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튀르키예, 신들의 휴양지 안탈리아
튀르키예에서 이스탄불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안탈리아'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 외에도 여러 지역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스탄불을 제외하고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카파도키아였고 그다음이 안탈리아였다. 터키쉬블루라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 특유의 바다 색깔을 가진 안탈리아를 보는 순간 '몰타와 런던의 어학연수가 끝나면 남는 기간 동안 지친 머리로 여행을 다니기보다 안탈리아에서 두어 달 보내고 한국으로 귀국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과연 안탈리아가 기대만큼 좋았을까.
+ 튀르키예의 리비에라, 안탈리아
지중해, 에게해 등 바다와 접하고 있는 도시가 많은 튀르키예에서 유독 안탈리아가 인기가 많은 이유가 궁금했었다. 안탈리아 거리를 걷다가 'Discover the Turkish Riviera'라고 적힌 여행사의 입간판 광고를 보니 그제야 궁금증이 좀 풀렸다.
'리비에라(Riviera)'는 통상적으로 해안을 의미하지만 특별히 지명으로 부르는 곳이 따로 있다. 이탈리아의 라스페지아에서 프랑스 칸까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아름다운 해안을 '리비에라'라고 지칭한다. 안탈리아(Antalya) 역시 안타키아(Antakya)까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빼어난 풍광이 이어지기에 '튀르키예 리비에라'라고 불린다. 그래서인지 튀르키예에서는 안탈리아 여행 홍보로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여름휴가'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안탈리아를 한 마디로 나타내기에 최적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안탈리아가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여러 문명이 거쳤고 덕분에 다양한 고대 문화유적을 가진 곳들이 가까이에 있다. 안탈리아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튀르키예 남서부 지역의 도시들을 편리하게 여행이 가능한 곳이다. 나 역시 안탈리아를 베이스캠프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있는 시데와 파묵칼레, 카파도키아, 에페수스까지 다녀왔다.
+드디어 만난 안탈리아, 어랏, 부산?
부푼 기대를 안고 안탈리아에 도착한 건 해가 막 넘어간 시점이었다. 안탈리아 도심으로 들어서기 직전 언덕 전망대에서 내려본 안탈리아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산이 떡 하고 버티고 있어 바다만 있을 거란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도시였다. 무엇보다 외곽 쪽에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풍경은 꽤 생소했다.
이런 풍경이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싶었는데 갑자기 '부산'이 떠올랐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안탈리아에서 숙소에 들어가기 전 신도시에 있는 콘얄트(Konyaalt Beaches) 해변에서 잠시 산책을 했다. 안탈리아를 여행한 우리나라 사람들 중 지중해 콘얄트 해변에 극찬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같이 여행을 한 사람들도 콘얄트 해변을 보고 아름답다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둑해지는 시간이었지만 바닷물이 맑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했고 11월 말임에도 수영이 가능한 날씨는 역시 지중해구나 싶었다. 하지만, 자갈로 이어진 해변, 그 해변과 마주하고 있는 즐비한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의 숙박시설과 간혹 보이는 주거지의 풍경까지 내게는 자꾸만 부산의 바다와 너무 닮은, 그러나 조금 다른 버전으로 해운대와 송정을 적절히 섞어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해운대 끝에 동백섬이 있는 것과 달리 사클리켄트(Saklikent) 산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다. 연중 따뜻한 기온의 지중해라 눈이 온다는 상상은 해보지 않았는데 겨울에는 사클리켄트에 눈이 쌓여 스키를 타러 간다고 했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내게 직접 사진까지 보여주는데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안탈리아는 어떤 곳일까 궁금증만 가득 안은 채 안탈리아의 밤이 저물었다.
저녁에 도착했을때는 상상했던 곳과 너무 달라서 안탈리아가 어떤 곳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숙소가 번화한 쇼핑거리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아침에 잠깐 신시가지를 둘러봤다. 안탈리아의 신시가지, 그중에서도 쇼핑 거리는 뭐랄까. 일관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뭔가 정신이 없는 느낌은 이스탄불과 매한가지다. 안탈리아 대부분의 문화유적은 구시가지라는 칼라이치(Kaleici)에 몰려있기에 슬슬 걸어서 구도심으로 향했다.
+ 당신이 원하는 건 구도심 칼레이치에
공화국 광장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를 바라보니 안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는 이블리 미나레 첨탑이 우뚝 솟아있고 옆으로는 모스코가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안탈리아의 모습이 비로소 눈앞에 있었다. 구도심도 구도심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칼레이치 항구(Kaleici Marina)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공화국 광장에서 바라본 칼레이치 항구는 소담스러운 느낌의 아름다운 항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오후에 건너편에 있는 케실리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서 깜짝 놀랐다. 고대부터 왜 그렇게 많은 제국들이 안탈리아 땅을 욕심을 냈는지 알 것 같았다.
구도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하나 통과해야 하는데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 Kapısı)'이다.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오현제 시기 제14대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안탈리아를 방문한 기념으로 AD 130년에 세워진 문이다.
로마의 정점을 찍었던 AD117년에서 138년까지 재위했던 하드리아누스는 수도인 로마에 머물기보다 원정을 다니고 속국을 순방하며 거대한 로마를 다스렸다. 왕이 방문했던 속국은 문을 세우거나 기념주화를 발행하는 등 당시의 다양한 문화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다. 로마에서 안탈리아까지는 지금도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이곳에서 로마제국의 문화유산을 마주하니 로마제국의 위상을 새삼 느낀다.
교과서로 배운 로마 최전성기를 나타낸 지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없었는데 막상 로마땅이었던 이곳에 서 있으니 이집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중해 안탈리아에 있는 것만으로도 로마제국이 얼마나 거대한 곳이었는지 뒤늦게 감탄한다. 이 나이에도 이런데 청소년기에 여행을 한다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생각이 얼마나 폭넓게 성장할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드니 하드리아누스 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드리아누스 문을 통과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고작 문 하나를 통과했을 뿐인데 중세 오스만 제국이 기다리고 있다. 37m의 이블리 미나레 첨탑은 더욱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모스크와 바자르까지 온통 이슬람의 세상이다. 하드리아누스 문 하나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완벽하게 나누고 있는 셈이다. 구시가지를 부르는 지명인 '칼레이치'가 '성벽'이라는 의미라니 이보다 더 직관적인 이름이 있을까 싶다.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튀르키예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말하길 몰타에 왔는데 자기는 왜 튀르키예에 있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의아했었다. 몰타가 튀르키예와 너무 비슷해 차이를 못 느끼겠다며 자신도 너무 이상해서 혼란스럽다고 덧붙였다. 그 얘기를 할 때만해도 몰타가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은 건 아니지만 몰타 기사단이 몰타를 지배하기 전 오랜 기간 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았기에 일정 부분 비슷한 면이 있을 거라곤 짐작만 할 뿐이었다.
11월 말이었는데도 꽃이 활짝 핀 안탈리아를 누가 초겨울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싶었다. 온난한 지중해의 기후는 몰타와 비슷하네라고 느끼는 순간, 불현듯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돌출형 발코니인 '발랏'의 집들, 특유의 지중해 분위기는 몰타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참 많이도 닮았다. 참고로 이슬람(혹은 아랍)의 건축양식인 '발랏'은 자신의 모습을 외부에 노출할 수 없었기에 돌출형 발코니를 통해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장치였다.
아, 이래서 튀르키예 친구가 몰타에 왔는데 외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구나.
몰타에서 6개월 정도밖에 살지 않은 나로서도 몰타와 비슷한 느낌인데 친구가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안탈리아 여행의 하이라이트, 케실리 공원 전망대
구시가지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은 다음 칼레이치 항구를 볼 수 있는 케실리 공원(Kecili Park)으로 향했다. 오전에 트램 정류장이 있던 공화국 광장 건너편으로 보이던 케실리 공원의 전망대로 가는 길은 대부분 오션뷰를 자랑하는 카페들로 가득했다. 딱히 어느 카페랄 것 없이 바다로 향하고 있는 곳들이면 다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입구가 골목으로 나 있는 카페들은 전망이 보이지 않는 대신 자신들의 어떤지 사진을 찍어 붙여 놓기도 했다.
케실리 공원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아침에 한번 본 풍경의 재탕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완전히 달랐다. 구시가지와 항구 전망만 보였던 공화국 전망대와 달리 케실리 공원 전망대에 서니 완전히 다른 안탈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직 절벽으로 깎아지른 곳에 세워진 안탈리아를 마주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야 말로 안탈리아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었다.
안탈리아는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세기 소아시아에 세워진 고대왕국인 페르가몬(Pergamum)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땅 위의 천국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지어진 도시'라는 이야기가 있다. 2세기에 페르가몬 왕국 전체를 로마에 바치면서 로마의 땅이 됐고 원래 이름은 '아탈레이아'였으나 셀주크 투르크 시대에 '안탈리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땅 위의 천국'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는 과장이 심하다 생각했었는데 지중해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는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충분히 그럴싸하게 비쳤겠다 싶었다. 지중해의 지리적 이점과 온화한 기후 덕에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부했던 안탈리아였기에 페르가몬, 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문명들이 탐을 낼 만한 도시였음을 한발 떨어진 전망대에 서고 보니 확연히 와닿는다.
항구 위쪽으로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성벽을 따라 걸어볼 수 있었는데 성벽은 전체가 그대로 남아 있긴 했지만 일부는 성벽 위쪽에 자리 잡은 카페와 레스토랑의 부속물처럼 사용되고 있어 특이했다. 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난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치 창덕궁 담벼락 일부를 주택가의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서동이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시대의 문화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안탈리아 구시가지도 좋았지만 지중해 항구랄 수 있는 칼레이치 항구(Kaleici Marina)가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 11월에도 수영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머멀리 비치(Mermerli Plajı)는 프라이빗 해변이라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성수기인 여름에는 엄청난 사람들로 붐비겠구나 싶었다. 지중해 특유의 청록색 바다는 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겨울에도 수영이 가능한 날씨다. 이러니 '휴양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안탈리아에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안탈리아를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겠다.
+ 저녁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칼레이치 항구
낮에는 안탈리아의 다른 곳을 다니다가도 해 질 녘이 되면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칼레이치 항구로 모여든다. 사클리켄트 산으로 넘어가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칼레이치 항구, 케실리 공원 전망대, 카라알리올루 공원 (Karaalioglu Park) 등 이 일대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에는 갑자기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사람들로 빼곡하다.
천천히 해가 넘어가는 동안 오렌지 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해는 저물었는데도 사람들은 항구를 떠날 줄을 모르고 어둠이 스며드는 풍경을 오래도록 품는다. 이제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캄캄해진다 싶었는데 항구 일대에 어느 순간 주황색 조명이 켜졌다. 낮에 보았던 풍경과는 다른 신비함이 안탈리아의 밤을 물들인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예쁜 칼레이치 항구의 모습이다.
+ 여행지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낮에 봐두었던 야외 카페가 밤에는 라이브 연주를 한다고 했기에 간단히 맥주도 한 잔 할 겸 해가 완전히 지고 다시 구시가로 향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겨울 쌀쌀한 날씨일 텐데 초가을밤 정도의 날씨는 안탈리아의 낭만과 여운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짧았던 1박 2일의 안탈리아와 안녕을 고했다.
+ 몰타와 다르지 않았던 안탈리아
정말 기대를 했었던 안탈리아였다. 다양한 문명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는 안탈리아지만 그런 유적들보다는 지중해의 휴양도시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청록색 푸른 지중해를 처음 본 사람들은 안탈리아의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에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몰타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안탈리아 정도의 풍경은 너무 흔한 풍경이라 나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11월 말에도 수영이 가능한 곳이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그건 몰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12월 초에 몰타로 돌아갔을 때 여전히 수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1년 중 300일이 화창한 안탈리아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던데 몰타도 300여 일은 화창한 나라다.
여행을 하는 대신 안탈리아에서 재충전하며 두어 달 시간을 보내겠다는 걸 실천에 옮기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탈리아를 오기 전에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안탈리아를 가봤다는 것에 의미를 둔 여행지, 안탈리아.
어쩌면 이게 다 몰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