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포 -3

되찾은 기억들... 어렴풋하기만.

by 미셸 오

제주도 성산포의 학교는 운동장이 상당히 넓었다.

새로 지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성산포 일출봉 산 중턱 아래 지어졌다. 지금은 그곳이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산꼭대기까지 나무 계단도 놓이고 학교 자리는 관광상품을 파는 장소로 바뀌어 있다.

성인이 되어 성산포에 한 번 갔었는데 벌써 25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섬이 관광객들로 덜 출렁거렸을 때다. 어려서 못 올라가 본 성산 일출봉을 이때 남동생과 친구와 같이 올랐었다.

위에서 일출봉을 올려다보면 낮아 보이는 산인데 직접 올라가 보니 너무 힘든 길이었다.


나는 두 달인지 석 달인지 기억이 자세하지 않아 모르지만 성산포 학교에 1학년때 전학을 했고 거기서 몇 개월을 지낸 후 다시 또 1학년때 다시 다니던 동삼동 학교로 되돌아왔다.

내겐 첫 전학이었고 이후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열 번도 넘게 전학을 다녔다.

그토록 공부를 안 하던 내가 성산포 초등학교에서는 성적표가 너무 잘 나왔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도 중년의 여자 선생이었는데 후덕하니 좋았다. 하필 전학 후 얼마 안 되어 예방주사를

맞게 되었는데 이름도 무서운


"불주사!!"


나는 주삿바늘을 실험용 램프불에 지져서 주사를 놓는 그 장면이 너무 끔찍해서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정말 덜덜 떨렸다.


" 이제 주사 안 맞은 사람 없지?"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이제 조금만 숨어 있으면 되었다 싶었으나 나는 곧 담임에게 질질 끌려가

주사를 맞았다. 눈을 질끈 감고 맞았는데 생각 외로 아프지 않아서 괜히 머쓱해졌다.

아직도 내 왼쪽 어깨에는 그때의 불주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업 시간은 매번 즐거웠고 청소 시간에 유리창을 닦을 때면 사방이 온갖 초록빛이었다.

쉬는 시간 학교 뒷동산은 우리들의 놀이터. 잔디밭이 쫙 깔려 있었고 큰 나무는 없었다. 어디든지 막힘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엄마 없이 지냈는데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학교 주변과 집 주변의 때 묻지 않은 원시적인 자연경관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교 오른편도 바다였고 왼편도 바다였고 학교 정면 저 멀리에도 바다가 넘실거렸다.

학교 정문 위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는 작은 호텔이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가끔 우리가 놀던 산에 와서 같이 사진고 찍고 계란 삶은 것을 주기도 했다.

미술 시간에는 풀과 도화지만 가져가서는 학교 옆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 그 바닷가에서 풀로 밑그림을 그린 후 모래를 뿌리면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때 이 학교는 서울의 학교에서 보내오는 학용품을 선물로 받았다. 공책에는 리라국민학교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그 '리라'라는 발음이 이국의 나라처럼 새롭고 설렜으나 한편으로 좀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공책을 무료로 받을 상황인가?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학교 급식은 우유와 검은 빵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구수하고 맛났다. 할머니는 나의 급식비를 안 냈던가. 나는 그 빵을 받아먹지 못했다. 4교시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가는 거여서 따로 급식을 안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다만 그 빵을 두 개 받으면 꼭 내게 주는 짝지가 있었고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라갔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친구들과 바닷가에 모래사장에 밀려든 조개랑 고둥 껍데기를 주우러 갔었다.

아마 6명은 되지 싶다.

커다란 바위가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 물이 상당히 빠진 상태였는데 아이들은 그 바위 위에서 조개랑 고둥을 잡느라고 고개를 들 여유가 없었다. 바닷물이 고인 바위틈에는 얼마나 많은 고둥들이 꾸물대던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든 순간 우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바다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걸어서 도저히 갈 수 없을 만큼 바닷물이 깊어져 있었다. 이런 일이... 나도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해져 있었다. 잠시 후 우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침 바닷가에 모래를 얻으려고 온 부부가 있었고 남편 되는 아저씨가 지게에 우리들을 한 명씩 태워서 무사히 구출되었다. 당시 성인의 허리 위까지 물이 차올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도 바닷가에는 그런 바위를 '여바위'라 하여 전설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바위에 앉아 해산물을 잡다가 정신줄을 놓으면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살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해변가에 길을 뚫어 모래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 성산포 해변에는 바닷물에 씻긴 수많은

조가비와 고둥 껍데기들이 쓸려와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드는 일이 흔하였다.

어떤 표백제로 씻어도 그렇게 깨끗하게 씻을 수 없을 만큼 하얗게 하얗게 빛나던 그 껍데기들..

이제 내가 살았던 할머니 집에 대한 기억이다.

할머니 집은 성산 일출봉 바로 아래 찻길을 앞에 두고 집 정면은 일출봉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 앞마당에서 일출봉을 우러러보면 그 산봉우리가 우리 집 마당으로 쓰러질 거 같은 그런 집이었다.


마당이 꽤 넓어서 마당 한편에 텃밭이 있었고 집 뒤에는 검은 똥돼지가 살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하늘이 뻥 뚫린 것도 불편했는데 자리를 잡고 앉으면 우리에 있던 이 돼지가

소리도 요란하게 꿀꿀 거리며 내 엉덩에 아래에 딱 서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무서워서 몇 번이나 볼 일도 못 본체 도망을 쳤고 익숙해지기 힘든 가혹한 현실이었다.

돼지우리 옆에 볼일을 보도록 만들어 둔 것이 바로 제주도 화장실이다.

난 그래서 제주 똥돼지 고기라고 하면 질겁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바닷가에서 그렇게 놀고 운동회까지 한 것을 보면 내가 성산포에서 지냈던 시기가 늦여름부터

가을까 지였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기억이 자세하지 않다.


학교서 운동회가 열렸다.

평소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던 내가 그땐 큰엄마와 사촌들 속에 뭔가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운동회 때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부산에서 달리기 1등만 하던 내가 제주도 아이들의 건강함에 눌렸던지 힘이란 힘을 다 내어 달렸건만 간신히 2등을 하고는 풀이 죽었다. 성산포 아이들은 정말 바람처럼 잘 달렸다. 구경꾼들 속에서 엄마의 응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면 1등을 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성산포의 학교 운동회는 그야말로 마을 잔치였고 오후 늦게 까지 운동회는 계속되었다.

특히 남자 어른들의 이어달리기는 엄청나게 과격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야생마들의 달음질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스타트를 할 때 흙먼지가 튀어 오르고 서로

지지 않으려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과 불끈거리던 팔의 근육질들이 생각난다.

아주 선명하다.


늦을 가을 저녁이었을까? 갑자기.

엄마는 등에 아기를 업고 나를 데리러 왔다. 내가 엄마와 할머니 집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둥글고 푸른 호박 한 덩이의 꼭지를 쥐고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떠나는 나를 향해 어떤 아쉬운 말도 특별한 말도 없었다.

나의 첫 전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성산포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내게는 꿈과 치유를 주던 알프스와도 같아서 도시에서의 경쟁적 삶에 지칠 때마다 늘 꿈속에서 성산포의 바다. 산. 거리를 다녀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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