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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제주 기록 | 제주노트 10월호

2025년 10월 제주 일상

by 여행작가 정해경


제주 노트 10월 호(2025)


맙소사!!! 브런치 글을 쓰려고 사진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랐다. 지난 9월 21일 이후로 'P형 여자의 허곡하영'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글을 써야지 써야지 생각은 했지만 그 시간이 두 달이나 지났다고 생각조차 못했다.


시간이 빨리 흐르게 느껴진다면 재미있게 잘 사는 것이라고 친구는 말했지만 과연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자발적 백수인 삶이 마냥 한가한 것도 그렇다고 마냥 바쁜 것도 아니지만 '백수가 과로사'한다까지는 아니어도 이상하게 계속 바쁘다. 몸이 바쁜 건지 마음이 바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것에 비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마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느끼는 삶을 기록해 보겠다고 가열차게 선언을 했지만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보니 모든 것이 애매해 큰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느끼는 것은 많아도 글로 적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어영부영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맞다. 이게 다 핑계다.


그래서, 나조차 일상이라 지나고 나면 쉬이 잊히는 것들이기에 매 달의 일을 간단하게나마 별도의 기록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따로 떼어내어 독립된 글을 적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이건 순전히 나의 흩어질 기억에 대한 기록인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사진 정리를 해두고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벌써 보름이 지났다. P형 여자 어쩔. 하하...)



10월 제주의 풍경


1. 가족 추석 여행

10월이 바빴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열흘 정도의 추석 연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추석부터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기에 제주로 이사를 한 나를 보기 위해 가족들이 추석 연휴에 제주로 여행을 왔다.


가족들은 모두 제주를 여러 번 다녀간 사람들로 제주가 처음이 아니기에 이런 가족들과 함께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어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나도 관광객 모드가 된다.


가족들과는 제주 여행을 여러 차례 했었기에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들이야 많았지만 80대 중반인 엄마를 최우선 순위에 두다 보니 여기저기 다니는 여행을 계획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제주여행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가족들에게 제주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어느새 식구 중 한 명이 사는 곳이 되어 있었다. 굳이 어딜가지 않아도 집에서 뒹굴 그려도 괜찮은, 제주는 가족들에게 그런 곳이 되었다.

그러기엔 내가 사는 곳이 너무 시내라 제주스러운 분위기는 1도 없는데도 말이다. 참 신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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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뮬리, 황화코스모스로 가득했던 새미언덕 동산, 날이 흐려서 아쉬웠다.


추석 즈음 제주는 메밀, 핑크뮬리, 황화 코스모스 등이 가득했다. 여러 곳이 있었지만 그중 엄마가 걷기에 적당한 새미언덕 동산을 선택했다. 하필이면 날이 흐리고 비도 조금씩 내리고 해서 생각보다 관람이 일찍 끝났기에 후박나무 군락지를 들렀다. 후박나무는 가끔 제주시에서 가로수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후박나무 군락지는 약 200m 남짓 가로수가 모두 후박나무 단일 수종으로 제주에서 매우 드문 풍경이다.


지난여름에 여기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보자마자 정말 반했던 곳이었다. 이곳은 한동안 제주 SNS에서 아주 핫한 여행지로 노출이 되기도 했었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습하고 더운 제주 여름을 이곳만은 피해 가나 싶을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여러 번 방문을 했던 곳이다.


그냥 시간이 남아 들렀던 후박나무 군락지였는데 가족들은 제주 여행 중에 이곳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동안 제주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라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이 후박나무 군락지가 어찌나 신기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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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많이 알려져서 웨딩사진 촬영으로도 많이 찾고 있다.


가족들도 나도 제주를 그렇게 숱하게 왔는데 다들 한 번도 못 가본 곳이 있었으니 바로 '용머리 해안'이다. 제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세계문화유산 축전 때도 용머리 해안을 찾았지만 파도로 인해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가족들 모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4번 이상을 시도했지만 이구동성으로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다.


용머리 해안은 원래 예정에 없던 곳이었는데 엄마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원래 가려던 곳을 못 가게 됐다. 마침 용머리 해안이 멀지 않았기에 탐방이 가능할까 싶어 전화 문의를 했다. 오전에는 파도로 인해 탐방을 못했지만 오후 2시부터는 탐방이 가능해서 부리나케 차를 몰았다. 오후 3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도착을 했는데 줄이 줄이 말도 못 하게 길었다. 제주는 추석연휴에도 30도가 넘었고 여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날씨였지만 30분이 넘게 땡볕에서 기다리는 것쯤은 이제껏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머리 해안에서 보이는 박수기정도 좋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한라산도 신비로웠다. 물론 '화산이 쌓고 파도가 깎은 제주 사계리 용머리 해안'이라는 타이틀답게 신비롭고 아름답긴 했다. 무엇보다 쉬이 허락받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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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용머리 해안을 한 바퀴 다 돌아 출구가 보이는 지점까지 왔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도 왜 그런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풍경은 내게는 너무 익숙하다 못해 흔한 풍경이었다.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몰타에서 살아본 나로서는 몰타가 화산섬은 아니어도 몰타섬의 지형이 용머리 해안처럼 비슷한 곳이 수두룩해서 사람들이 '우와 우와' 쏟아내는 감탄이 내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몰타와 화산섬인 제주의 비슷한 지형과 절벽에 대해서도 한번 글을 써봐야겠다.

제주 용머리 해안
제주의 지형과 많이 닮은 몰타


제주에는 10월까지만 개방을 하는 곳이 몇 군데가 있다. 그중 하나는 숲길이고 하나는 바닷길이다. 두 군데 모두 제주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모르던 곳이었다. 제주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주에 대해 새삼 모르는 곳이 많다는 걸 알게 했다


두 곳 모두 가본다 가본다 하다가 결국 10월 중순에서야 가보게 됐다. 뒤늦게 와본 걸 후회했지만(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와보고 몇 번 더 와볼 걸 그랬다) 괜찮다. 나는 제주에 사니까 내년에 다시 숲길과 바닷길이 열리면 그때 또 올 수 있으니까.


먼저, 한남사려니오름숲길이다. 한남 + 사려니 + 오름+ 숲길, 이름에 제주의 좋은 것은 다 들어 있는 다소 긴 이름의 한남 사려니 오름숲길은 일 년에 단 6개월만 개방하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원래는 남읍 난대림 산림 연구소(현재는 난대 아열대 산림 연구소)로 원칙적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아름다운 명품숲을 국민과 함께 누리기 위한 취지로 10년 전부터 개방을 했고 현재는 1년에 6개월만 특별 개방을 하고 있다.


시험림 연구소라 일일 탐방객 수를 300명으로 제한하고 시간별로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예매를 하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이다. 무엇보다 제주에서 가장 처음으로 조성된 삼나무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가져온 종자로 양묘한 곳으로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삼나무 숲이다.


서울에서와 가장 다른 점이라면 평일 이른 아침 숲을 산책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지런을 좀 떨긴 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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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 숲은 힐링 그 자체


10월 말까지만 개방하는 또 하나의 명소 '신창풍차해안도로'다. 이곳은 남부발전에서 사용하는 도로로 지역상생을 위해 4월에서 10월까지 개방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조거나 파도가 너무 거세거나 기상이 좋지 않은 날에는 통제가 되기도 한다.


만조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간조 때가 되면 이렇게 드러나는데 풍력발전기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제주 서쪽해안의 뷰 맛집을 책임지고 있다. 제주는 간조와 만조 때 물때를 잘 보고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간혹 제주 바다에 길이 있는데 만조 때는 보이지 않다가 간조 때 드러나는 곳이 있어서 제주에 오고나서부터 바닷가에 갈 때는 미리 물때표를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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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의 끝은 바다 위에 놓인 다리와 연결되는데 아쉽게도 두 다리는 중간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 통행이 되지는 않는다. 바다 위 하얀 다리는 싱계물 공원 쪽에서 출입이 24시간 가능하다. 예전에 제주 여행 때 이 다리를 건너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신창 풍차 해안도로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어쩌면 만조 때라 길이 안 보였을 수도 있겠다.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점점 더 물이 빠져서 완전히 드러난 원담위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년에는 만조 때부터 카메라 세워놓고 물이 빠지는 모습을 타임랩스로 촬영해 보고 싶다. 2026년 4월. 이 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잠시 안녕~


특별한 제주 편의점 ; CU 혼저옵서예 점

제주 서쪽은 어디에서나 일몰 명소이지만 특별한 곳을 하나 소개하자면 바로 'CU 편의점'이다. 겉에서 보면 정말 평범한 편의점이다. 제주 여느 CU 편의점과는 다르게 제주 전통적인 소품의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주에서 굳이 편의점까지 갈 일인가 싶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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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편의점 뷰가 이런 곳이라면 이젠 얘기는 달라진다. 편의점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면 이런 뷰다. 비양도 너머로 지는 해를 보고 앉아 있노라면 절로 어린 왕자의 저녁놀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제주에서 지인이 놀러 왔을 때도, 가족들이 왔을 때도 아무 말없이 편의점으로 손을 이끌었다. 다들 제주시에서 협재까지 무슨 편의점을 보러가냐고 툴툴거리기 일쑤였다. 제주 서쪽 바다를 따라 달리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는 절로 여행하는 맛이 나게 했기에 나만 믿고 따라오라 자신 있게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편의점을 들어 서는 순간, 내가 그랬던 그들도 이 편의점에 반했다.


누가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뷰를 보는 값이니 물이든, 과자든 뭐라도 하나 사는 게 도리다.


제주는 편의점마저도 특별한 감성이지 않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카페나 식당으로 만들지 않고 흔하디 흔한 편의점으로 운영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제주는 편의점 뷰가 이 정도.


10월 소소한 일상


일년은 열 두달이고 매달 마지막 날은 12번이나 있지만 유독 시월의 마지막 날만은 그놈의 노래 한 곡 때문에 절로 센치해지고 좀 특별하게 보내야 할 것만 같다. 제주에서 보낸 2025년 시월의 마지막 날은 정말 특별했다.


제주아트센트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국립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지젤'의 제주공연이 있었다. 듣기로는 국립발레단이 제주를 찾은 건 처음이라고 했다. 공연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좋은 자리들은 빠르게 매진됐고 접속을 조금 늦게 한 탓에 뒷자리와 2층 일부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좌석을 예매할까 고민하다가 거의 뒷줄을 예매해 놓고도 잘 안 보이면 어떡하나 고민이었다.


제주 아트센터를 가본 건 처음이었는데 단차가 있는 공연장이라 맨 뒷좌석이어도 관람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지인은 2층 3번째 줄인가 앉았다는데 2층에서도 굉장히 잘 보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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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본 공연이 '백조의 호수'고 단연코 최고의 공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지젤'을 보고 나니 '백조의 호수'는 바로 잊힐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1막도 좋았지만 아름답고 쓸쓸한 분위기의 2막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마터면 자리에 앉아 나도 모르게 함께 지젤의 손동작을 따라 할 뻔했다.


지젤의 슬픔과 아름다운 사랑으로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던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제주에 살면 서울과 달리 문화생활을 잘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을 텐데 기우다. 매월 어찌나 축제가 많은지 다 따라가기도 힘들고 생각보다 공연과 강의가 꽤 많이 열린다. 물론 정보력이 좀 있어야 되긴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은 서울보다 문화관람에 드는 비용이 반값 정도도 되지 않거니와 예매 경쟁율도 그렇게 높지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 생활을 즐길 수가 있다.


10월에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간 바둑기사 이세돌 씨가 제주에서 강연이 있었다. 2025년 제주 소통협력주간 개회 및 기조강연으로 'AI 시대 창의적 질문과 주도적 판단의 힘'이라는 주제로 대략 1시간 정도 진행이 됐다. TV로 볼 때는 과묵한 느낌이었는데 생각보다 진지하면서도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


현재 UNIST 특임교수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여러 회사들과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고 했어 처음에는 의외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현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인 AI 시대가 열리고 있는 요즘, AI와 직접 대결을 해 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범인의 것과 달라고 바둑의 몇 수를 내다보듯 앞선 시대를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세상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다양한 것들이 넘쳐난다. 그렇기에 내가 아는 분야와 전혀 상관없더라도 이런 종류의 강의는 무조건 참석을 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익했고 내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정말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제주는 11월 중순이고 귤나라답게 여기저기서 노란 귤이 익어가고 있다. 여름의 태양과 달리 가을의 태양은 훨씬 부드럽고 색이 깊어졌다.


여름에 느끼지 못했던 계절과 계절사이의 시간이 틈새를 파고든다.

집에서 보는 일몰이 예뻐지고 있다.


기온은 대략 18도 전후지만 한낮에 태양은 기미가 생길 정도로 여전히 뜨겁다. 18도가 이렇게 뜨거운 날씨였나 싶을 정도인데 제주도 곧 찬바람이 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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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한 지 대략 4개월.

선택과 집중이 정말로 필요한 시간.


부디, 다음 글이 더 늦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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