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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CCTV

by 신지승

시골 장날이 되면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찾아간다. 나는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이제 5일장 안에서는 너무 익숙한 풍경밖에 없지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간이버스정류장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간혹 같은 동네의 사람들끼리의 검은 비닐봉지든 할머니들의 대화가 펼쳐진다. 간이 버스 정류장 옆에 펼쳐놓은 잡동사니 물건들, 칫솔도 있고 일회용 면도기도 보인다. 햇볕에 바랜 돗자리 위, 알록달록한 물건들은 마치 어렵게 소일거리를 찾아 나온 할머니들의 잔치 분위기를 돕는 듯하다. 두 손에 같은 물건 하나씩을 들고 버스정류장 안 짧은 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세탁기는 세서 옷이 다 망가지니깐 이 그물망을 사용해야 해요."

아저씨의 목소리는 흥에 겨운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난 손으로 빠는데..."

한 할머니의 대답은 짧고 무심했다. '저런 뻔한 물건을 왜 사야 할까' 하는 눈빛이 한 할머니의 눈동자에 잠시 스쳤다. 나는 연신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CCTV처럼 할머니들을 훑는다.

"그게 최곱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될 때나 바쁠 때 이걸 사용해야 합니다."

아저씨는 할머니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넌지시 그물망의 쓸모를 설명한다. 그의 말의 톤은 부드럽고 유려하다. 성격도 그림자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다. 마치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은 듯, 그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머금고 있었다. 굳이 세탁기 그물망 정도는 팔지 않아도 아무런 손해가 닥칠 것 같지도 않은 부유한 표정이다.

리 단위로 가는 시골 버스는 자주 오지 않는다. 기다림은 늘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저씨는 작은 상자를 가지고 온다.

"이 화장품은 백화점 가면 1만 5천 원인데 오늘만 특별히 5천 원에 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왜 이리 싸냐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으신데 혹은 썩은 걸 가지고 와서 파는 건 아닌지 의심하곤 합니다. 자, 여기 보시면 유효기간이 있어요. 앞으로 3년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화장품을 이렇게 싸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자신감인지 간절함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마치 명연기자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사람들의 의심을 미리 읽고 모든 의문을 해소해 주려 애썼다. 화장품 상자를 든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할머니들은 아저씨의 양손에 있는 화장품을 흘낏 흘낏 바라보았면서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몇 사람이 기다리던 버스가 오자 버스에 올라타 가버린다.

"버스가 왜 이리 안 오냐"는 한 할머니의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할머니는 벤치에 등을 기댄 채, 버스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귀는 마치 움직이는 CCTV처럼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어디 가시게요?"

"서화리."할머니의 목적지를 들은 아저씨는 생각할 시간도 갖지 않고

"서화리 가는 버스는 1시 20분에 오는데 "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후

"10분 뒤에 와요 "

할머니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왔고 사람들은 하나 둘 버스를 타고 떠난다.

다시 장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몇몇 사람들이 정류장 버스 빈 벤치에 앉거나 서서 혹은 바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

그날 누구도 물건을 사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장터쪽을 향해 서서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모네의 그림 '건초더미 연작'처럼 계절·시간을 달리해서 5일장 버스정류장을 중심으로 아침·저녁, 여름·겨울의 계절의 빛의 변화와 공기와 감정이 달라지는 미세한 차이를 담으면서 드라마의 전개를 갖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초상권이나 여러 진행문제도 복잡하다. 그래서 색다른 아이디어를 발휘해서 이 다큐와 극작업이 혼합된 작업을 함 해 보려 한다. 물론 세트촬영을 한다면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그럴 경우 독특한 풍경을 아무리 큰 제작비를 들이더라도 쉽게 재현하기 쉽지 않다. 사실적 인물들이 뿜어내는 그 로컬성과 세밀함을 얻기 힘들다. 무명의 연기자를 통한 독립영화나 얼굴 알려진 연기자의 상업영화 촬영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마을영화의 촬영방식이라야 이 로컬 미학의 드라마를 만들고 건져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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