 있어 탁심광장에서도 가장 번화하다는 이스티크랄 거리로 향했다. 캄캄한 저녁에 도착했던 이스탄불과 환할 때 보는 이스탄불은 참 달랐다. 낮과 밤이 다른 건 다른 도시들도 매한가지 일 테지만 왠지 이스탄불은 좀 더 큰 차이가 나는 느낌이었다.
탁심광장 일대는 이스탄불에서는 신도시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같은 느낌인데 쇼핑 아이템이 넘쳐나고 엄청난 사람들로 붐빈다. 그동안 여행 비수기라 로마도, 피렌체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붐비지 않았기에 인파들 사이로 들어가자니 살짝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유럽식 건물일색인데 그나마 특색이라면 1870년대부터 운행한 노면전차가 있어 좀 더 운치 있게 다가왔다.
내가 이스탄불에 있을 때 이스티크랄 거리에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로 최소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원래대로 움직였다면 테러 폭발이 있던 시간에 이스티크랄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계획을 일부 수정해 다른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사고를 접한 지인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뒤늦게 뉴스를 확인하고서는 나 역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는 쿠르드계 분리주의 자들과의 계속된 분쟁으로 인해 튀르키예 동부지역은 여행금지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노면전차가 다니는 이스틱클랄 거리는 명동과 흡사.
신시가지에 있던 유일한 성 안토니오성당
+ 돌무쉬(Dolmus) 타고 이슬람 목욕문화 하맘체험
이스탄불에 오고나서부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탓에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한인민박에서 밥을 잘 못 먹는 내게 죽까지는 아니어도 소화가 잘 되는 따뜻한 음식을 챙겨주는 것도 고마웠다. 끙끙 앓으며 누워 있으니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따뜻한 욕조에 몸을 좀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들었다. 마침 숙소에 함께 머물고 있던 두어 명이 하맘을 갈 예정인데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따뜻한 욕조가 간절했던 나는 컨디션이 조금 나아진 이른 아침에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하맘이 아니라 관광객이 아예 가지 않는 현지인 하맘이었다.
교통편도 버스나 트램이 아닌돌무쉬(Dolmus)를 이용했다. 탁심광장 한편에 택시와 봉고차가 서 있는 곳이 있는데 'D'라는 간판이 표시되어 있는 곳이 돌무쉬 정류장이었다. 돌무쉬는 운행시간은 따로 없고 사람이 다 차면 출발하는 승합차다. 행선지는 앞 유리창에 적혀 있었다. 요금은 돌무쉬에 타고난 다음 기사에게 직접 내는 방식인데 특이한 건 뒷좌석이 앉은 승객은 앉은 승객에서 요금을 전달하고 맨 앞자리 승객이 최종으로 기사에게 전달되는 시스템이었다. 강남에서 막차가 끊기고 나면 일인 정액요금으로 인원이 차면 운행하던 택시 생각이 났다.
탁심광장의 돌무쉬정거장
이스탄불의 특이한 교통수단 돌무쉬
관광객들이 주로 머무는 번화가를 벗어날 즈음 익숙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콘스탄티노플 시기에 훈족 등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도심을 따라 세운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우리로 치면 신라 시대인 5세기 초에 완성된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지진으로 한번 무너진 후에 5세기 중반에 복구되었고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뜬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마의 흔적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다소 실망하고 있던 이스탄불에서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불쑥 테오도스의 성벽을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 골목을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그러다 내리라는 곳에 내려 조금 걸어가니 하맘이라고 쓰인 건물이 나왔다. 공중목욕탕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위치에 상상도 안 되는 모습으로 하맘이 나타나니 신기하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스크에 예배를 드리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 했는데'하맘'은 집집마다 목욕시설이 없었던 때에 생긴 이슬람의 목욕 문화다. 이슬람의 목욕 문화인 하맘이 어떤 것인지 한 번쯤은 꼭 체험해보고 싶었지만 하맘을 본 적도 없는 나로선 너무 현지인식이라 적응이 안 됐다.
하맘이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동양인 여자가 들어가니 주인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내부 시설은 완전 시골 마을에나 있을 법한 그런 곳이었고 탕은 없는 대신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나 여기 하맘의 증기시설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나보다 앞서 온 사람이 있어 때를 밀기까지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땀을 빼자고 간 하맘에서 옷을 벗고 오래있으니 뜨거운 물을 들이부어도 겨우 가신 오한이 다시 시작됐다. 목욕을 마친 후 점심 나절 숙소로 돌아왔는데 결국 숙소에서 감기몸살 약을 있는 대로 입으로 털어 넣고 다시 드러누워야 했다.
몸살기운이 완전히 낫지 않은 나로서는 뜨거운 곳에서 땀을 좀 빼고 싶었는데 결론적으로 하맘을 다녀오고 난 뒤 컨디션은 더 나빠졌다. 그럼에도 혼자였다면 도저히 가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 하맘인데 완전 현지인식 하맘을 경험해 볼 수 있어 좋았다.
+ 어딘지는 모를 정육식당,
이스탄불 한인민박은 다른 지역과 달리 튀르키예에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은 이스탄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미 관광지는 다 섭렵한 상태였다.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곳을 찾아다니며 관광객들과는 전혀 다른 동선으로 움직이고 반쯤은 현지화된 여행객들이었다. 며칠 째 아파서 끙끙 대는 나를 보더니 영양보충을 좀 하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들을 따라나서고 보니 이스탄불 MZ 세대에게 핫하다는 카페골목과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정육식당 겸 스테이크 레스토랑이었다. 카페 골목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들이 많아 이스탄불에서도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골목이었다. 마침 카페 맞은편에 레스토랑이 개업을 하는 날인 것 같았는데 화환이 굉장히 특이했다.
이스탄불의 개업 화환, 조화가 아니고 생화다.
정육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는 레스토랑은 이스탄불을 수차례 여행한 00이 현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곳이라고 했다. 아직 우리나라 어디에도 소개된 적이 없는 곳이고 자신만이 알고 싶어 SNS에도 올리지 않고 아껴두는 곳이라고 했다. 특별히 친한 지인들하고만 방문하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그녀가 아끼는 곳이니 나 역시 레스토랑 이름은 공개하지 않겠다.
레스토랑은 나름 오래된 곳이었고 현지인들에게는 꽤 인기 있는 레스토랑이라 예약도 쉬운 편은 아니었다. 일단은 관광지가 아니고 현지인 위주의 레스토랑인 데다가 정육식당을 같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어서 가격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저렴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부위별로 다양하고 품질도 좋았다. 고기 부위를 선택하면 보이는 장소에서 고기가 구워지는 퍼포먼스는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스테이크와는 또 다른 이스탄불의 스테이크 역시 꿀맛이었다.
정육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는 레스토랑
훌륭한 스테이크에 가격도 저렴
통상의 도시들은 하루 정도가 지나면 어디가 어디인지 파악이 되는 편인데 나에게 이스탄불은 이상하리만치 감이 잡히지도 않고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해외에서 지내는 시간이 누적되면서 몸과 마음, 특히 머리가 너무 피로한 상태였고 몸살로 며칠간 몸져누울 정도로 아파서 온전히 여행에 집중을 할 수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이자 동양과 서양이 공존한다는 이스탄불이었지만 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계속 혼란스러웠고 이런 혼란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어수선함으로 내게 남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스탄불에 5일을 있었지만 제대로 다닌 건 하루 반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니 이스탄불에서 느꼈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고 제대로 알아 보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오히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혼란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는 중이다.
일몰이 아름다운
최근 이스탄불은 아주 색다른 이슈로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모발이식이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 연예인도 모발이식을 위해 튀르키예를 찾는다고 한다. 나만 몰랐을 뿐 '탈모인의 성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튀르키예는 실제로 어학연수 후에 모발이식을 위해 튀르키예를 가는 사람이 있긴했다.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튀르키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