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동생들ㅡ2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사이

by 미셸 오

내가 동삼동에 찾아가기 전의 기억들은 프로스트의 마들렌처럼 내가 다니던 길과 살던 집을 통해 기억의 창고 속에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도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꼭꼭 자물쇠로 잠가두었던 그것들을 60 후반이나 70 대에나 글로 써볼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다.


영도에 다녀온 후 며칠간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이 기억들을 지금 놓치면 아마도 기억의 저편에서 먼지만 풀풀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물쇠를 열고 그것들을 조금씩 펼쳐보기로 한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 딸을 한 번 낳았다 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기 때 죽었다. 장녀인 줄 알았던 내게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너무 어릴 때 별이 된 첫째 아기에 대한 엄마의 기억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이후 두 번째 임신으로 나를 낳았는데 울음소리가 아주 우렁찬 아이였다고.

머리숱이 하늘을 향해 빳빳하게 뻗은 아기는 배가 고프면 너무 세게 울어서 친척 아주머니들의 젖을 돌아가며 얻어먹였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기에게 줄 젖이 늘 모자랐기에 젖이 풍성한 여인들의 가슴에 안기면 아기는 그 여인의 가슴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곤 열심히 젖을 빨았다.


엄마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전복을 잘 따는 상군해녀였기에 어린 시절 아기의 간식은 밥솥에 찐 전복이었다. 밥 위에 찐 노랗게 익은 작은 전복을 엄마는 실에 꿰어 아기의 목에 둘러주었고 돌이 지난 아기는 그 전복을 하루종일 먹었는데 해녀 엄마가 물질이 끝나고 보면 그 전복은 거의 다 사라지고 실만 남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전복 맛을 정직하게 알고 있다.

내가 두 살 때 엄마는 둘째를 낳았다.

지금 호주에 사는 내 남동생말이다. 이 동생은 나와 달리 너무 순해서 한 번 아기 구덕에 누이면 뒤척이지도 않고 우유를 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큰 딸은 먹이가 부족하면 두 손을 앙쥐고 발을 버둥대며 앙앙! 울었는데 너무 대조적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부산에 있을 때였고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제주도에 잠시 와 시모와 같이 살았는데 시모는 아기가 밥 달라고 울지를 않고 잠만 자니까 아기구덕만 종일 흔들었다나. 예전의 며느리와 시모의 관계가 그렇듯이 엄마는 시모를 그 점에서 특히 원망하는 것 같았다.


동생은 지금도 그렇지만 피부가 하얗고 몸도 훌쩍하니 크다. 엄마 말로는 동생이 피부가 너무 하얘서 '백새' 즉 화이트버드라고 불렀다는데 꼭 외양이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한다. 초등학교 때는 천식에 걸려 몸이 깡말랐었는데 스스로 태권도를 해서 지금은 너무나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 오디션까지 볼 정도면 말 다했다.


엄마는 동생이 중학교 때까지 몸이 마르고 살이 찌지 않는 이유가 아기 때 우유를 잘 못 먹어서 그렇다고 했고. 하필 그 중간에 우유를 잘 챙겨 먹이지 않은 할머니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무엇을 한꺼번에 주는 분이 아니고 무척 조금씩 주어서 내가 안달이 난 기억이 난다.

우물가 앞 돌담에 뭉쳐서 끼워놓은 비닐봉지 안에는 동전들이 들어 있어서 내가 돈 달라고 하면 늘 한 푼 만 주었지 두 푼 이상 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손주들에게 자상한 할머니는 아니었고 좀 엄격했던 듯.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도 엄마는 일을 하러 먼 곳을 가끔 떠나 살아서 동생은 엄마가 해주는 밥을 잘 못 먹었다.


엄마는 그런 동생이 성인이 된 후 외국 먼 타지에 나가는 것에 엄청난 절망을 안고 한쪽 눈이 실명되고 말았었다. 그리고 죽기까지 동생에게 따뜻하고 맛난 음식을 많이 못해준 것에 대해 한스러워하였다.

가끔 아들이 한국에 올 때면 명절날 음식처럼 일주일 전부터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생이 가고 나면 우린 명절날 남은 음식을 먹듯 서서히 먹어치워야 했고.


외할아버지 얼굴은 유복녀인 엄마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 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았냐고 두고두고 엄마는 원망스러워했는데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의 잘생긴 외모를 닮은 사람은 엄마와 동생. 그리고 외사촌 남자형제 4명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 명뿐이라고 친척들은 입을 모은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병에 끌려가 남태평야 전쟁에서 죽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 이야기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풀어보겠다.

이 둘째가 태어난 지 2년 후 셋째가 태어났는데 바로 막내다. 이 막내야 말로 우리 아버지를 꼭 닮은 아이였고 아주 총명하였다.

아버지는 늘 까불기만 하고 말도 안 듣는 둘째보다는 자신을 복사하듯 닮은 이 막내를 편애한 것 같다.

나 역시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아버지는 얼굴이 동안에 잘생겼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키 큰 미녀였지만 귀염스런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 다 잘생겼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막내와 나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성격은 엄마가 씨도둑은 못한다고 한 것처럼 나는 아버지와 성격도 정말 비슷하다. 막내는 어릴 적 기억에 나보다는 더 씩씩하면서도 부드럽고 지혜로왔던 거 같다.

그렇게 우리 세 남매는 부산 영도서 쑥쑥 잘 자랐다.

그러나 내가 10살 때 6살이던 막내 동생이 차사고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내가 6살 때 동네 가게서 외상으로 분유를 사서 먹였던 그 아기다.

나무 막대기 칼을 만들어서 동네 골목대장을 하고 아버지가 사준 개구리 무늬 군인 복을 둘째와 같이 입고 좋아라 했던 것도 기억나고... 난 아버지가 막내 동생을 늘 무릎 위에 앉혀 놓았던 기억만 난다.

나나 둘째는 한 번도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막내가 죽었을 때 세 번이나 기절했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애통해했던

엄마는 그 해 대꼬챙이처럼 말랐다.

난 그때 너무 어려서 동생이 죽어서 슬픈 것보다 엄마 아버지가 죽을 까봐 더 두려웠다.


이후 3년간은 죽은 동생이 살아나서 무덤 속에서 울면서 고함을 지르면 어떡하지... 관 뚜껑을 못 열고 울면 어떡하지.. 등등의 상상에 시달리곤 하였다.

그러고 보니 둘째와 마주 앉아 막내 동생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우리 가족은 막내 동생이 사고로 죽은 후 동생의 흔적은 깡그리 없애버렸다. 엄마는 당시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남기지 않는 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태워 없애 버렸다.

그래서 막내의 사진은 한 장도 없지만 내 동생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작고 동그마한 얼굴에 총명하게 빛나던 눈! 야무지게 다물던 그 입! 이름 석자 까지도...

엄마는 지금 천국에서 막내 동생과 함께 지내고 있을까... 우리 막내는 아직도 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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