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사회와 타인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요나단이 다윗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본이 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멘토라고 부릅니다. 멘토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멘토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멘토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1] -헬렌 켈러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난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 만에 병으로 인해 시각과 청각을 잃었고, 그로 인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수화를 통해 겨우 가족과 소통하던 헬렌 켈러는 7살에 시각 장애가 있는 특수 교사 앤 설리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설리반 선생님을 통해 헬렌은 대학교 학사 학위를 가진 최초의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인도를 배경으로 새롭게 구성하여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미셸은 헬렌 켈러처럼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집안이 부유하기 때문에 그녀는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된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인식하는 세상은 오직 "블랙"일 뿐입니다. 말 못 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입니다. 딸을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와 딸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버지는 딸을 비장애인과 동일한 사람으로서 대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모든 것을 허용하는 어머니도, 부끄러운 마음에 딸을 방치하고 딸의 허리에 종을 매단 아버지도 참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어머니는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버지는 딸에게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셸을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일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완벽한 어둠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어떤 통제도 어떤 교육도 통하지 않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한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빛이 있어야만 합니다. 장애로 인해 빛이 차단된 세계에 살고 있는 미셸을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교사: 어둠의 세계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자
그 사람이 바로 사하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미셸에게 엄격하게 예절을 가르치고 그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글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예절을 배워고 글자를 배워야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미셸이 저항하고 부모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끝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가르칩니다. 교육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미셸의 아버지는 그를 해고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고용인이 아닌 미셸의 교사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고용된 사람이라면 주인이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 짐을 싸서 나와야 하겠지만, 교사라면 학생의 필요와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해고하려는 사람에게도 당당하게 "고용인이 아닙니다. 교사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셸에게 당장 편한 방식은 부모가 하던 이전 방식이지만, 그녀에게 진정 도움이 되고 그녀를 빛으로 인도하는 것은 사하이 선생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부모는 장애인으로서 살아갈 딸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지만, 사하이 선생님은 장애를 뛰어넘어 회복될 그녀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이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선생님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미셸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고귀하게 바라보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고 변화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미셸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난 보이지 않지만 나도 꿈은 꾼다.”
비전의 사람: 상처 입은 치유자
그렇다면 설리반 선생님과 사하이 선생님이 가지셨던 교육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처럼 우리가 먼저 "상처 입은 치유자”임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설리반 선생님과 알코올 중독의 경력이 있는 사하이 선생님 모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기에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와 아픔 속에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입니다. 치명적인 상처로 인해 소망이 없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비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비전도 함께 받게 되고,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세상 가운데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 가운데 구원 얻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확대 재생산되며,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BLACK에서 WATER로의 변화를 꿈꾸며
영화의 마지막은 미셸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서 그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돌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랙이라는 세계 안에서만 살던 그녀가 이제는 선생님을 돕고 다른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가 어릴 적 사하이 선생님의 교육을 통해 처음으로 뜻을 이해하고 소리 내어 읽은 "W.A.T.E.R"를 들려줍니다. BLACK 속에만 있던 사람이 WATER를 함께 소리칠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의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증인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야기에 담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 담긴 우리의 사명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멘토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도 증인의 삶이며 동시에 멘토로써 영향을 끼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블랙에서 빛으로 인도받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빛을 전하는 증인의 삶, 멘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며 사명입니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2]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스스로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할 선택을 했습니다. 본인은 사회로부터 신뢰와 명예를 잃게 되겠지만, 그는 사회 전체를 더 안전하고 더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택은 배트맨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저는 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거듭 자문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를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제가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제 삶의 이유와 목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저는 김장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최근에 헌재 재판관에 임명된 문형배 재판관에 대한 기사를 통해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신임 헌법재판관에 문형배(54·사법연수원 18기)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와 이미선(49·연수원 26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지명했다. [3]
얼마 전 헌법재판소 판사가 되신 문형배 판사가 나와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는 나와 고향이 같다는 것이고, 둘째는 동일한 분에게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째는 중요하지 않고, 둘째가 훨씬 중요한 부분이다. 문형배 판사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그분이 김장하 선생님께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당시의 문형배 판사가 김장하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을 때 김장하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4]
제가 과학고에 진학했을 때, 재정적인 도움을 가족들에게 바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기숙사비와 생활비, 학비 등을 해결해야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입학을 했습니다. 거제도 누나 집에서 진주로 가면서 이불도 챙기지 못해서 근처 외삼촌 집에서 덮는 이불만 들고 와야 했습니다. 진주에서 막노동과 환경미화원을 하시던 외삼촌의 방에는 담배 냄새가 강하게 배어 있는 오래된 이불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불을 들고 고등학교 기숙사에 가져다 놓고 생활했습니다. 매월 5만 원씩 보내 주시기로 약속했던 중학교의 "불교어머니회"는 입학한 후 두 달 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하자 후원을 중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학하자마자 장염에 걸렸고, 농구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고1 내내 정형외과와 한의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생활비는 없었고 몸이 아파서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데까지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외삼촌이 김장하 이사장님의 한약방으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제 사정을 말하고 이사장님께 꼭 도와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김장하 이사장님은 고등학생은 후원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셨다고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외삼촌께서 학생을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이사장님께 부탁했고 허락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이사장님을 뵈러 한약방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장학금을 거절하신 상황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사장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생활비와 학비를 내가 지원해 주겠네."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분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3년간 생활비와 학비를 제게 보내 주셨습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사장님께 말씀드렸는데, 저는 공대 진학 후 신학을 전공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가기 전에 이사장님을 찾아뵙고 제 결정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때, 이사장님은 꼭 필요한 일이니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유학을 나오기 전에 찾아뵈었을 때에도 윤리학이 꼭 필요한 학문이니 잘 배우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문형배 판사에게 하신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제가 아직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도 아니고, 사회에 무엇인가를 돌려주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말은 언제나 제 마음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 말씀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장하 선생님은 가장 좋은 멘토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이 보여주신 멘토의 삶은 단순히 탁월한 사람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탁월함이 아닌 다른 가치를 보여 주셨다는 점에서 김장하 선생님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저는 제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저보다 탁월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탁월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들보다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라면,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 결과에 따른 평가가 될 것입니다. 제 삶의 목적이 그저 남들보다 더 탁월하게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이 제게는 훌륭한 가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서야 저는 그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상대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탁월한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이 사회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 끼칠 수 있는 기여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제가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자기 만족감이 커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삶의 성취들을 이뤄내고 더 좋은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제 인생이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취는 개인적으로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환경과 여러 조건들의 혜택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순전히 나만의 성취로 이루어 낸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하고,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사회에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의 일원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5]
우리는 열심히 노력했을지라도 우리가 기대했던 보상이나 성취를 이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또한 사회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 삶을 실패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성공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인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받은 것을 사회에 다시 되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자 목표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평가는 결코 사회적 성공 여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르게 질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예를 우리 동네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캐나다에서는 겨울철에 집 주변의 눈을 치우는 일이 꽤 큰 일에 속합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겨울에 눈이 오는 새벽 5시가 되면, 출근하기 전 한 시간 동안 주변 이웃집의 인도의 눈들을 모두 치우고 출근을 합니다. 이웃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하고, 몸이 불편한 노인분들을 챙기는 모습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녀를 본받아 저도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쓰레기차가 재활용 쓰레기통을 비우고 나면 저도 제일 먼저 뛰어 나가서 쓰레기통들을 이웃집 문 앞으로 다시 가져다 놓습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제 이웃에 기여하는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를 타인보다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에 두기 보다, 우리 생애를 통해서 타인과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데 두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다른 이들을 더 행복하게 살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1] Hourly History, Helen Keller: A Life From Beginning to End, 36.
[2] The Holy Bible: New Korean Standar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Pr 29:18.
[3]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320500098#csidxf2f591d8f60fbfb9646fea22d74572a
[4] http://slownews.kr/70110
[5] The Holy Bible: New Korean Standar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Lk 10:2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