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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15. 2018

눈총에 아픈 사람들의 세상

HIV/AIDS 사업장 들어가기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그러나 에이즈가 뭐냐고 물으면 내 안에는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옮을까 너무 두려운 죽을병’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알지 못해서 더욱 막연한 공포가 커졌다.


  대학교 동아리 친구들과 인도 하이데라바드로 단기 봉사를 가면서도 가장 두려웠던 건 단연 에이즈였다. 3주 중에 대부분은 종족 박해 피해 어린이들과 지냈고, 에이즈 사업장에는 불과 3일 방문했을 뿐인데도... 고작 그만큼 들어가면서도 쭈뼛거리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숙소를 옮긴 첫날 팀원들과 처음으로 이야기한 솔직한 감정 또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사실 에이즈가 전염되는 경로는 얼마 없다. 큼직하게 나누어 보면 성 접촉, 에이즈 환자의 피를 수혈받는 경우, 오염된 바늘이나 주사기를 곧바로 재사용하는 경우, 신생아가 산모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 정도로 정리된다. 즉 피와 피의 접촉 혹은 성과 성의 접촉이 아니라면 전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악수나 포옹 등 일상적 접촉, 식사를 함께하는 것,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 같은 모기에 물리는 것 등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그러니 에이즈 환자와 결혼을 한다면 모를까, 친구가 되는 정도로는 대체로 안전하다.


이 사진 속에는 보균자와 아닌 자가 섞여 있지만 같은 음식을 나눠 먹은 우리는 안전하다.

  그럼에도 에이즈 환자와 가까이 지내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에이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가서 본 사람도 몇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이들을 죽이는 건 에이즈보다 눈총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은 몸보다 마음이 아픈 일이 더 많았다. 나는 오래전 한 소설에서 읽은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알까? 눈총이라는 단어에 왜 총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지를."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에 나오는 문장이다.) 에이즈라는 병은 전염병이고, 에이즈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많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뿐일까?


  에이즈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에이즈가 사람에게 빨대를 꽂아 힘이란 힘은 다 쭉쭉 들이마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은 면역력,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당연히 체력, 이에 따라 경제력, 사회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힘마저 모두 쭉쭉 들이킨 뒤에 그 사람을 패대기쳐 죽이는 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빨대 끝에는 에이즈라는 의학 진단과 함께 사람들의 편견과 눈총도 있다.



  단기 봉사를 하는 동안 에이즈 환자 집 3곳을 방문했다. 에이즈 사업장에서 내가 접한 건 그게 다였다. 에이즈 사업장과 NGO를 연결하는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음에도 사업장에서 다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단기 봉사 기간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기억, 흰 눈에 뽀드득 찍힌 첫 발자국처럼 선명하고 강렬한 그 기억 하나뿐이었다.



  처음 향한 곳은 과부 혼자 사는 집이었다. 흔한 집이 하나 있고 그 마당에 공동 화장실과 함께 움막집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흔한 집’이 그곳의 갑(甲), 집주인 집이었고 우리가 찾아간 과부는 그 움막집에서 월세 900루피(한화로 약 1만 8천 원)를 내며 살고 있었다. 사진으로 찍어 흑백 처리만 하면 ‘전쟁 통에 피난민들이 임시 거처로 지은 움막집’ 따위의 설명을 달고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한 집이었다.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집 안 한쪽에는 거적때기 같은 잠자리, 다른 한쪽엔 얼기설기 쌓아 둔 부엌살림. 겉만큼이나 속도 옹색했다.


  생쥐처럼 자그만 몸을 붉은색 사리(인도 여성들이 입는 전통 의상)로 감싼 과부가 덤덤하게 자기 인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더 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고 웃던 그 과부의 얼굴이 어두워진 건 한 순간, 7년 정도 이어진 결혼 생활을 ‘hell’이라고 표현할 때뿐이었다. 남편은 과부의 몸에 에이즈라는 흔적을 남긴 채 먼저 죽었고, 여자는 남편이 죽은 이유를 곧 자기 몸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병들고 홀로여도 지금이 결혼 생활보다 좋다며 바지런히 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한 무더기 외국인이 과부 하나를 찾아온 것이 신기했는지 이웃들이 연신 우리를 흘낏거렸고, 주인집 여자도 우릴 보고 활짝 웃었다. 그러나 우리가 갈 때쯤이 되니 자꾸 과부를 떠밀며 다소 거칠게 뭐라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이냐고 현지인 간사에게 물어보니 ‘이 여자를 데리고 가라’는 말이었다. 때리다시피 떠다미는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 주인집 여자가 외국인들에게 뭘 기대했는지 그제야 보였다. 서로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어영부영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 과부와 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딸만 HIV 음성, 엄마와 아들은 양성이었다. 아주머니는 손님을 맞아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이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사리 자락으로 닦으며 현지인 간사에게 뭔가 서러운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나중에 들으니 아주머니는 격일로 가사 도우미 일을 나가는데, 그 날은 버스 정류장에 있다가 너무 힘이 없어 쓰러졌다 했다. 왜 우리에게 전화하지 않았냐는 간사의 말에 아주머니는 번번이 신세 지는 것도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제 엄마의 눈물 젖은 사리 끝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많아야 열예닐곱도 안 됐을 여자아이. 아픈 엄마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들어야 하는 그 나잇대 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팀원 중 하나가 통역을 통해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물어봤을 때, 아이는 분명 자기의 모어로 들은 그 말이 외국어라도 되는 양 알아듣지 못했다. 현지인 간사와 아이가 심각하게 몇 마디 주고받다 결국 조심스럽게 답했다. 현실과 밸런스가 너무 맞지 않아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나이 때 꿈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나는, 유치원 때부터 장래희망 그리기를 하고 자란 우리는 놀라면서도 씁쓸해했다.


  그 집을 나서니 어느새 저녁 무렵, 우리는 때마침 아이 돌잔치가 있다는 집에 갔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일가족이 모여 우리를 맞아주었다. 여태까지 다닌 집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단칸방에서, 그러나 전혀 다른 밝은 공기에서 우리는 만났다. 누구는 침대에 누구는 의자에 더러 누구는 바닥에 급히 깐 돗자리에 적당히 둘러앉았다. 작은 케이크와 풍선 두어 개가 전부인 돌잔치였다. 우리는 가는 길에 산 선물을 내밀었다. 불과 두 달 전에 갔던 조카의 화려한 돌잔치가 오버랩되어 기분이 미묘하기도 했고, 동시에 에이즈가 꺼뜨릴 수 없게 희로애락이 이어져 가는 삶의 촘촘한 단면을 본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도시 곳곳을 굴러다닌다. (현지인 간사의 딸과 함께)


  시간상 세 가정밖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마지막 밤에 다 같이 둘러앉아 있는 동안 현지인 간사들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개중 유독 가슴 아파서 지금도 떠올리면 눈물 나는 이야기는 어느 날 이들을 찾아왔다는 창녀들 이야기다. 남자 가족들, 얼굴도 못 본 먼 친척이 아니라 오빠나 아버지나 삼촌 같은 보통의 가족 일원들이 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고, 억지로 끌어내 창녀로 만들었고 이들은 그 과정에서 HIV에 감염되었다. 이들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해요?” 물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한다. 본 적도 없는 이들이 오래 괴로워하며 흘렸을 눈물이 생생했다.


  또 하나 깊이 남아있는 기억은 어떤 여자 아이다.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에 에이즈로 부모님을 여의고 쭉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현지인 간사들은 연말연시가 되면 알고 지내는 에이즈 가정들을 모두 집에 초대해 잔치를 하는데, 우리도 그 날 가서 같이 밥도 먹고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했더랬다. 해서 나도 그 날 그 아이를 보았다. 간사 손을 붙들고 하염없이 우는 할머니 옆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아이, 공연을 보는 내내 옆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아이. 그 날 아이는 돌아가기 전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간사 중 하나에게 자기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간사 부부의 아이들보다 끽해야 두어 살 많은 나이의 아이가, 그 가정을 보며 얼마나 쓸쓸했을까 생각하니 참 속상했다. 그 날 들은 여러 개의 아이들 이름 중 유일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내가 그 해 1월에 만난 사람들은 이들이 전부다. 그러나 앞으로 2년 동안 나는 결혼식, 졸업식, 장례식 등등 다양한 삶의 순간에 그림자처럼 함께 서 있을 거였다.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의 어떤 날 같이 차이를 마시거나 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NGO가 내미는 손을 그들이 잡을 수 있도록,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여 작은 연결고리가 되는 것, 그뿐이다. 작은 일이지만 내겐 참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공항으로 가는 길,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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