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B Dec 26. 2019

부부싸움 현장을 가다

남산의 달밤, 부부 산책 일기

    

올해 성탄절도 어김없이 차분하다. 길거리를 요란하게 채웠던 캐롤송도 없고, 북적북적 들뜨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다. 차분하기만 한 성탄의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던 나는 일부러 사람 많은 명동과 남산을 찾아가 보자고 남편을 꼬셨다. 연애 시절 사람구경하고 관찰하는 것이 취미였던 남편도 흔쾌히 따라나선다. 두 딸은 벌써 친구들과 성탄을 보낼 만큼 컸고, 부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이젠 제법 많아졌다.  

    

남산! 갑자기 결혼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올랐던 남산이 떠오른다. 그날도 바람이 몹시 불고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도 유독 찬 바람이 많이 불었다. 시니컬했던 동료는 바람 부는 만큼 흔한 것이 바람이라고 이야기했었지. 오늘은 다행히 베이지색 오버코트와 두꺼운 레깅스 치마를 입은 덕에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을 향한다. 1번 출구로 나와 버스환승센터 5번 표지판 앞에서 402번 버스를 타고 후암약수터에서 내렸다. 두리번거리던 둘을 보고 지나가던 젊은 할아버지가 어딜 가냐고 묻고 한 정거장 전으로 다시 내려가라며 길안내를 해준다. 할아버지 말을 뒤로 한 채 남편은 구글 지도 지름길을 검색해 위로 올라갔다. 이럴 땐 공간 위치 감각이 좋은 친구를 둔 게 참 편하고 좋다.

     

한적한 산길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1km쯤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 온 뒤 맑아진 서울의 전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을 감싸고 있는 나무들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붓한 계단 정상에 올라서야 그 계단길이 소월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소월의 시와 무슨 연관이 있는 길일까 궁금함을 간직한 채 마음속으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속삭였다.

     

오랜만에 등산을 한다. 그것도 밤에 서울 한복판 남산을 오른다. 밤공기도 나쁘지 않다. 산 길 아래 펼쳐지는 전망도 좋다. 남편도 옛 생각이 나는지 슬며시 내 손을 잡는다.

      

남산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큰 애 5살 됐을 때쯤,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고 싶어 남편이 모는 차에 올랐다. 네이버 지도를 프린터 해서 길을 나섰던 남편은 긴장한 탓에 구로와 영등포를 뱅뱅 돌며 제자리걸음을 했었다. 결국 남산 케이블카는 물 건너갔다. 우리 둘은 대판 싸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싸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남편과 엄청 심하게 싸우고 나서 나만 따로 차에서 내렸다. 남편은 집으로 씩씩대며 돌아갔었다. 분을 참지 못했던 나는 연신내 친구를 불러내 폭풍 수다를 떨고서야 겨우 진정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텔레비전에서는 엄청 심한 바람이 불어 남산 케이블카가 정지한 채 매달리는 사고가 있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휴~ 안도의 한숨도 몰아 쉬었다. 만약 남편과 싸우지 않고 별일 없이 남산에 도착했더라면 우리는 사고가 났던 남산 케이블카에 갇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생은 참 모를 일 투성이다. 부부싸움 덕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남산에 가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거리도 생겼다.

 

남편은 얼마 전 남산 유스호스텔로 직원 연수를 다녀왔다. 덕분에 남편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며, 여기가 전망이 좋고, 버스 정류장은 저 아래라며 신이 나서 아는 척을 한다. 남산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들떠 있던 남편에게 감기 기운에 좋다는 뱅쇼를 주문해주었다. 나는 카푸치노 한잔 따뜻하게 받아 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니 기분이 좋다.      


역사적인 부부 싸움의 현장, 남산에 다시 왔지만 우리는 그렇게 타고 싶었던 케이블카를 타지 않았다. 긴 줄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걷는 게 너무 좋아진 탓이 더 크다. 케이블카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발바닥이 아프도록 걷고 또 걸었다.


산 아래  대도시 밤 풍경을 말없이 품고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사랑의 자물쇠들이 속절없이 매달려 있다.  남산의 달밤은 그렇게 세월을 품고 깊어만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많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