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 창 너머로는 길 건너의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요사이는 공사 기술이 좋아졌는지 겨울인데도 공사는 쉬지 않고 진행되어 하루 밤 자고 나면 높이가 달라지듯이 올라간다. 올라가는 속도만큼 바삐 움직이는 인부들, 날이 추우니 모두 얼굴까지 옷을 입고 있다. 중간중간 비닐로 철근 기둥을 감아 놓은 것을 보면 추위 때문에 온도를 유지하게 만들면서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다른 계절에 비해서 노력이 두 배나 드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철근을 촘촘히 엮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물건을 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게다가 이 추운 날씨에라니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울까? 따뜻한 실내에서 공사 현장을 바라보다가 추위를 뚫고 일하는 누군가의 아버지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잠시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인 무사 세묜, 배불뚝이 타라스 그리고 벙어리 누이 말라니야, 그리고 늙은 악마와 세 새끼 마귀 이야기’
톨스토이는 이렇게 길고 복잡한 제목으로 글을 썼다. 제목만 읽기에도 숨이 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원래 제목은 놓아두고 ‘바보 이반 이야기’라고 줄여서 말한다.
어느 마을에 부유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큰 아들 세묜은 무사로 황제에 충성하러 전쟁터로 나간다. 둘째 아들 타라스는 장사하러 도시로 나가고 막내아들 이반은 누이동생과 고향에 남아 허리가 휘도록 일을 했다. 큰 아들 세묜은 군인으로 출세를 해서 귀족 출신의 아내와 결혼도 하고 넓은 땅도 받게 된다. 둘째 아들은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부잣집 딸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렇게 부자가 된 두 아들은 자기의 욕심의 비해서 아직도 재산이 적다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조른다. 자기들 몫으로 3분의 1씩을 달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사족 하나. 이 농부에게는 3남 1녀의 자녀가 있다. 그런데 재산은 4등분이 아닌 3등분하여 물려준다. 그때 만해도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보잘것없었으니 딸의 몫은 아예 없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딸의 재산 상속권은 17세기에 없어졌다가 1990년 민법 개정으로 다시 부활한 상태다. 또 말라니야가 벙어리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당대 현실에서 발언권이 없었던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여성의 처지를 상징한다고나 할까.)
아들들의 요구에 아버지는 이 재산의 대부분을 이루어 낸 이반의 뜻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반은 선뜻 형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평화롭게 재산 분할이 이루어진다. 어떤 일이 이렇게 순순하게 해결된다면 현실에서는 아주 이상적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좋은 문학 작품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는 작품이 되려면 갈등 구조가 필요하다. 대체로 선과 악이 다투도록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붙잡아 놓는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늙은 악마와 마귀들이다. 악마는 자기 부하인 마귀들을 시켜 이반의 형제들이 싸우도록 부추긴다. 마귀들의 계략에 빠져 큰아들 세묜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둘째 타라스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하지만 이반은 악마의 꾐에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악마의 명약을 이용해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결혼을 해 나중에는 왕이 된다.
이반의 집에 남아 있던 누이 말라니야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누구든 ‘먹을 것을 좀 주세요.’라고 부탁해 오면 따뜻하고 너그럽게 돌보아준다. 단 게으름뱅이만 빼놓고. 게으름뱅이들도 슬며시 끼어들어 같이 밥을 먹으려 하는데 말라니야는 정확한 원칙으로 이 사람들을 골라낸다. ‘손에 물집이 있는 사람’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남은 음식이나 남긴 음식을 먹도록 하는 것이 식사 제공의 원칙이었다.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의 무능과 일하지 않는 귀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동시에 손과 허리를 쓰는 일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부분을 ‘손에 물집이 있는 사람’들의 노고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추위를 참아내며 열심히 집을 짓고 터널을 뚫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가 편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나. 성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신자인 톨스토이는 성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노동하는 이의 권리가 우선으로 보장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우직하고 미천해 보이는 바보 이반을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주인공으로 해서 말이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
어떤 코미디언이 청소년에게 조언했다는 말이다. 우스갯소리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이 단 한 줌이라도 공부를 더 했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의 욕망도 한 자리 실려 있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정관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나부터도 추운 날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도 능력이 부족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따로 있고, 그렇기에 노동 환경이 열악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부 안 하면 그렇게 고생하는 노동자가 된다. 너 그러고 싶으니?’ 하는 식으로 공포심을 주면서 공부를 권장해서도 안 된다.
도시의 하늘과 땅에는 전깃줄과 수도관과 가스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 연결선은 내 삶으로 들어와 내가 먹고사는 일과 내 핏줄과도 연결된다. 이 관이 막히거나 끊어지게 되면 우리에게는 길어 먹을 물 한 모금 없다. 손에 물집이 잡히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 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다.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추울 때 추운 데서 고생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날이 빨리 와야 한다. 올해는 나 혼자 말고 우리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