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준비의 시작

by 선이정

현실이 스포일러인 영화의 결말

저도 이 영화를 결말부터 듣고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를 알게 된 건 아주 특이하게도, 사회면 기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칸영화제 소식임에도 문화 면이 아닌 국제 면에 실린 기사였습니다.

그즈음 전주에서 영화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를 보고 리뷰를 쓸 때 그 기사를 링크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담긴 사람, 팔레스타인의 사진 기자라는 파티나 하수나(25세)의 말을 인용해 담았습니다.


“내가 죽는다면, 세상에 울림이 있는 죽음이 되길 바란다. 그저 한 줄 속보에 실리거나, 희생자 숫자로만 남고 싶지는 않다. (…) 나는 세상이 듣는 죽음,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묻히지 않을 불멸의 이미지로 남고 싶다.”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이슈가 아닌 사람으로 보는 것. 그건 제가 처음 쓴 책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공감하며 인용하긴 했어도, 그땐 몰랐습니다. 그의 유언 집행인이 되고 싶어질 거란 걸.


파티마 하수나가 죽기 하루 전. 칸영화제에서는 ACID 선정작이 발표됐습니다. ACID는 칸영화제에서 우리가 흔히 듣는 경쟁 부문과 다른, 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에서 운영하는 별도 섹션인데요. 뭉뚱그려 말하자면 칸영화제 독립영화 섹션이라고나 할까요. 파티마 하수나가 담긴 영화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도 여기에 선정되었습니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 사진기자 파티마 하수나 두 사람이 1년여 기간 동안 영상 통화로 주고받은 대화를 담은 영화입니다. 자기 땅을 떠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 자기 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 거울처럼 맞닿은 두 예술가의 대화이자, 광기 어린 시대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은 영화가 완성되고 나서 파티마 하수나와 (마지막이 된) 영상 통화를 합니다. 우리 영화가 칸영화제에 가게 되었다고. 칸영화제 아냐고. 가고 싶냐고. 파티마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가보고 싶다 했습니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안에서 그 질문은, 이제 파티마를 가자지구에서 빼내려는 계획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파티마는 이미 가자지구 곳곳을 다니며 찍을 사진으로 가자지구의 현실을 알리는 저널리스트였으므로 그전이라고 안전하단 법은 없었지만 (언론인 타깃 살해. 당연히 불법이지만 가자지구를 비롯한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영화가 칸영화제를 필두로 세계 곳곳에서 공개된다면 더더욱 파티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차차 계획을 세워보자. 그러나 계획을 세우지 못합니다. 통화 다음 날, 파티마의 집은 폭격을 맞습니다.


약 한 달 후 칸영화제, 세계의 영화인들이 모였습니다. 줄리엣 비노슈, 마크 러팔로, 리차드 기어, 하비에르 바르뎀, 수잔 서랜든, 호아킨 피닉스 등 아실 만한 배우들. 페드로 알모도바르, 기예르모 델 토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알폰소 쿠아론, 조슈아 오펜하이머 등 유명 감독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수상 직후 손을 덜덜 떨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가자지구를 포함한 모두의 ‘비인간화’를 비판했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까지.


이들은 파티마 하수나의 명복을 빌며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규탄했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줄리엣 비노슈는 “파티마 하수나는 원래 오늘 여기 우리와 함께 있었어야 했습니다”라며 파티마가 생전에 쓴 시를 읊고 칸영화제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예술은 남습니다(L’art reste). 예술은 우리 인생과 꿈의 강력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그 삶과 꿈을 끌어안는 거죠.”


그렇게 파티마 하수나의 삶은 본인이 꿈꾼 대로, 세상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습니다. 그 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발제발제발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다시 부산. 여기는 두 번이나 표를 바꾼 기차 안입니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오래 진행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라는 저의 무력한 질문이 녹아들었고, 감독님의 삶과 꿈을 들었고, 종내는 같이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와서도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를 잃은, 그 사실을 아직도 실감할 수 없는, 친구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유사 경험으로 아는 사람의 눈에서 많은 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슬픔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의문과 분노도, 어떤 일이 틀렸다 잘못됐다 말하는 단단함도. 그 마음이 저에게 그대로 밀려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마감이 아직 남았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쓰지 않기로 합니다. 사실 쓸 시간이 아니라 읽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왓츠앱으로 계속 넘어오고 있는, 감독님이 보내주시는 각종 자료들을. (파티마의 집에 떨어진 폭격이 그냥 랜덤 폭격이 아닌, 타깃 폭격이었음을 증명하는 연구조사 보고서부터… 이란 여성을 위한 청원까지…) 그리고 감독님 선물드릴 명태를 살 때 어쩐지 같이 집어 들었던,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한강 작가의 문장이, 지금의 저에게는 이 영화와 가자지구에 대한 문장처럼 읽혔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기차에서 내내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어서 한강 작가가 소설을 마치고 썼던 문장들을 읽습니다. “더 이상 자료를 읽지 않아도 된다. 검색창에 ‘학살’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로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 울지 않아도 된다.” 읽기만 해도 뼈가 시린 이 문장들이 제 것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뭘 하겠단 건지 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요. 제가 할래요. 울어도 좋고 괴로워도 좋으니, 속이 헐어버린대도 좋으니 제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파티마 하수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미 350여 명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영화는 세계 곳곳에서 착착 상영될 겁니다. 가자지구의 현실은 너무 커다란 이름들과 얽혀 있고, 객관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손을 뻗어야만 할 것 같은 괴로움은 왜였을까요


오래전 영화 <애프터썬>을 보다가 문득, 시간이 직선형으로 흐르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뒤에서 앞으로 착착 가는 것 같지만… 가끔씩 사랑이 우리를 그 선형 바깥으로 이끄는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그의 전 시간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 상대의 과거에 위로의 말을 놓아주고, 상대의 미래에 안전한 말을 미리 놓아주는 것도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눈물 나게 그리워하겠지’ 하고 확신하게 되기도 합니다. 마치 미래의 나 자신이 잠깐 와서 귀에 속삭이고 갔다고 해도 이것보다 더 확신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말을 전하고, 시간의 바깥에서 들리는 말을 듣습니다.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영화가 제게 가르쳤으니, 저 또한 시간의 물결을 가르고 어딘가 누군가에게 가 닿고 싶었습니다. 시공간을 거슬러, 서로가 서로에게 구조 신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아마도 내가 오늘 그 구조를 받은 것 같다, 고 생각했습니다.


파티마가 죽고 없는 세상에서, 그가 그런 방식으로 죽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인터뷰 한 편에 담아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잘라내지 않고 최대한 살려 적어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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