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

어둠 덮인 땅에도 희망은 자란다

by 선이정

201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순간. 나는 인도에 있었다. 수상자는 파키스탄 출신 말랄라 유사프자이와 인도 출신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반목과 갈등의 상징 같은 두 나라 출신을 나란히 선정했다. 2014년 노벨 평화상은 그 둘을 선출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래서 더 가슴 뭉클한 순간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말랄라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 학교 숙제에서, 서점 매대에서, 교회 설교에서 그 이름은 계속 울려퍼졌다. 기묘한 기대감이 옅은 축제 분위기처럼 솔솔 풍겨나고 있었가. 나도 그 분위기를 타고 매대에서 <나는 말랄라>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말랄라가 입은 분홍색 옷 때문에 색감이 화사한 표지와는 달리, 내용에서는 어둑한 피 냄새가 풍긴다.


말랄라가 떠나온 후로 다시는 밟지 못한 고향 땅을 묘사하면서 책이 시작된다. 추후 노벨상을 탄 이후의 말랄라는 다시 찾아간 곳이지만, 글을 쓰던 당시의 말랄라로선 살아생전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고향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문장은 그 나이답지 않았다.


고향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은은한 기억으로 묘사하는 건 대체로 나이가 찼을 때 주로 하는 일이다. 이미 떠나 온 지 꽤 되어 “고향에 고향에 이르러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나 쓸 법한 문장이니까. 그러나 말랄라는 1997년생이고 글을 쓰던 당시엔 십대였다. 보통은 고향이란 단어조차 잘 쓰지 않을 나이.


과거를 회상하기보다는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 더 많은 그 나이에, 말랄라는 타의로 잃어버린 과거의 공간을 그린다. 아름답게 묘사된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에서 말랄라네 가족은 학교를 운영했다. 같은 지역에서 탈레반 조직이 여학생들을 학교에서 쫓아내고 있었다. 그 상반되는 풍경에 자연히 말랄라로서는 여성 교육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탈레반은 누구기에 여학생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는가. 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내세운 조직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때 정권을 잡을 정도로 성했으며, 국경 넘어 파키스탄에도 상당히 들어와 있었다. 이들이 권력를 잡았던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은 파괴와 혐오, 폭력과 억압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평생 이슬람교도로 살아온 사람이어도 자기들 잣대에 맞지 않으면 "당신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다"라며 총칼을 겨누고, 부정부패 숙청이란 미명 하에 너무 많은 이들을 죽였다. 언론을 탄압했고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서양에서 오는 건 뭐가 됐든 일단 거절했는데, 서양 문화를 접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깃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탈레반이 말하는 ‘이슬람 율법’은 사회 전체를 고통스럽게 짓눌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에게 어마어마한 억압을 가했다.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어디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디아 하시미의 소설을 보자. 주인공은 임신했을 때 탈레반 손에 남편을 잃었다. 어느덧 만삭이 된 몸이 심상치 않아 병원에 가는 길, 탈레반과 마주친다. 탈레반은 “여성은 반드시 남성을 대동해야만 길을 나다닐 수 있다”고 윽박지른다. 주인공은 급한 상황을 호소해 보기도 하고, 아직 어린 아들도 내세워본다. 소용 없었다. 결국 주인공은 서럽게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애니메이션 <파르바나>에서는 더욱 끔찍한 장면이 나온다. 탈레반에 끌려간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아내가 거리에 나섰을 때다. 탈레반이 원하는 대로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덮는 옷 '부르카'를 뒤집어썼다. 길에서 마주친 탈레반 남성들에게 제지는 물론 폭행까지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온몸을 덮었다 해도 길거리에 나다녀선 안된다는 거다.


여성이 혼자서는 외출할 수 없는 것도, 숨구멍만 겨우 뚫고 온몸을 덮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도,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 갇힌 것도 다 탈레반 짓이었다.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런 짓이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명예와 존엄이란, 여성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일상 공간에서 싹둑 잘라낸 이들이 들먹일 단어가 아니다. 그들이 옷 한 벌까지 문제 삼으며 좀스럽게 굴지 않아도, 여성이 알아서 명예와 존엄을 쌓을 수 있다.


말랄라도 그런 여성이었다. “여자아이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꾸준히 익명 블로그에 게시했다. 그게 다다. 등교하려고 버스에 앉아 있던 어린 말랄라를 붙잡고 이름만 확인한 다음 총을 쏜 이유가 고작 그거다.


말랄라는 총 세 발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 죽지 않은 건 어쩌면 기적이었다. 영국으로 호송되어 치료를 받고 살아남은 말랄라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익명 블로그에 숨어 목소리를 내던 말랄라는 이제 UN 본부에서 의견을 밝히고 있었다. 곳곳에서 말랄라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타임지 표지 인물, 사하로프 상 수상자, 캐나다 명예시민, 킹스 칼리지 대학교 명예박사, 역대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말랄라는 지금도 평범하지 않은 기적을 일상으로 살고 있다.



말랄라는 운이 좋았다. 물론 세 발이나 총을 맞고도 살아났다는 것 자체로도 운이 좋기는 했다. 탈레반의 총에 맞은 이들 대부분은 영국으로 호송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어찌저찌 병원까지 간다 해도, 병원 침대에 누운 이들 중 회복하지 못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러나 말랄라의 행운은 그 시점에 시작된 게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로 총을 맞은 것이기는 하지만, 말랄라가 탈레반 치하 지역의 여성임에도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데서 말랄라의 행운은 시작되었다. 우리가 태어나는 장소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래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너무나 터무니없지만 그래도 상상해 보자.


그 지역 많은 아이들처럼 초등학교 몇 년 다니다가 집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올 수 없었다면,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이 경직된 사회만 접했다면. 아마 적당히 가족이 정한 대로 결혼했을 것이다. 육아와 가사 아닌 모든 꿈은 사장되었을 것이다. 그보다 운이 나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말랄라는 지금의 말랄라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말랄라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탈레반이 취하는 정책이 매우 비정상이고 옳지 않다는 생각을 똑똑하게 해낼 수 있었다. 뭐가 정상인지 자기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말랄라가 교육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컸다는 증거다.


말랄라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을 다른 누군가, 말랄라와 같은 풍경을 보고 살았을 다른 누군가, 말랄라와 같은 물을 마시고 살았을 다른 누군가,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는 그냥 그 환경에 던져져 있었을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할 만큼 용감하고 똑똑한 누군가가 기본적인 교육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로 여전히 그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


그래서 말랄라의 이름은 단지 말랄라 한 사람만의 이름이 아니다. 파키스탄 북서부 다른 여자아이들의 이름, 더 나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으로 인해 어린 시절과 학교생활을 빼앗긴 여자아이들의 이름, 그보다 더 나아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범죄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자아이들의 이름이다.


꼭 탈레반의 피해자, 이슬람 극단주의의 피해자뿐일까. 이슬람 아니라 그 어떤 종교든 마찬가지다. 종교가 독뱀처럼 사람 심리의 가장 여린 살을 파고들어 쥐고 흔들 때, 혹은 종교가 정치나 경제를 위해 사탕발림 명분으로 전락할 때, 그렇게 종교가 극단으로 흘러갈 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에서 실컷 보았다.


말랄라와 같은 아이들이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말랄라와 같이 똑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그러나 기회를 박탈당한 여자아이들의 존재를. 탈레반이 그들을 집안이나 무덤에 가두었다고 해서 그들을 지워낼 수는 없다. 어둠 덮인 땅에서는 지금도 숱한 희망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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