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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B Feb 21. 2020

살아있다는 건, 기억이 나를 위로하는 일

그 언니는 깐깐하고 대쪽같고 끝소리가 약간 카랑카랑 떨리는 목소리를 지닌 선이 고운 사람이었다. 내 곁을 비켜 지나온 세월이 30년을 훌쩍 넘기는 동안 그 언니는 멍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듯 한 곳을 보고 있었다. 기억에 살아있는 동안 사람은 좋든 나쁘든 생생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있다. 하지만 밝고 싹싹하고 부지런했던 언니는 느릿느릿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알 수 없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늙어간다는 건 사사로운 기억을 하나하나 까먹는다는 것, 생생한 기억이 하나 둘 뭉뚱그려져 무엇인가를 했었다는 기억 하나만을 남기는 과정인 거 같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고, 오로지 무엇인가를 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어렴풋함만이 남는다. 나는 오십고개에 세세한 기억과 뭉뚱그려지는 기억 중간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다. 점점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고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그러다 문뜩 내가 그런 일을 했었지 스물스물 기억이 피어오르면 기억해내고 말았다는 성취감과 문제해결의 쾌감지수가 높아진다.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서 손을 움직이고 녹슨 뇌를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슬며시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런 날은 내가 떠올린 기억들과 손잡고 춤추면서 한참을 놀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다는 건 기억이 나를 위로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든다는 건 그런 기억을 하나둘 상실하는 것이리라. 기억이 살아있는 동안 더 열심히 섬세하게 기억하고 표현하는 일을 놓으면 안되겠지. 실마리를 붙들고 가다보면 언젠간 풀리고야 마는 매듭처럼 끝을 보게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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