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파편들-11

라면국수. 거지. 챠밍양품점. 만화방

by 미셸 오

초등학교 때,

엄마는 우리들에게 수제비와 국수라면을 자주 끓여 주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맛없는 음식들이다.

엄마는 매번 바다에서 잡아온 것들로 따로 요리할 필요 없이 굽거나 삶거나 무치거나하는 제주도의 음식들은 기똥차게 잘 만들었지만 -가령 성게 미역국이나 보말찌개 그리고 갈치호박국 같은 것-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라면이나 소시지, 초콜릿, 새우깡 같은 신생 제품들이 나올 때였다. 당시 엄마는 가게서 파는 신생식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황당한 요리법을 선뵈었다.

그중 나았던 것은 분홍 소시지로 아버지 밥상에만 올리는 대파를 넣어 끓인 소시지 찌개였고 소시지는 내가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와 맛으로 나를 황홀하게 했다.

라면이 다 끓여졌다고 해서 밥상 앞에 앉으면 냄비 안에는 축 쳐진 국수에 꼬불꼬불한 라면가닥들이 뒤엉켜 있었다. 보기에도 맛이 없어 보였다. 국수는 라면물이 들어 짭짤했고 퍼질 대로 퍼져서 국수라면풀 때죽 같았다.

나는 라면만 골라먹고 국수는 먹지 않았다. 분명 엄마는 라면의 양을 불리려고 국수를 섞었음이었다. 그러나 음식의 양을 늘리려고 라면 맛을 망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또 하나는 수제비.

냄비 안에는 커다란 멸치가 여닐곱게 둥둥 떠서 끓여진다. 엄마는 즉석에서 밀가루 반죽한 것을 숟가락으로 퍽퍽 떠 넣는다.(물론 발효 이런 거 없음) 굵은 육수 멸치도 미리 꺼내는 일 없이 우리는 왕만두 같은 수제비 덩어리 사이에 가라앉은 큰 멸치를 젓가락으로 집어내면서 먹었다. 수제비는 그야말로 앙금 없는 큰 송편. 다 익은 수제비를 이빨로 끊어낼 때 큰 수제비 덩어리에 선명한 나의 이빨자국이

찍혔다. 정말 맛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수제비와 국수가 되었다.

한편 아버지가 쉬는 날이면 칼국수를 만든다고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얇게 써는 것을 보면

아. 오늘은 맛없는 요리를 먹는구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후 고등학교 때 처음 남포동 수제비 집에서 칼국수를 먹고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맛난 것이 칼국수였나 싶었고 국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 먹어 본 후 역시 엄마의 요리법이 문제였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후일 나이가 든 후에는 엄마가 집에서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드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식구들이 전부 만들지 말라고 입으로 거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에 왜 그렇게 또 거지가 많았던가.

밥을 빌러 다니는 거지들이 며칠에 한 번은 꼭 집을 찾아왔다.

배추밭이나 길거리 한 구석에서 누더기를 겹겹이 걸치고 머리는 산발인 데다 떡이 져서 한 뭉텡이씩 갈라져 있고 깜박이는 눈만 보였지 검은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어느 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저녁 밥상 앞에 둘러앉았는데 현관문 앞에 깡통 하나를 들고 서 있는 거지를 본다. 키도 크고 늘씬한 20대가량의 남자였는데 때는 탔지만 검은색 티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빈티지 차림을 한 멋진 거지? 길에서 예사로 보던 거지와 뭔가 좀 달랐다.

내 어린 눈에는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눈짓을 하자 엄마는 우리가 먹던 밥 한 그릇을 그 남자의 깡통에 부어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안 가고 계속 서 있었다. 왜?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 이 사람아. 반찬을 주어야지 가지~"


그랬다. 엄마는 헛웃음을 날리며 반찬도 갖다 주었다.

그제야 거지는 순식간에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우리 집은 그렇게 넉넉하지도 못 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일을 열심히 했고 우리는 학교에 육성회비를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고 학용품도 돈이 없어 못 산 적은 없었다.

난 우리 집이 오히려 남들보다 잘 사는 집이라 여겼다. 늘 지독히 아끼는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늘 형편보다 과하게 우리를 입히고 먹였던 것이다.

당시 학교 반에는 육성회비를 못 내는 아이들도 많아서 수업 시작도 전에 선생님에 의해 이름이 불리고 창피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몇 정거장이 되는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흔할 때고.

넉넉한 집 아이들은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모님들이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던 집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한 친구 집에 갔는데 3층 이상의 상가건물에 가정부까지 둔 집이었다.

실컷 놀고 2층에 내려갔더니 우리들의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 밥에 참기름을 뿌려 먹어. 밥이 맛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그 집 딸이었다. 가정부 언니가 차려준 밥상 위에는

우리 집에서 볼 수 없던 맛난 반찬이 가득했다.

친구는 참기름을 숟가락에 부어 밥 위에 슬슬 뿌리고는 우리에게도 참기름병을 건네주었다.

그냥 먹어도 맛난 밥 위에 참기름을 뿌리다니.. 참 낯설지만 가슴이 두근댈 만큼 신선했다.

창문에 길게 드리워진 커튼 하며 방마다 놓여있던 소파 하며.. 그때 예사로이 보고 지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부자친구였구나 싶다.


그런데 당시에는 하 이런 집도 있구나 정도였지 그런 집에 사는 친구보다 내가 못 사는구나. 그 친구가 부럽다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다.

요즘 그 시절을 기억할 때 3층집인지 5층집인지 기억이 가물한 그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 건물 1층의 간판 이름은 이랬다.

'챠밍 양품점'

암튼 그 친구와 나는 친한 친구들 7명의 무리에 속해있었고 어디를 가나 친구복은 있어서 늘 즐거웠다.


하지만 내게도 친구 가뭄에 걸려 어려운 때가 있었다.

이사를 해도 부산에서만 오가던 내가 3학년 때 타지방으로 잠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난 처음으로 낯선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몇 개월을 외롭게 지낸 적이 있다.

그 지방은 친근했던 제주도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난 만화방에 늘 가 있었다. 방과 후 종일 만화를 보다 보면 저녁 해가 졌다. 그때의 만화는 누렇고 두꺼운 종이로 된 표지에 스탬프로 찍은 만화였는데 중국무술 만화가 대다수였고 나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다.

만화방 주인은 아기 엄마였는데 내가 매일 자기 가게에서 죽치니깐 나중에는 자기 아이도 봐달라고 하고

나에게 만화방을 맡기고 장을 보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거의 돈을 안 내고 가게에 있는 만화를 맘껏 즐겼다.

만화방에서 만화에 집중했던 그 시간들이 책 읽는 습관을 길러 준 것이 틀림없다.

magazine-2614854_1280.jpg

아버지는 5학년이 되던 해부터 -4학년 때 부산으로 다시 이사옴- <소년세계><소년중앙><새 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를 매달 사다 주었다. 매달 소년잡지가 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남동생과 나는 책이 나올 날짜가 되면 빨리 보고 싶어서 동삼동 산길을 걸어 멀리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주택지까지 가서 그 책을 사 오곤 했다.

그때 유행했던 <태권브이> , <마루치 아라치> 같은 만화들이 다 그런 어린이 잡지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마징가 Z> <짱가> 같은 만화들도 쏟아졌다.


그 외도 <600만 불의 사나이><소머즈> 같은 외화를 보면서 우리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보냈다. 물론 흑백텔레비전이었고 꼭 오후 6시부터 시작되었다.

24시간 영상을 볼 수 있는 지금은 그전에 비하면 정말 굉장한 시대에 살고 있음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