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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Dec 29. 2016

야근이 힘들다는 투정,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1. 새벽 3시쯤 깼다. 스탠드 불은 켜져 있고, 화장도 그대로고, 브래지어도 입은 채 잠이 들었다. 화장 지울 정신까진 없고 브래지어만 벗고 스탠드를 끄고 다시 잤다.


2. 5시 58분에 알람이 울렸다. 평소보다 방안 공기가 차다. 온몸이 쑤시다. 엊그제 1시간 동안 트램펄린 수업하면서 낑낑거렸던 게 이제야 오나보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몇 분을 미적대다 겨우 이불속에서 몸을 꺼낸다. 목욕가운을 챙겨 욕실로 간다. 데일만큼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며 샤워를 했다. 서있기 힘들어 욕조에 걸터앉아 씻었다. 머리를 말리려면 서둘러 씻고 나가야 하는데 계속 물을 끼얹고만 싶다. 샤워기 물을 끄니 내 방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알람 소리가 그제야 들린다. 혹시 몰라 맞춰놓은 추가 알람이다. 물기도 다 닦지 못하고 서둘러 방으로 뛰어가 알람을 껐다. 엄빠 깨실까봐. 


3. 8시에 출근을 해서 딱히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훌쩍 지나 저녁 6시 30분이다. 퇴근은 이미 1시간을 넘겼다. 팀원들은 밥을 먹으러 갔고 나는 일찍 퇴근하고 싶어 안 먹는다 했다. 다른 팀 팀장이 김밥을 사 왔는데 한 줄이 남는다며 주셨다. 그거라도 먹길 잘했다. 어째 일은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질 않는다. 밤 10시다.



4. 땅만 보고 걷는다. 말할 기운도 없다. 정신이 뾰족뾰족해져 가까운 사람에게 맘에도 없는 못된 말을 하게 된다. 이 시각에도 지하철은 만원이다. 저녁 약속이 많은 시즌이라 열차엔 고기 냄새, 술냄새가 뒤섞여있다. 겨우 열차 구석 틈을 찾아 쪼그려 앉았다. 지하철에 서 있으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언젠가부터 구석에 주저앉는 버릇이 생겼다. 처박혀 있다 보니 괜스레 서러워진다.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 새벽달 보고 출근해 저녁달을 올려다볼 기운조차 없이 사는 거. 눈물이 막 난다. 


5. 야근 때문에 힘들다는 투정.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까짓 일로 힘드냐며 핀잔을 줄 수도 있다. "일 많다고 자랑하니", "더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사무실에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게 어디야", "네가 원해서 회사 옮긴 거 아냐?", "그래도 월급은 많이 받을 거 아냐", "난 꼬박 밤을 새운 적도 있다구", "주말에 쉴 수 있는 게 어디야". 힘듦은 참으로 상대적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쁠 게 없음에도 온몸에 기운이 쭈욱 빠져나가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양 비관하게 된다. 


6. 내일 아침엔 회사 앞 스타벅스에 가겠다. 세찬 겨울바람을 뚫고 카페 문을 열었을 때 코 끝을 자극하는 커피 향이 참 좋다. 묘하게 안심이 된다. 인생 별거 없다. 그 찰나의 행복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겠다는,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나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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