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 『검은 꽃』, 문학동네, 2010
얼마 전 서점의 도서 판매 순위를 살펴봤습니다. 수 년전 출간된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란 책이 역주행 중이더군요.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 사건을 겪으며 우리 시민들이 국가란 존재의 실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세금을 징수하거나 공권력을 행사할 때는 명백했던 국가의 존재가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부재했다는 허탈감이 시민들을 각성시킨 것이지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존재 명분은 이 땅의 현실에서 실현된 역사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왕조시대에는 종묘와 사직이 우선이었고, 공화국이 들어서고도 국민들은 뒷전이었으니까요. 군림하되 책임은 없는 이런 행태가 시민들의 냉소를 불러왔고, 체제의 유지를 위해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악순환이 계속됐습니다. 이런 불행한 현실에 처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헬조선에 산다며 냉소적 자조를 일삼게 된 것입니다.
소설가 김영하가 쓴 『검은 꽃』은 구한말을 살던 조선인들의 (원조) 헬조선 탈출담입니다. 100년도 전에 이들이 겪은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네 이야기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체제와 껍데기만 남은 반상班常의 서열,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수탈과 빈곤의 일상은 헬조선 그 자체입니다. 천여명의 조선인들은 멕시코로 향하는 '일포드호號'에 몸을 싣습니다. 반상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희망의 땅을 향해 말이죠.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수 개월의 고된 항해 끝에 조선인들은 멕시코 땅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뱃삯과 식대를 채무로 잡은 노예노동이었습니다.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과 고통으로 바뀌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망해가는 나라의 황제에게 구출을 탄원하는 서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제 코가 석자인 황제에게 제 백성들을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지요. 일 년쯤 뒤에는 그 나라조차 망해버려서 하소연 할 곳조차 사라지는 비운에 처합니다.
처음에는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으로 버티던 사람들은 서서히 변화해 갑니다. 그들에게 국가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제 백성들을 이역만리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위해 무엇하나 해준 것도, 해줄 의지나 능력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조선에 있을 때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배에 올라탄 이래로 그같은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 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 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테는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 돌아가려네. 땅도 사고, 그는 침인지 눈물인지를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곤 말을 이었다, 물론 장가도 가야지. 새끼도 낳고.
- 김영하, 『검은 꽃』, 문학동네, 2010, 96p.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절규와 어찌 이리 닮았는지요. 이 땅을 떠나는 것만이 답이라는 사람들은 지금도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떠나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주변에 이민 떠난 사람 몇쯤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슬픈 디아스포라에 이 나라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구속당한 전前 대통령이란 자는 청년들에게 대놓고 "중동으로 떠나라"며 부채질을 했을 정도니 말입니다.
소설 『검은 꽃』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이는 결국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역만리 남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가 정부군에 토벌돼 죽기도 하고, 질병으로 죽기도 하며, 고리대금업을 하다 늙어죽기도 하고, 아편에 중독된 채 일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들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불행했던 역사는 오늘에 와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설 곳을 잃고 떠난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치적 선택으로 이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일상에서 우리의 삶이 변하려면 어림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볼 대목은 있습니다. 한국은 외형적인 성장을 추구했고 실제로 성공한 축에 속하는 국가입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가며 규모를 키우는데 전력했습니다. 하지만 성체가 되고나면 성장이 멈추듯 이제는 이전과 같은 고속성장을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개발독재시절에 포기하고 희생했던 부분을 뒤돌아볼 때입니다. 보편적인 교육기회와 의료서비스의 제공, 고용안정성 보장 등으로 국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할 때지요. 이것이 지금 국가가 당면한 과제일 것입니다. 국민이 부여한 이 과제들을 성실하고 책임있게 수행해야 할 주체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國家'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