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Sep 09. 2018

마지막 사랑니를 빼면서

이제 내게 남은 사랑니는 없다


우리는 같은 골목에 있었지.


  다시 만나고 싶었던 이들을 만나고,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공항으로 출발한 때는 오후 햇살이 기분 좋게 풀어지는, 바야흐로 황금빛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 들어서면서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도 울면서 떠난 적 없는 곳을 이렇게 울면서 떠난다. 마치 한 번도 한국에 돌아간 적이 없는 것 같은, 이제야 인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2년 전 같은 날짜엔 제법 가뿐하게 떠났는데, 불과 한 달 머물고 떠나기를 이렇게 발이 무거울 수가 없다.

  이렇게 인사하고 돌아가면 얼마나 긴긴 그리움의 날들이 이어질지 기약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슬펐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언젠가 또 이곳을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이건 가능성과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누구도 계산 같은 거 하지 않았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나의 인도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가서도 꾸준히 느껴지던 우리의 연결고리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앞으로도 나는 여기서 만난 이들을 사랑할 것이고, 우리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겠지만, 이전과는 다르리라는 것을.

  

또 다시 안녕, 인도.



  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반 년이 됐다. 나는 한국에서 전혀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며칠 전부터 입안이 욱신거린다 싶어 손가락으로 짚어보니 사랑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경악했다. 사랑니를 그 동안 세 개나 뺐다고 이제 나지 말란 법은 없지만, 한두 개만 빼고 끝나는 사람들도 많다기에 나도 모르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 고생했는데 설마 더 하겠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인간 고생의 총량은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매번 잊는다. 사랑니 세 개가 우후죽순처럼 앞다투어 올라오던 시절에는 적어도 놀랍진 않았는데, 2년 가량 잠잠하다가 갑자기 느끼는 사랑니의 공격은 당혹스러워 더욱 아팠다.


  이전 사랑니 세 개는 모두 인도에서 뺐다. 첫 사랑니는 집에서 쫓겨나 있던 시절에 뺐다. 나는 인도에서 아이들과 함께 몇 십명이 한 집에 살았는데,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가 아닌데다가 외국인도 있어 단연 눈에 띄었다. 비교적 이웃들과 잘 지내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극우 힌두교도들이 들이닥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져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그렇게 칫솔 하나 챙길 새도 없이 나와 다시는 그 집에서 밤잠을 자지 못했다.


  돌아갈 집이 없으니 하릴없이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때 첫 사랑니를 뺀 다음 앓아누운 시간이 괴로운 한편으로 외려 고마웠다. 갑자기 무풍지대가 되어 버린 일상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때였으니까. 무척 센 진통제를 먹고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걸 느끼며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며칠의 기억이 온통 그뿐이다. 단지 언니들이 끓여주는 죽을 먹는 게 참 고맙고 따스했다는 기억만 짙게 남아있다.


  한참 앓고 나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마늘을 다지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다진 마늘통이 비어 있었고, 내겐 무엇이든 할 일이 필요했을 뿐이다. 예상치도 계획하지도 않은 무위의 시간, 왜 이렇게 된 건지도 설명해 줄 이 없던 그 시간에 심란한 마음으로만 갈팡질팡할 뿐 도무지 무엇도 하질 못하던 차였으므로, 나는 그때 마늘을 다지며 행복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첫 걸음이었다. 인간에겐 적당량의 노동이 꼭 필요하단 것도 새삼스럽게 실감하며, 그렇게 첫 사랑니를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난리통을 겪고 결국 이사한 집에서 두 번째 사랑니를 뺐다. 전에 살던 집은 넓다란 2층 집에 마당을 품고 있어서 어디서든 서로가 보이는 구조였는데, 이사한 집은 더 좁되 층수가 많은 형태라 이전 집이 비해 서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춘기가 된 아이들의 마음에도 공간에도 거리가 생겨났다. 그러니 한 집 살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대화 한 번 안 하고 하루를 후루룩 넘길 수 있는 환경이라,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인력은 더 적었다. 사랑니를 뺐을 때 죽을 끓여 주던 언니들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래서 사랑니를 빼고 돌아와도 쉴 틈이 없었다. 반대쪽 사랑니도 비슷한 시기에 올라온 탓에 곧 빼야 할 것 같은 상태라 더욱 힘들었다. 사랑니를 빼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랑니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기분이란. 진통제 기운에 맥을 못 추는 날 보고 아이들은 졸리면 자라며 까불거렸다. 졸린 게 아니라 어지러운 거고, 그 이유는... 차곡차곡 설명을 해 주니 아이들은 저도 사랑니가 나는 것 같다고 심각해졌다.


  네 입에 나는 건 지난주 과학 시간에 배운 어금니란다, 입 벌려 숫자까지 세어 가며 말해주어도 어린 얼굴들은 혹시나 하며 불안해했다. 아니 남들은 다 어금니라지만 나만 이게 사랑니면 어떡하냐고. 어린 시절 똑같은 걱정을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앞 사람의 등을 보며 사는 것 같다고, 그러니 더욱 어깨를 펴고 멋진 등을 보여주며 살아야겠다고 제법 훈훈한 결말로 하루를 맺었던 기억이 난다.


  세 번째 사랑니를 빼기 전에 우리는 또 한 번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직후라 갑자기 환경이 너무 급변한 데다가 학기말이라 긴긴 여름 방학이 코앞이었다. 그때는 그 집에 사는 스태프도 단 둘뿐이어서 무진장 고생을 했다. 수능 끝난 고3 교실 같은 분위기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기분이랄까. 사랑니를 빼고 왔다고 내가 드러누우면 다른 한 명이 그걸 다 감당해야 할 판이었다.


  그 날따라 아이들은 왜 그리 말을 듣지 않는지, 입 열기도 힘든데 결국 큰 소리를 내야 했다. 힘 주어 말하다 꿰멘 자리에서 피 냄새가 느껴지고서야 아이들을 재울 수 있었다. 조용한 거실에 혼자 서 보니 마음속이 쑥대밭이었다. 결국 혼자 펑펑 울고, 같이 지내던 친구와 서로의 지친 날을 다독이고 나서야 하루를 곱게 마무리했다.



  세 개의 사랑니를 각각 다른 집에서 뺐는데 어느 하나 올바르게 난 게 없어서 매번 잇몸을 째고 대공사를 벌여야 했다. 그 시기란 게 어쩌다보니 죄다 그 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인지 내게 사랑니를 뺀다는 건 단순히 이를 빼는 느낌만은 아니다. 마음에서도 살을 째고 힘주어 뭔가를 끄집어내고 한참 끙끙거리며 고통을 다독여야 하는, 인생의 어느 한 조각이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에서 마지막 사랑니 발치 예약을 잡고는 문득 생각했다. 인도에 간 지 서너 달만에 첫 사랑니를 뺐고, 그 후로 기승전결의 주요 고비마다 사랑니를 하나씩 뺐고... 이제 인도에 대한 글까지 닫으며 마지막 사랑니를 빼는구나. 사랑니와 함께 시작해 나의 인도는 이제 끝난다.


  마지막 사랑니는 다행히 올바르게 났다. 그래도 받쳐 줄 아랫니가 없으므로 빼는 게 낫다고 무심하게 툭 말하고 의사 선생님은 힘주어 사랑니를 뺐다. 이번만큼은 잇몸을 째지도, 앓아 눕지도 않았다. 다만 꼭 두 번째 사랑니를 뺐던 날처럼 날씨가 을씨년스러웠고, 세 번째 사랑니를 뺐던 날처럼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허했다. 그래서 그 날 하루 종일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첫 사랑니를 뺐던 그 날처럼.


  사랑니를 모두 뺐다. 이제 내게 남은 사랑니는 없다.









써니디디의 인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위해 글을 다듬는 동안에도 인도에서 많은 소식이 날아왔어요. 그루샤의 글을 퇴고하다 그루샤 소식을 듣는 등...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닐 텐데 그 주의 글과 맞물리는 소식이 날아들어와,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글을 연재하는 시간이 소중했어요.


그 동안 읽어 주시고 댓글로 마음 나눠 주신 분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편하게 읽히는 글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이 깊은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중에 좋은 기회를 찾아볼게요. :-)


다음 주에는 <당신이 인도에 대해 궁금한 8가지>라는 제목의 번외편으로 찾아옵니다. 마지막 인사니만큼 좀 더 즐겁고 가벼운 인도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이에요.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_~

써니디디 드림.



이전 08화 사랑은 페이즐리를 타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