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모르는 악몽
눈 마주치는 순간 박혀들어 잊히지 않는 사진이 있다. 그런 사진들은 으레 집단기억으로 남는다. 독수리 앞에 몸을 웅크린 작은 아이 뒷모습이 그랬듯, 해변에 축 늘어진 작은 시체 사진도 모두에게 깊이 남았다. 빨간 티셔츠와 남색 바지, 고무로 밑창을 댄 신발. 금방 일어나 모래를 툭툭 털고 환하게 웃을 것만 같은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단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곳에 누워 있을 뿐.
아이도 한때는 살아 숨 쉬며 부모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마도 아일란이라고 이름을 부르면 햇살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온 집안 분위기를 맑게 만드는 아이였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비슷한 그런 풍경에서 어른들은 아이를 길러내고, 그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렇게 전통은 한 겹 더해지고, 개인과 국가는 명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고작 3살에 세상을 떠나 해변에서 발견됐다. 출발할 때만 해도 아일란의 부모가 두 아이를 꼭 안고 떠난 길이었다. 안전한 곳을 찾아 브로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쥐여주었지만, 안전벨트도 구명조끼도 없는 여정. 마치 그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대변하는 것만 같은 여정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일란의 아버지 한 사람뿐이고, 바다가 삼킨 수많은 시체 중 아일란의 작은 몸이 해변에 쓸려왔다.
그 사진 한 장이 유럽은 물론 미주, 아시아를 덮고 한국까지 파도치게 만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리아 내전이라는 단어는 이제 더 이상 대중의 시선을 끌지도 못한다. 분명 심각한 문제라는 느낌이 어딘가에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피부에 소름이 돋지도 별 생각이 나지도 않는 그런 단어가 되어 버렸다. 지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 먼 나라인 데다가, 내전이란 말 뒤에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말에 무뎌지고 있다.
그럼 언어 뒤에 숨어있는 것들을 보자. 시리아 내전 이전에 아랍의 봄이 있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곳곳에서 벌떼 같은 움직임이 일었다. 군사 독재나 부패 정권에 대한 분노가 시민 저항으로 이어졌고, 봄기운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봄 날씨는 언제 어떻게 몸을 뒤틀지 알 수 없다. 하필 시리아에서는 그중에서도 내전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아니 어디서든 인생이 으레 그렇듯, 시리아 내전 또한 한두 가지 이유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개인과 단체들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깊게 자리한 이슬람 종파 간 갈등, 정치적인 입장 차이 같은 것들이 때로는 함박눈처럼 때로는 먼지처럼 오래오래 쌓여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민들은 평소에는 먹고사는 존엄성을 위해 불만이 있어도 눌러 참는다. 그럼에도 도저히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순간이 있다. 수많은 시민을 거리로 내모는, 그래서 마침내는 혁명에 불을 댕기는 사건이 있다. 그때 참다못한 사람들이 터져 나오면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된다. 1919년 3월 1일이나 1987년 6월 10일 같은 순간들. 시리아에서는 정부가 학생 시위를 유혈 진압한 사건이 바로 그때였다. 그때 도화선에 붙은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시리아 내전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이 참상은 여느 국제전보다 복잡하다. 외부 세력도 많이 연결돼 있다.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와 긴밀한 사이라서 아사드 정권을 옹호했고, 미국은 시민군의 손을 들면서 시작했다. 여기에 영국, 프랑스, 이란, 이스라엘과 터키 같은 국가들도 속속 개입하면서 시리아는 겹겹이 복잡해진다. 얼핏 전형적 국제전 같지만, 20세기의 세계 대전과 달리 이들은 연맹이나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국가 단위로만 개입한 것도 아니다. 헤즈볼라 같은 종교 기반의 정치 집단도, 국가가 없는 쿠르드 민족도 있다. 여기에 IS까지 튀어나와 미쳐 날뛴다.
게다가 이들은 “정부군 편”과 “시민군 편”으로 깔끔하게 양분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적과의 동침 느낌으로 느슨하게 얽혀 있고, 그러다 보니 어제까지 같은 입장이었던 이들끼리 갑자기 충돌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발표하자, 터키가 대뜸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쿠르드족은 미국과 함께 IS 격퇴에 애쓰고 있었으므로 시리아 문제에 있어서는 터키와 궤를 같이 했으나, 둘은 전통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터키는 쿠르드 민족이 혹시나 독립국가 건설을 할까봐 늘 노심초사 경계해왔다. 군대 철수라는 적극적인 외면은 터키 입장에서 국제사회 눈치 없이 쿠르드족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쿠르드족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배신감을 표현할 외교력조차 없는 이들이었지만, 미국 내부를 포함해 전 세계가 경악했다. 결국 급한 대로 손을 뻗다 보니 어제까지 적이었던 시리아 정부와 미묘하게 이어졌고,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중재 역할을 자처했다. 미국은 부랴부랴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미 많은 쿠르드족이 죽었고 흩어졌고 불안해졌다.
이런 식으로 전선은 계속 점점 모호해지고 잔인해졌다. 그 10년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요약하기는 어렵다. 길고 지난한 이야기들이다. 중동의 역학 관계나 단체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겐 더더욱 그렇다. 싸움과 싸움 사이 안보리 결의안이 몇 개 나왔고,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내세워 평화안을 세웠고, 휴전 표결을 시도했고…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나, 사태 해결은 되지 않았다.
이 모호한 가운데 확실한 건 딱 하나, 10년째 고통받고 있는 시리아 사람들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죽었고, 더 많은 이들이 난민이 되었다. 시리아에서는 한 세대가 사라진 셈이라고 들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사라진 건 아니다. 어떤 이들은 “화이트 헬멧”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하얀 헬멧을 쓰고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파편에 깔린 이웃들을 구하러 다닌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딘가를 상실하며 부유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촌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보고 공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9살짜리는 무슨 수험생이 시험 이야기할 때 같은 표정이었다. 참 싫지만 자기 일상에서 빼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하는, 눌려 있는 데 익숙해진 얼굴.
그런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2013년 이미 억울하게 집 떠난 이가 900만이었다. (국경을 넘으면 난민, 시리아 국경 내부에 있으면 국내 실향민으로 구분하는데 이때 당시 난민이 250만, 국내실향민이 650만이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이미 2014년에 시리아 난민 수가 2차 세계 대전 난민 숫자를 뛰어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난민과 국내 실향민을 합치면 1,300만을 훌쩍 넘어섰다. 엄청난 숫자지만, 정말 이 숫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큰 숫자’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문제는 시리아 난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얼굴은 없거나 있어도 너무나 희미하다는 것이다. 있는 힘껏 끌어모아 봐야 기억 속 희미해진 아일란 사진, 어떤 이들에겐 영화 <가버나움>을 찍은 소년 자인 정도.
체감하기보다 시리아는 가까이 와 있다.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고 8번째 봄이었던 2019년 3월, 국제 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은 광화문에서 200인이 모여 합창을 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여기 시리아 아이가 나와 이야기를 하고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다. 영상을 보는데 아이가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나는 흠칫 놀랐다. 14살짜리가 저렇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만큼 긴 시간 동안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거다. 그동안 우리 옆에 있었단 건데, 그림자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한동안 제주도 예멘 난민이 이슈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위장 취업으로 온 거라고들 했다. 당시 인터넷에는 불안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다. 내국인의 취업도 어려운 상황에 외국인의 위장 취업 시도라는 말이 반가울 리 없고,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 인권을 생각하면 성범죄에 대한 우려도 지울 수 없었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걱정이다. 난민들을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하고 싶다. 저 멀리 중동이나 아프리카 일인데 뭐, 하고 눈 딱 감고 모른 척해보고도 싶다.
그런데 언제까지 외면만 할 수는 없다. 난민들은 이미 여기 와 있고, 난민 협약은 국제법이라 설령 온 국민이 원한다 해도 그냥 폐기할 수 없다. 게다가 앞으로 난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분쟁뿐이 아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난민"이라는 단어마저 우리의 일상어가 될지 모른다. 난민이라는 단어를 못 본 척 쓱 지울 수 없는 상황은, 요르단이나 터키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더는 피할 수 없다. 무지와 혐오는 미봉책조차 되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게 있다면, 피는 피로 이어지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것. 덮어놓고 피하는 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더듬어 알아내고 지금 할 수 있는 그나마 가장 괜찮은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뿐이다.
너무 멀고 낯설고, 잘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을 다짜고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서 첫걸음을 떼야만 한다.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불안이 불안을 부풀리면 모두가 괴롭다. 불안의 그림자에 불을 비추고,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왜 그런지 찾아봐야 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유럽을 조금이나마, 그러나 갑작스럽게 열었다. 유럽은 한동안 난민을 부지런히 받아들였고, 이내 몰려드는 난민을 다 감당하지 못하겠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자 극우 정당들이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일란의 사진이 감성 팔이였으니 다시는 이런 사진에 속지 않겠다고 했다. 난민을 받으면 유럽처럼 될 거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난민 수용 반대를 주장하는 청와대 청원은 70만을 넘겼다. 한쪽으로 가다가 급하게 방향을 튼 자리, 스키드 마크 같이 까만 마음들이 남았다.
많은 이들이 어려운 고민을 한다. 아직 답은 잘 모르겠다. 삶은 논술 문제가 아닌데, 난민 문제는 아직 우리에게 찬반 논쟁 주제이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고민들이 우리 모두를 지켜줄 거라 믿는다. 우리가 지키고 싶어 하는 소중한 가치들은 서로 부딪칠 수 있다. 주머니에 담은 구슬들이 달그락거리듯 그렇게 의견이 부딪는 건 아무래도 좋다. 다만 우리가 그 구슬을 버리지만 않았으면 한다.
해변에 쓸려 온 아일란이 우리 마음에도 쓸려온 후. 사람들은 그 여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일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내도 아이들도 잃은 그는 모든 꿈이 사라졌다고 대답했던 그는 이제 다시 배에 오르려 한다. 아들 이름을 딴 아일란 쿠르디 호를 타고, 한때의 자신 같은 이들을 구조하려 한다.
아들 이름을 따서 아일란 쿠르디 호라고 하지만, 사실 아일란의 성씨는 쿠르디가 아니다. 쿠르드계 사람이라 쿠르디라고 보도됐고, 그대로 알려진 것이다. 이제 아일란이라는 이름도 보통 명사처럼 되어간다. 불안정한 정세 속에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아이들 사진이면 "제2의 아일란"이란 말이 붙으니까.
작은 아이의 이름은 배 이름이 되고 담론이 되었다. 들어보지 못한 그의 목소리가 이름으로 여기 남았다. 구슬 같았을 아이를, 아이의 짧은 생보다 훨씬 길었던 이 의미 모를 전쟁을 아파하며 혼란을 직시한다. 외면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그게 지금 여기의 시작점이다.
*중간에 삽입된 이미지는 글 속의 사건, 인물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