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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Sep 02. 2018

사랑은 페이즐리를 타고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는 사뭇 다른 커리 향,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경적 소리... 인도는 처음 방문하는 이들의 모든 감각에 신선한 충격을 쉴 새 없이 던진다. 때로는 싫은 기억으로, 때로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흩어지지만 어떤 것은 끝끝내 여행객의 발에 감겨 떨어지지 않는다. 내겐 인도의 직물도 그랬다.


  인도 직물은 좋기도 좋지만, 그 다채로움이 일상 곳곳에 묻어 있기에 더욱 그랬다. 여자들이 전통 의상을 일상복으로 입는다는 게 내겐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인도에서도 청바지와 티셔츠, 원피스 같은 옷차림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인도에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여자들이 전통 의상인 사리나 꾸르띠를 입고 지낸다. 그 옷자락 하나하나가 다 시선을 끈다.



  페이즐리 무늬, 꽃무늬, 나뭇잎 무늬... 다양한 무늬에 색깔마저 다채로워 옷 한 벌마다 이야기 하나씩은 캐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게다가 옷을 입는 방식조차 하나의 이야기 같다. 긴 천 하나를 통으로 휘휘 감아 사리를 갖춰 입는 과정은 어떤 의식 같은 기분마저 들게 엄숙할 때도, 고전 소설 속 어머니들의 머릿수건처럼 바쁘고 고단한 생활 느낌을 물씬 담아낼 때도 있다.


  꾸르띠는 또 어떠한지. 긴 원피스 같은 상의에 바지를 받쳐 입고 머플러 비슷한 천을 어깨에 두른다. 벙벙한 바지도 있고 쫄바지 같은 바지도 있는데, 원피스에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조합이 잘 맞는 색으로 바지와 머플러 색을 고른다. 그 단호한 색깔 철학에 익숙해지다 보면 '깔맞춤'의 귀재가 될 수 있다. (단점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알게 모르게 계속 깔 맞춤을 하게 된다는 거... 어쩐지 색깔이 맞아야 마음이 편하다.)



  가정 방문을 다니며 본 일상의 그 모든 천이 아름다웠다. 서랍장에 곱게 개켜 놓은 옷을 가리기 위해 걸어 둔 사리 천부터 침대 시트와 베갯잇도 죄다 즐거운 무늬로 덮여 있었고, 방 문과 창문마다 걸려 있는 얇은 커튼도 바람 불 때마다 산들산들 제 고운 면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음과 가장 가까운 직물은 역시나 옷이다. 매일 비슷한 단색 일상에서 색색깔의 옷을 뒤적거려 고르는 건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한 번씩 옷가게에 가서 맘에 드는 꾸르띠 하나씩 사 들고 나오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나는 늘 꾸르띠를 입었다. 사리는 입고 벗는 과정부터 입고 있는 동안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데다가 복부가 드러나기도 해서 내 일상엔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기념으로 입어 본 정도다. 그럼에도 몇 번 사리 천을 사러 낯선 가게를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스태프들에게 선물하기 가장 무난한 것이 사리였다. 동네마다 재봉틀 놓인 가게들이 있어서, 천만 사서 선물하면 그 천 색깔에 맞춰 사리 천 안에 입는 상의를 자기 사이즈대로 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선물하는 입장에서 제일 선택하기 쉬운 아이템이자 받는 입장에서도 반기는 아이템이었다.


어느 날의 꾸르띠.
딱 한 번 입어봤던 사리.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한국에서부터 다짐했다. 이번에도 사리를 사러 가야겠다고. 다짐보다는 소원에 가까웠다. 꼭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만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인 상대였다.




  내 마음속 1번인 아이였다. 2012년 단기 봉사팀으로 인도에 처음 갔을 때에 에이즈 보균자라는 걸 알고 만난 상대로는 내게 아이가 처음이었다. 인도에서 외운 첫 이름이었으며, 후에 아동 결연이 시작되고 실제로도 결연번호 1번— 즉 결연 최우선순위 아동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신 가정보다는 한 분만 계신 가정, 한 분만 계신 가정보다는 부모님이 아예 계시지 않은 아이를 우선순위로 삼았다. 1번으로 아동 결연 후원을 받게 된 아이 "그루샤"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사이였다.


  아직도 이따금 떠오른다. 2012년 그루샤를 처음 만난 그 날, 연말연시의 흥겨운 분위기에서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멀어지는 사람들 틈바구니... 먼지 쌓인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뒤돌아 손을 흔들던 그 모습. 그 날 우리 스태프를 찾아와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넌지시 했다던 아이.


내가 늘 바라보며 나를 다잡는 사진. 내겐 무지의 공포를 딛고 처음 잡은 손이었다. 처음 만난 날 그루샤의 손이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할머니가 무릎을 붙들고 하는 하소연, 학교에 HIV 보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이가 매일 받았을 눈총... 그루샤가 밟고 사는 세상은 종잇장 위를 걷는 듯 불안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루샤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결연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얼굴도 그루샤 얼굴이었다. 감사하게도 그 얼굴은 결연이 시작된 후로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전까지 그루샤는 어두운 얼굴에 말수가 극히 적었다. 그루샤의 할머니는 나를 보면 늘 눈물 흘리며 하소연을 했고, 그루샤는 뻣뻣하게 그런 할머니를 말렸다. 딱히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듣는 귀가 필요해 나를 붙잡는 할머니 모습에 상처를 받던 예민한 감수성이 성격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내 옆에 붙어 앉아서 말간 눈으로 이런저런 걸 묻고 있었다. 그렇게 밝고 싹싹하고 말도 잘 하는 줄 그때야 알았다.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날로 보여주는 그루샤를 두고 우리는 회의를 했다. 그루샤를 조금 특별 케이스로 삼자고 야심차게 꿈 꾸었다. 그루샤가 조금 더 탄탄한 자존감으로 바로 서서, 도움받는 성장기를 지나 언젠가 도움 주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게 우리 특별 케이스의 목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적표 속 그루샤는 늘 '성적 우수하며 행실 단정'이었고, 우리 결연 아동 중 나이도 제일 많아 곧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학비와 식량 지원으로도 확 밝아진 아이지만, 특별 케이스로 지정하면서부터는 그루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썼다. 우리는 두세 달에 한 번씩 그루샤를 데리고 나가서 같이 옷을 사고 밥을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감사한 날들이었다. 모든 아이를 다 사랑했지만 그루샤는 내게 “특별히 특별”했다.


  한국에 오기 직전에 나는 아주 멀리 있는 그루샤의 집을 찾아갔다. 도시 외곽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여기에는 버스가 몇 시간에 한 대 올까 궁금해질 만큼 외진 곳. 그 작은 마을에서도 가장 옹색한 모양을 하고 있는 그루샤의 집은 빛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게 어두컴컴했고, 천장 마감이 없어 얼기설기 얽힌 지붕 안쪽이 바로 보였다. 먼지나 벌레가 바로 방으로 뚝 떨어지는 일이 일상다반사일 것 같았다. 사실 방이라기보다는 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그루샤의 집. 오른쪽에 보이는 게 개미집이다. (같이 찍은 아이들은 스태프 딸들이라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한쪽 벽 모서리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개미집이 있었는데, 힌두교 신앙 때문에 제거할 수는 없다고 했다. 너무 커서 징그러운 건 둘째치고 위험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와중에도 수행평가 과제물이나 학교에서 받은 메달 같은 것들이 곰팡이 핀 선반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 집을 나서는 마음이 무거웠던가 가벼웠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밖에는.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며 그루샤를 안아주고 그 집을 나섰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루샤가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연락을 해 준 후임 친구도 심란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의 삶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결혼 자체는 여러 모로 축하할 일이다. 게다가 아이가 여태까지 딛고 살아온 그 불안한 삶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갑작스럽게 학업을 중단하고 결혼해도 놀라운 건 아니었다.


  실제로 동네에 있는 에이즈 클리닉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는 보균자들끼리 결혼하기도 했고, 주변에서 알음알음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루샤의 남편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상대라 했다. 비슷한 연령대에 서로의 몸 상태를 다 알고, 전염 걱정 없이 하는 결혼. 이런 혼처가 언제 또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아이들이 사춘기 때 '나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질문을 얼마나 던지는지 그간 수 차례 들어왔기 때문에, 그 마음 십분 이해가 갔다.


  예비 시댁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원하면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도 했다고 들었다. 물론 그 말을 순순히 믿기는 어려웠다. 설령 정말로 흔쾌히 한 말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집안일이며 육아가 아내에게 쏠려 있는 분위기에서 그루샤 성격에 공부를 이어가기 어려울 게 뻔했다.


  아쉽긴 했으나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내 삶이 아니라 그루샤의 삶이었으니까, 그루샤가 언젠가 사회에서 어엿한 직업을 갖고 살길 바라는 건 나의 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 결혼이 너무 갑작스러운데다가, 우리 스태프들한테 끝까지 쉬쉬한 결혼이어서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현지인 스태프들은 그루샤가 정말 작은 꼬마였을 때부터 보아왔다. 스태프들 집에 살고 싶다 넌지시 말할 때 그루샤의 마음은 대강이나마 진심이었다. 언제나 마음의 어떤 말이든 다 쏟아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는데, 서로 눈물 닦아주고 같이 웃으며 지내왔는데, 왜 일언반구 말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을 서둘렀을까. 결혼 이후로 왜 우리와는 연락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루샤는 물론 할머니도 어영부영 전화를 끊어 버리곤 했다. 이윽고는 그루샤의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모두 침통해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루샤가 원치 않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것, 그것뿐이었다. 아마 상대가 HIV 보균자가 아닌가보다, 그루샤 몸 상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었지만 맞다면 모든 게 다 설명됐다. 우리 스태프들은 연령대나 고향이나 어느 것으로도 그루샤와 접점이 없는 어른들이었고, 조금만 알아보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 생각은 그루샤가 지금 밟고 있는 세상도 그다지 탄탄하고 편안한 세상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이를 떠올리면 다시 마음 한 구석이 짜르르 아팠다. 알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스태프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루샤 이름을 입에 올렸다. 결혼 후 어언 1년,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그루샤에게 한 번만 더 전화를 걸어 달라고... 전화를 받기는 할지, 받는다 해도 나를 만나주긴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사리 가게로 얼른 가고 싶어 몸이 달았다.


  꼭 다른 선물보다도 사리를 사고 싶었다. 여태까지 녹록하지 않았던 삶을 옷자락으로나마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고 싶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꼭 온몸에 휘감기는 사리 천이었으면 했다. 반짝반짝해서 가장 좋은 날 입을 만한 것으로 사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스태프는 그냥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평범한 무늬가 더 좋을 거라고 했다. 그 조언을 받아들이고 스태프 안목을 따라 자줏빛과 금색이 얼기설기 무늬를 이루고 거울 조각이 장식으로 붙어 있는 사리를 골랐다. 내 눈에 예쁜 천은 아니었지만 나보다는 사리를 매일같이 입는 인도인 눈을 더 믿는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날을 감싸 끌어안아 주는 것도 좋겠지. 어떻든 아이를 덮어주고 싶었다. 그루샤라는 가명은 "온기"라는 뜻이다.


그 날 아이를 위해 산 사리.


  그루샤의 바뀐 전화번호를 모르니 스태프들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한국에서 써니디디가 왔는데 결혼 축하 선물을 주고 싶어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거짓도 아니었거니와 우리 연락을 탐탁지 않아하는 할머니에게 선물이라는 단어라도 솔깃하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전기가 나간 방에 모여 앉아 있는 내내 두근거렸다. 나는 청승맞게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라 꾹 참으며 손끝을 말아쥐었다.


  1년 동안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선물이란 단어에 혹한 건지, 외국인 찬스였는지, 누구 말마따나 간절히 바라서 온 우주가 도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할머니는 순순히 그루샤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잠시 후 나는 놀랍게도 그루샤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알던 그루샤보다 훨씬 말이 어눌해져 있었지만 그 한숨처럼 작고 수줍던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거짓말처럼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이 잡혔다. 그루샤가 남편과 함께 스태프의 집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내가 사리 천을 끌어안고 있는 동안 스태프들도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남편의 체형을 알 수 없어 직접 와이셔츠와 바지를 맞출 수 있도록 천을 재단해 선물로 준비했다고 한다. 어떤 마음인지 서로 너무 잘 아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쇼핑백 두 개를 나란히 두고 두 사람을 기다렸다.



  아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그루샤는 환하게 웃으면서 걸어왔다.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키가 조금 자랐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늘 꾸르띠를 입고 있던 아이가 청록색 사리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낯설었다.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하기 무섭게 그루샤는 내게 귓속말을 했고, 그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들어가 앉았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도 모르게 꼬마신랑 같은 느낌을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내 눈에 소녀로만 보여서 그런지. 남편 되는 사람은 키가 훌쩍 컸고 나이는 몰라도 뭔가 그루샤에 비해 좀 더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공부만 하며 자란 그루샤에 비해 세상 풍파를 좀 더 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달까. 그래도 제법 싹싹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추측은 다행히 틀렸다. 두 사람 다 HIV 양성이었고, 서로의 몸 상태를 알고 한 결혼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같이 사진 몇 장을 남겼다.


  두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이야깃거리를 상실한 사이였다. 어색하게 끊어져 버린 세월의 간극을 메우고 활기찬 수다를 떨기란 쉽지 않았다. 근황을 물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루샤는 귓속말로 했던 말을 소파에 앉아서도 연신 반복했다.


  “후원을 다시 받고 싶어요. 식량 후원만 해주세요.”


  결혼하고 소식이 끊기면서 자연히 우리의 후원 아동 목록에서도 이름이 빠졌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학비 지원은 필요 없어도 매달 쌀과 식용유 등을 포장해 주는 식량 패키지는 받고 싶다고,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마치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후원을 받고 싶다고. 후원이 필요하다고. 할머니도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다고.


2년 전 인도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난 날 찍은 사진. 팔찌는 그 날 선물 받은 것.


  내게 그루샤가 특별했다고 해서 그루샤에게 나도 특별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재회를 기대한 게 아니었다. 다만 내 마음을 모두 담아 사리 천으로 감싸주며 마무리짓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런 재회는 너무나도 씁쓸했다. 아이가 아무리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들 NGO 후원 목록으로 돌아가는 건 물론 불가능했다. 결혼을 했고 가정을 꾸렸으며 학교로 돌아가지도 않을 그루샤는 이제 어른의 몫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정말 어렵고 고되다면 매달 식량 패키지 하나 보내는 것쯤이야 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상황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옷 한 벌과 분위기만으로 삶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남편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심각한 남루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손을 붙든 데서 간곡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로 간절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돈으로 도움을 줘 봤자 결국 그루샤를 더 괴롭게만 만들 것이다.


  아이가 어떠어떠한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하고 꿈꾼 건 내 자유였지만, 그러니 어떤 모습이어도 딱히 실망할 이유 같은 건 없었지만...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서는 씁쓸한 이유가 있었다. 죽고 못 살게 친밀한 사이까진 아니더라도 이렇게 지갑 취급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후원의 목표는 단지 배만 채워주는 게 아닌데, 그 긴긴 날들 함께하며 그 목표를 향해 같이 걷고 있다고 느꼈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한참 혼란스러웠다.


  널 후원하겠다 말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좀 애매했다. 스태프들은 일단 앞으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며 대화를 마무리지었고, 그 부분은 남편에게도 확답을 받았다. 나중에 통화하면서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결연은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 받을 수 없다고. 그 말을 듣는 그루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다. 남편은 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지.


  그 날 그루샤의 남편은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미 진작에 그루샤네 할머니가 말해준 바로는 일수 놓는 일을 한다고. 아마도 후자가 맞을 거라 생각한다. 남자에게선 땀 흘려 정직하게 짐을 옮기는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의 인상이 풍겼다. 부디 통상적인 선의 일수 놓는 것까지만 하는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방에서 돈을 쥐어 짜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길, 그래서 짧은 재회에서 아이가 반복한 대사가 사실 남편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 원래 뭔가 요구하는 성격도 아니었던 아이가 그렇게 채근하듯 말하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예스라고 말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붙들고 있을 것처럼 내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던 두 손도 낯설었다. 할머니까지 운운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루샤 성격답지 않다. 언어의 장벽으로 할머니와 대단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사이임을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마음 약해질 포인트가 어디일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서 만든 대사 같은 느낌.


  어쩐지 처음 구입할 때와 너무 다른 모양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삶을 감싸주고 싶은 마음으로 사리를 내밀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황급히 고맙다고 말하던 아이가 그 선물을 받고 기뻐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순간까지도 염불 외듯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애써 웃는 것밖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남편과 아이의 관계가 이 일로 소원해지지 않기를, 아이의 결혼 생활이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에이즈 사업장에 있으면서 내 손 붙들고 각자의 슬픔을 헤아리며 울던 아주머니들을 많이 보았으니 그루샤도 그런 아주머니들의 푸념을 많이 들어 알 것이다. 그런 제각각의 불행 중 어느 하나도 닮지 않았으면 한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러나 여전히 아이의 삶이 보호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회는 끝났다.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희망을 그리는 일을 했지만 늘 상황이 그렇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고래 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걸 풍문처럼 전해 듣기도, 유산 소식을 전하며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눈을 마주하게 되기도 했다. 강간 피해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까 마주친 남자가 강간범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떨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핏덩이였던 아이를 기찻길에 내버려두고 돌아와 여태껏 이 남자 저 남자의 옆자리를 전전하며 HIV를 옮기고 다니는 여자가, 말을 하지 못해서 수화로 가슴 치며 전하는 이야기도... 기찻길까지 따라왔던 이모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제 어머니가 어딜 어떻게 다니는지 소리 없이 알아버린 아이가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는 순간도...


  희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야기들 틈바구니를 걸어 다닌 시간이 있었다. 집을 돌아오는 길 일부러 먼 길을 골라잡아 한참 걸으며 심란한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만 한 집 사는 아이들 얼굴을 웃으면서 마주 볼 수 있었던 날들이, 인도 살던 때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적어도 우리의 뱃머리는 희망을 향하고 있다 믿었다. 그래서 내가 쓴 글도 지루하리만큼 늘 같은 패턴으로 끝을 맺곤 했다. 자가복제 같다 느끼면서도 그 패턴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향하고 있던 곳은 어디였을까.


  물론 가난하다고 나이브하지는 않다는 걸 안다. NGO가 지갑 취급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은 스태프들이 가진 방향성을 이해하고 같이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누구보다도 그루샤가 단연 으뜸이었으므로 유독 이 경험이 쓰라렸다. 오래전 그루샤의 결혼 소식을 전해 주었던 후임자 친구에게, 지금은 한국에 있는 그 친구에게 이제는 내가 전화를 건다. 우리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지? 그렇다고 말해줘. 제발.


  사실 알고 있다. 이 문제는 누구도 답할 수 없다는 걸. 그저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할 나무를 기다리며 씨앗을 심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인도를 떠날 때 스태프들에게 선물 받은 옷. 이번에 처음 입었다.


  2년 전 인도를 떠나올 때 스태프들이 내게 선물해준 옷이 있었다. 그 동안 잘 보관하다가 이번에 처음 꺼내 입었고, 이번에 가져간 다른 인도 옷들은 모두 두고 왔지만 이 옷만큼은 소중하게 들고 왔다. 언젠가 인도에 다시 갈 때 또 입고 갈 것이다. 그 시절의 내게 남겨진 것이므로.


   오늘도 어지러이 흘러가는 옷 무늬마다 이야기가 한 줄기씩 산다. 어쩌면 이런 옷자락처럼, 그 시절 우리가 심은 씨앗들 중 어떤 것은 이미 자라 나뭇잎 무늬가 되었고 또 어떤 것은 꽃무늬가 되었지만... 어떤 것은 복잡한 페이즐리 무늬로 새겨지느라 시간이 더 걸리는지 모른다.


  2년 후에야 처음 입어본 이 옷처럼 아주 나중에야 소중한 이야기를 품고 피어날지도 모른다. 개중에는 영영 피어나지 않는 씨앗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한들 거기까지는 난 모른다. 다만 그 시절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마음만큼은 그때와 똑같이 곧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페이즐리 무늬를 타고 총천연색으로 펼쳐진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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