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부산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님이 젊어서 -내가 아기였을 때- 부산에 초기 정착했을 때는 해운대였다.
아버지의 의붓 형님이 부산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었고 자가용을 몰고 다니던 꽤나 부자였다.
그 친척은 이미 오래전 돌아가셔서 기억은 희미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땐가 우리 집에 한 번
방문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세련된 부인과 함께.
그 부인은 신문을 읽었다!
아버지는 젊은 패기로 사촌 형님의 일을 도우면서 돈을 좀 벌었던가 보다.
엄마 말로는 내가 5살 되던 해던가 번 돈으로 차를 몇 대 사서 운수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기억이 또렷하진 않은데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와 나의 기억을 얽어보면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서 7일간 내려오지 않았으며 집으로 왔을 때는 이미 다 날린 상태였다고.
그때부터 우리 집은 늘 일 년에 한 번 이사를 다녀야 하는 고달픈 신세가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영도로 흘러든 것이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맞물린 시기가 아닌가 싶다.
해운대에서 갈 곳 잃은 아버지를 제주도 친척 누나가 영도로 오라고 부추겼고 아버지는 그녀의 기와집에서 세 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그 동네서 가장 큰 기와집주인이었다!
우리 가족은 영도의 영선동에서 2년 정도 정도 산 것 외는 늘 동삼동에서 이리저리 옮기며 살았다.
그래서 동삼동은 내 고향이다.
일주일 전,
지인 리브가의 차를 타고 전혀 계획에 없었던 영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 어릴 때 살았던 동네를 탐방해 보자!"
이건 차를 가진 리브가만이 제안할 수 있는 것이었다. 차 없는 나는 환호했으나
나 외 다른 사람은 그렇게 반갑지 않은 듯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둘이는 36도를 찌르는 땡볕을 가로질러 영도에 도착했고 영도 입구부터 시야를 가리는
빌딩 숲에 정신을 못 차리고 내 눈은 공중에서 헤맸다.
입구를 따라가다 보니 예전의 낯익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학동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였던 길이던가?
가슴속엔 그제야 몽글몽글한 것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청학동을 지나면 바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며 동삼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낭떠러지로 깎아질렀던 길아래 바다가 다 땅이 되어 있었다.
계속 가다 보니 내가 등하교했던 길 아래는 해양박물관이니 뭐니 건물들도 가득 들어선 데다
예전에 없던 4차선 도로가 생겨서 차를 타고 가면서도 이게 내가 살던 동넨지 헷갈렸다.
익숙한 길과 낯선 길이 끓기다가 이어지다가 다른 길로 빠지고 하기를 잠시
어느덧 내가 살던 동내를 지나치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내가 살았던 곳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자갈밭 바다가 바로 코 앞이던 동네는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곳엔 고층 아파트가 도열하듯 바다를 향해 열 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딴 곳이었다. 내가 헤엄치던 바다가 사 차선 도로가 되고 땅이 되어있었다. 그 동네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이 가옥 이십여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임을 어찌 알까?
씁ㆍ쓸ㆍ하ㆍ였ㆍ다.
동네 가운데 우물물이며.. 멋들어진 기와집이며... 청방배추김치를 잘 담가먹던 우리가 세 들어 살았던
양옥집 정*할머니도..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없었다.
그 거대한 아파트 숲 위로 그나마 눈에 익은 작은 교회가 보였다. 동네에서 고개를 뒤로 맘껏 꺾어야 볼 수 있던 첨탑이 하늘을 찌르던 웅장했던 예전의 그 교회였다.
그 교회가 없었다면 동네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교회 바로 아래가 찻길이고 그 찻길 아래가
우리 동네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보니 그 교회는 주변의 압도적인 건물들에 의해 오래된 그림처럼 지워질 듯 흐릿해 보였다.
우리 동네는 반찬가게가 없었으므로 나는 엄마 심부름으로 먼 삼거리까지 두부 한 모를 사러 갔다
와야 했는데 다행히 그 삼거리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대부분 산이고 밭이었던 삼거리 길 좌우엔 새로 지은 건물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옛 찻길은 골목처럼 좁아 보였다.
그 삼거리 어느 생선구이 집에서 리브가와 나는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옛날 기억을 불러주는 장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 고마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무서웠던 옆 반 담임 선생님이 두부 한 모를 고이 들고 가는 나를 자상하게 바라보며 웃어주던 기억도 나고 중학교로 가던 버스가 우리 동네까지 안 와서 삼거리까지 버스를 타러 오가던 길.
그때 그 찻길은 참 넓고 시원하게 탁 트여서 삼거리를 걸어 우리 집으로 갈 때 바다가 훤히 보였었다.
그런데 그 바다를 딱 가리고 섰는 아파트 단지들. 바다도 육지가 되고 산도 꼭대기만 남기고 아파트 건물들이 야금야금 산을 다 집어삼켜버렸다.
삼거리 길 아래층에는 내 발자국이 쌓여 있는데.. 이 길은 나를 기억할까?
현재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하고 연락하지 않는다. 소식도 끊겼고 친했던 친구들 중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박. 온 집안이 교회 다녀서 교회에 일이 있음 꼭 나를 불러내던 안.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던 착했던 정과 함께 중학교 교사였던 안이 내가 출산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를 찾아왔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녀들은 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이다.
동삼동 삼거리에서 밥을 먹을 때는 기억이 안 났는데 지금 글을 쓰면서 기억해 냈다.
그리고 기억의 우물 안에서 샘이 솟듯 또 하나의 기억이 솟구친다.
동삼동 정* 할머니 집에 살 때 우리 부모님이 갓난애였던 막내를 내게 맡기고 시내에 갔는데 아이가 자꾸
울어서 내가 동네 점방에 가서는 분유를 외상으로 사다가 아기 우유를 타서 먹인 것.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5살 아님 6살인 듯한데.. 그때 집으로 온 엄마는 어린 딸이 가게서 용감하게
외상을 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한다.
이후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간 다시 이사를 오고 자주 반복하였다. 동삼동에서 이사를 떠난 곳은 타지로
떠난 것이 두 번. 그 외는 영도 안에서 떠돌았다. 그러나 떠났다가 다시 오는 곳은 늘 동삼동이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나는 전학을 너무 자주 했던 친구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잊었을 수도..
우리 가족이 완전히 한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제,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홍차와 마들렌의 에피소드처럼
이후로 나의 되찾은 시간들을 걸어가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